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Daum 영화]

엔딩크레딧을 따라 끝도 없이 목록이 이어진다. 재심으로 무죄를 받았거나 현재 재심이 진행 중인 간첩 조작 사건의 목록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한참을 이어지는 동안, 객석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저토록 많은 목록이라니, ‘나쁜 나라’ 대한민국의 전율스러운 진실 앞에 관객은 말을 잊는다.

영화 <자백>은 해석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사건을 보여줄 뿐이다. 영화의 줄기는 유우성 사건으로 잘 알려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이다.

▲ [출처-Daum 영화]

탈북자 신분으로 2011년 서울시 공무원에 특채되었으나, 국가정보원의 내사에 의해 국내 탈북자 200여 명의 정보를 북한에 넘겨준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2013년 1월 서울시청에 근무하고 있던 탈북 공무원 유우성 씨는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긴급 체포된다. 유우성 씨는 2004년 탈북한 재북 화교였다.

그의 간첩 혐의는 오로지 여동생의 자백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여동생 유가려는 국정원 조사에서 풀려난 이후 국정원에서 폭행, 협박, 회유를 당해 거짓 진술을 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이에 재판에서 불리해진 국정원은 유 씨의 혐의를 입증할 새로운 증거로 유 씨의 중국-북한 간 출입경 기록 등 3건의 문서를 재판부에 제출했으나, 중국 대사관이 3건 모두 위조된 것임을 확인해 주면서 증거 조작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유우성 씨는 화교인데 탈북자 행세를 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 사건은 국정원의 간첩 조작 의혹의 대표적 사례로 남았다.

▲ [출처-Daum 영화]
▲ [출처-Daum 영화]

영화는 유우성 씨 간첩 조작 사건이라는 큰 줄기에 두 개의 사건을 더 연결시킨다. 동생으로 하여금 오빠를 간첩으로 몰게 하는 반인륜적 공작으로 지옥을 경험한 유우성 씨는 다행히도 국정원의 덫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또 다른 탈북자 한종수 씨는 기어이 그 덫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본명이 한준식이라는데 어찌 된 일인지 국정원의 기록에는 한종수로 남은 그는 국정원 합동신문센터에서 자살했다. 아무런 흔적도, 울어 줄 가족도 없이 그의 죽음은 조용히 묻혔다.

감독이 어렵사리 연결된 전화로 북에 남겨진 그의 딸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려줄 때, 어린 딸이 짧게 내지르는 탄식,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흐느낄 새도 없이 전화는 끊어진다.

나는 굳이 아버지가 죽은 정황을 알려주는 감독의 처사가 잔인하다고 생각했으나, 어떤 의무감인 듯 빠르게 상황을 전달하는 감독의 탁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래, 아버지 제삿날은 알아야지, 어찌 죽었는지는 알아야지 하고 목이 메었다.

또 한 사람, 간첩 조작 사건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등장하는 인물은 유학생 간첩단 조작 사건의 피해자 김승효 씨. 재일교포로 모국의 서울대학교에 유학중이던 그는 박정희 정권의 민주화운동 탄압의 희생양이 되었고, 피폐해진 몸과 함께 정신줄을 놓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고통스런 기억을 꾸역꾸역 망각의 늪으로 밀어 넣고 나머지 세월을 살았다. 그는 찾아간 촬영팀에게 ‘가슴이 아파 죽을 지경’이라며 “한국은 나쁜 나라야.”라고 되뇐다. 우리는 한 인간을 버러지처럼 짓밟은 나쁜 나라에서 살고 있다.

▲ [출처-Daum 영화]
▲ [출처-Daum 영화]
▲ [출처-Daum 영화]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분단에서 비롯되었다. 분단 체제가 만들어낸 수많은 조작 간첩의 희생 위에서 반민주적인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집권이 가능했다.

그리고 민주화 시기를 거치면서 더 이상 고문에 의한 간첩 조작이 불가능해지자 한동안 잠잠했던 간첩 조작 사건은 탈북자의 증대와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탈북자의 존재는 처음에 북한의 정치적‧경제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좋은 선전물이었다. 남북간 긴장이 고조되면서는 아예 적극적으로 집단 탈북을 권유함으로써 북한 내부의 분열과 와해를 촉진하는 유력한 도구로 활용 가치가 높아졌다. 이들은 이제 공격적인 통일 선봉대로까지 그 위치가 격상되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난민도 아니고 국민도 아닌 이들의 어정쩡한 처지는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비국민’으로서 가장 만만한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간첩 사냥은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것이다.

분단 체제가 빚어내는 공포와 불안으로 연명해 온 민주주의의 적들은 이제 ‘북에 다녀온 간첩’이 아니라 ‘북에서 내려온 간첩’이라는 좀 더 손쉬운 조작의 대상들을 찾아냈다.

우리 사회에 수많은 간첩이 있다는 믿음을 퍼뜨리는 일은 안보의식이라는 미명 하에 민주주의의 유린을 견디게 하는 명분이 될 것이고,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종북몰이의 도구가 될 것이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간첩 조작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다.

▲ [출처-Daum 영화]
▲ [출처-Daum 영화]

‘뉴스타파’의 기자로서 처음 유우성 사건을 접하고 탐사보도의 필요성을 느꼈다는 최승호 감독은 말한다. “몇 십 년 전에 있었던 간첩조작이 지금 다시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다면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급격한 후퇴를 말해주는 것이고, 이런 짓이 계속 허용되면 조만간 7~80년대처럼 정보기관이 시민의 일상 영역에까지 들어와 사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간첩조작의 뿌리를 뽑는 장기간의 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거짓으로 쌓아올린 정권, 거짓말 공화국의 중심에는 국정원이 있다. 카메라를 든 감독은 그 한가운데로 파고들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거짓말’의 한 자락을 들췄다. 그 카메라 앞에서, 자아 분열적 거짓 자백을 해야 했던 유가려가 혼잣말처럼 뇌까린다. “내가 올가미에 걸렸구나…….”

이것은 영화 <그물>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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