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Daum영화]

<그물>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영화는 친절하게 이런 설명을 해준다. 영화의 내용은 모두 허구이며, 현실에서 비슷한 사건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이는 전적으로 우연의 일치에 의한 것이라고. 그렇다. <그물>의 의미는 영화 <자백>을 통해 비로소 명백해진다.

기관 고장으로 인해 조수에 떠밀려 남하한 어부 남철우는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는 도중 간첩으로 몰린다. 혐의가 불분명하자 이번에는 귀순을 강요받는다. 그래도 남철우의 의지가 꺾이지 않자 국정원은 국정원에서 조사 받다 자살한 탈북자와 엮어 간첩 조작을 시도한다.

남철우는 말한다. “내가 그물에 걸렸구만, 아주 단단히 걸렸구만…….” 어찌 유우성 사건과 자살한 탈북자 한종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 [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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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두 영화에는 사실과 허구 그 이상의 차이가 있다. <자백>은 유우성 씨 간첩 조작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아 현재의 조작으로부터 과거의 조작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조작 공화국의 잔혹사를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그물>에서 북한 어부 남철우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간첩 조작과 귀순 종용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진다. 남철우라는 거울을 통해 <그물>이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것은 ‘자유 대한민국’이라는 번듯한 포장지 이면의 남한 사회의 실체와, 이념 대립이 낳은 왜곡되고 비뚤어진 인간 군상이다.

그런 점에서 <그물>의 접근은 <자백>보다 추상적이지만 본질적이고, 남한 사회의 지배적 의식에 대한 내적 성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다.

▲ [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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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사회가 남철우에게 던지는 당근과 채찍은, 이념 대립 과정에서 생긴 피해의식이 왜곡된 애국주의와 결합하여 간첩 색출에 혈안이 된 인물과, 독재 국가에서 건너온 ‘불쌍한’ 자에 대한 연민과 남한 체제에 대한 우월감에 가득 차 귀순 사업에 골몰하는 인물로 구성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기 확신이 강하고 신념에 차 있다. 그 과도한 자기 확신의 끝에서 색출되지 않는 간첩은 조작으로 채워지고, ‘자유 대한민국’의 품에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강압과 억류라는 모순된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간첩 조작은 다른 사람을 모두 ‘잠재적 간첩’으로 간주함으로써 정당화된다. 상대의 자유의지에 반하는 귀순 공작은 상대를 세뇌당한 금치산자로 취급함으로써 합리화된다.

북에서 온 남철우는 트로이의 목마처럼 위험한 잠재적 간첩이고, 북한 정권에 세뇌당해 어린아이처럼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된다. 그리고 국가 권력을 등에 업고 그들은 남철우의 인생에 폭력적으로 개입한다.

미친 듯이 애국가를 불러대는 조사관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섬뜩해진다. 맹목과 맹신에 사로잡혀 애국주의의 화신을 자처하는 국정원 조사관이나 간부야말로 ‘이데올로기의 그물’에 포박된 자들이다.

남철우에게 눈을 뜨라고 윽박지르는 그들이야말로 ‘맹목’이란 말 그대로 왜곡된 신념에 눈이 멀어 버린 무섭고도 불쌍한 자들이다.

▲ [출처-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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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습게도, 실상은 이렇다. 간첩 조작을 통해 양산된 간첩이 역으로 ‘잠재적 간첩’이란 표현을 정당화시키는 데 이용된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호흡하라고 강제로 보여주는 것은 자본주의의 허영과 환락과 천박함이다.

남철우를 위해서라는 귀순 공작은 사실은 남철우를 남한 체제의 우월성 선전 도구로 이용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고, 남철우의 인생을 망가뜨리며 끝까지 남철우에게 불어넣고자 그토록 애쓰는 것은 물질을 향한 자본주의적 욕망이다.

