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라캉)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나는 살아오면서 내게 ‘두 개의 인격’이 있다는 느꼈다.

 하나는 ‘자신감 넘치는 나’ 또 하나는 ‘한없이 초라한 나’.

 두 인격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자신감 넘치는 나’는 항상 세파(世波)를 당당하게 헤쳐 나갔다. 

 하지만 ‘한없이 초라한 나’는 조그만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았다.

 싫어도 싫단 얘기도 못하고 속으로 삭였다.

 그러다 싫은 사람들을 아예 외면했다.

 차츰 나는 외로워져 갔다. 

 생각해 보면 내 삶에 행운이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스스로 그런 것들을 거부했다.

 인문학을 공부하며 ‘내 두 인격’을 알게 되었다.

 내 ‘세 살 버릇’이 내 삶을 이렇게 이끌어 온 것이다.

 세 살까지의 내 삶은 유아(乳兒)가 헤쳐 나가기엔 너무나 처절한 것이었다.   

 나는 내 상처를 김수영 시인의 ‘풀’처럼 치유 했다.

 아프면 쓰러져 누워 울었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문학을 공부할 때나 후에 강의를 할 때도 뒤풀이 시간에 꺼억 꺼억 울었다.

 그렇게 울면서 알았다.

 나는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것을.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는 것을.  

 꽤 많은 시간을 운 후 이제는 울지 않는다.

 일어나 웃을 수 있으므로.

 깊은 밤에 거리에 나가보면 가끔 구석진 곳에서 우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대개 혼자 운다.

 하지만 나는 풀처럼 함께 모여 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은 틀리므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라캉)’하니까.

 어릴 적엔 어른들이 우는 것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울면 안 돼!’가 도덕윤리가 되었는지 아무도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울지 않는다.

 그럼 ‘울고 싶은 마음’은 어디로 갈까?

 마음 안으로 들어가면 병(病)이 되고 밖으로 나가면 범행(犯行)이 될 것이다.

 연암 박지원은 요동벌판을 보자 외쳤다.

 “훌륭한 울음 터로구나, 크게 한 번 통곡할 만하도다!”

 나는 촛불 집회가 우리 모두 크게 한 번 통곡할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함께 크게 울고 우리 모두 함께 일어나 크게 웃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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