영화에서 가장 상식적인 인간으로 나오는 국정원 감시 요원 진우조차 남철우에게 저열한 욕망의 불꽃을 지피는 일을 선의와 연민의 이름으로 행한다. 그가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의 달러를 남철우의 손에 쥐어 주는 것은 얼마나 상징적인가.

그 알량한 손길을 뿌리치지 못함으로써 남철우는 파멸을 자초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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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남한 사회의 치부를 예리하게 들추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영화의 시선은 좀더 확대된다. 북으로 송환된 남철우는 다시 보위부에 끌려가 강도 높은 조사를 받는다.

생업에 충실하고 가족밖에 모르는 한 어부가 임진강에서 표류하다 남북간 대립이 쳐놓은 이데올로기의 그물에 걸려 남북 양쪽 사회에서 모두 수난을 당한다는 설정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금기를 범한 자는 이제 어느 쪽 사회에도 속할 수 없게 된다. 남에서 남철우를 잠재적 간첩으로 간주하듯이, 눈을 질끈 감고 아무 것도 보지 않으려 한 남철우에게 남한의 조사관들이 강제로 눈을 뜨게 하여 자본주의 남한 사회를 보게 한 이상, 북에서도 남철우는 잠재적 반체제 분자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다.

결국 임진강에서 영원히 표류하는 영혼으로 남게 된 남철우의 최후는 분단 체제의 비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감독은 이 영화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시대에 우리를 돌아보는 영화’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남북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된 이때, 남북을 가르는 경계선이자 미‧일‧중‧러 강대국을 중심으로 동서를 가르는 경계선인 임진강을 배경으로 이데올로기의 그물에 걸려 퍼덕거리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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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화가 남한 사회에 대한 줌인으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영화의 초점은 흐려진다. 행위의 주체를 분명하게 지목하지 않은 채 피동형으로 표현된 ‘이데올로기의 그물에 걸려 퍼덕거리는 현실’이란 표현은 얼마나 추상적인가.

그물을 치는 자는 누구인가? 남북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이런 양비론은 너무나 상식적이라 구태의연하며 실제 문제 해결에는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다.

남과 북 모두라는 표현이 식상하다면 ‘국가’라고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주제를 개인을 짓밟는 국가의 횡포라고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러나 ‘국가’란 실체를 지닌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실상은 국가 권력을 장악한 지배 집단을 인격화한 데 지나지 않는다. 영화는 보이지 않는 ‘국가’라는 허상을 향해 주먹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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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문제는 다른 데도 있다. 특수부대 출신 평범한 어부가 “자유가 있다고 가족을 버릴 수 있습네까?”라고 자유로운 남한과 가족이 있는 북한을 대비시키는 반체제적 발상을 하고,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다는 나라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게 금지됐으니 다른 일을 찾아 보라’고 권유한다거나 하는 것은 사실 관계와도 어긋난다.

국정원 요원들의 심리는 남한의 사회 체제와 상호 연관되어 나름의 동기와 근거를 갖고 있는 데 비해 북의 보위부 요원들은 모두 부패했으며 그냥 나쁜 놈이다. 그들의 쓸데없이 격앙된 모습을 보며 나는 “왜 저러지?” 하고 의아해졌다.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서 무수한 물음표를 떠오르게 한다. 남한 사회를 보는 감독의 통렬함과 예리함은 북한 사회와 관련된 세부 묘사에 가면 현저하게 상투화된다.

심지어 감독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1989년 황석영이 방북 후에 쓴 책 <사람이 살고 있었네> 이전 수준으로 돌아간 듯하다. 보지 않고 살아온 지난 10여 년, 남북간 교류 단절의 역사가 이렇게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나를 북으로 돌려보내 주시라요!” 남철우의 절규는 통절하게 가슴을 친다. 그러나 내게는 영화 <자백>의 낮은 목소리가 더 묵직하게 여운을 남긴다. <그물>과 <자백>은 둘 다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함께 보길 권하고 싶다. 다만 현실은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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