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65회부터는 남측 교회와 해외교회가 주도해 북측 영토에 교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건축사업이 중단된 이야기들을 소개하며 그 원인을 통해 합의점을 찾고자 한다. 이중에는 ‘평양조용기심장전문병원’내에 마련될 30평 규모의 ‘병원교회’와 평양 대동강변 IT단지에 설립될 ‘평양국제하베스트교회’, 예장 합동 측의 ‘평양장대현교회’등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현재 추진 중인 미국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의 주도로 지어질 ‘평양국제외국인교회’도 다루고 평양 조선영화촬영소 산속에 지어진 ‘형제산교회당’과 거기 딸린 목사관을 방문한 이야기를 전할 것이며 나진선봉교회도 다룰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분류된 ‘통일교’가 평양보통강호텔 앞에 설립한 ‘국제평화센터’와 평화자동차 공장 방문이야기들을 다룰 것이며 안식일교와 몰몬교의 대북사역 등도 심도 있게 다룰 것이다. / 필자 주 

 

라진선봉(라선시) 경제특구를 가다
      
함경북도에 있는 라선시(羅先特別市)는 ‘라진(羅津)’과 ‘선봉先鋒’이라는 두 도시를 통합해서 만든 해안도시를 말하며 북한의 13개 경제특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다. 현재 중국 여권 소지자라면 조선족이든 한족이든 라선시를 입국해 비즈니스와 관광이 가능하며 북 당국에서는 윈칙적으로 남한 국적자를 제외하고는 세계 어느 나라든 비자 없이 누구나 입국이 가능하도록 규정을 세웠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반드시 비자를 발급 받아야 한다. 북한 전문 여행사를 통해 입국할 경우 자신의 방문 신청서와 함께 방북 목적과 간단한 자기소개서를 제출한 후 비자를 발급 받으면 된다. 그러나 라선시와 그 외 여러 지역을 동시에 여행해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누구든지 북 당국으로부터 정식 비자를 받아야 한다. 필자는 그동안 북중 간에 인적, 물적 왕래를 목적으로 조성한 도로, 철도, 항만 등 이른바 ‘조중(북중)통상구로’라고 일컫는 다양한 교통로를 차례대로 모두 방문했다.
    
2015년 12월에는 가장 마지막으로 중국 훈춘에서 라선시로 입국하는 권하통상구에 도착했는데 추운 겨울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화물자동차와 각종 트럭, 버스, 대형 컨테이너 차량 등의 행렬들이 끝없이 일렬로 늘어서 입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수속을 밟고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너무 많은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보니 운전자들은 아예 시동을 끄고 기다리고 있었다. 권하세관에서 수속을 마치면 두만강  다리를 건너 라선시에 있는 원정리 통상구를 거치는데 중국 측 권하세관과 라진시 원정세관은 오고가는 차량들의 출입국 수속으로 몹시 분주했고 생각보다 출입국 수속이 지체되는 듯했다.
     
권하통상구에서 라선시에 진입하는 다리 밑에는 두만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매우 노후하고 오래된 다리는 출입국 하는 차량들을 힘겹게 지탱하는 듯 보였다. 현재 북중 합작으로 공사를 하고 있는 두만강 신철교는 오래된 다리와 함께 대비되면서 붐비는 차량 행렬들과 함께 매우 역동적으로 보였다. 두만강 유역 황금 삼각주에 잇닿아 있는 라진선봉지구는 면적이 무려 7백 41 평방미터(㎢)이며 인구 20만 명에 육박하다고 한다. 푸른 동해바다가 펼쳐진 라진만에 아늑하게 위치해 있는 라선시는 최근 경제특구에 걸맞는 개방정책과 아름다운 풍치로 많은 외국의 신규 투자자들과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제 필자는 이곳의 교회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라선시는 외국인들과 해외동포 기업인들이 상주하고 있거나 장단기적으로 체류하는 특수한 경제구역이기 때문에 반드시 교회당이나 성당이 한 두 개 정도는 존재하리라고 여겼으나 확인 결과 라선시에는 공식적인 교회당이나 성당은 단 한 곳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외부요인에 의해 존재 할 수 없었다. 라선시에도 평양처럼 공식적인 교회당이 세워져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북측의 여러 가지 사정과 상황 때문에 아직까지 남한교회 측이나 해외교회가 주도하는 교회당 건축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봉수교회나 칠골교회처럼 북 조그련 산하의 교회당도 아직 세워지지 않고 있었다.
    
특히 남한교회는 그동안 각 교단 차원에서 많은 교회들과 대북지원단체와 선교단체들을 통해 라진선봉지역에 교회당을 설립하고자 무던히 안간힘을 써왔으나 모두 허사였다. 외국인들이 정식으로 투자하기 시작한 이래 20년 동안 남한의 교회들과 해외 한인교회들은 다방면에 걸쳐 교회당 건축을 성사시키고자 무던히도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나 교회당 건축은 차치하고 오히려 라진선봉지역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의 체포사태와 억류, 구금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단골 장소가 되고 말았다.
     
필자는 이번 방북기를 통해 그동안 한국교회의 수많은 교회들과 단체들이 라진선봉에 교회당을 건축하려고 시도했으나 최종 단계에서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과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비즈니스 활동을 위해 장단기적으로 체류하는 외국인들과 해외동포 경제인들이 많이 왕래하는 경제특구에서 왜 이같이 체포나 억류사건들이 연속으로 발생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필자는 남과 북과 해외동포 모두가 합의하고 공유할 수 있는 기독교적인 공동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대안책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위해 가장 이상적인 대북사역과 선교방식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미국 남가주에서 라선시로 건너가 현재까지 염소농장을 운영하는 크리스 김이라는 재미교포와 미국의 대북 구호단체인 만나미션 소속의 내과의사 이영호 박사의 실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동포애와 신앙의 삶이 무엇인지 엿 볼 수가 있었다. 통일지향적인 대북사역을 현장에서 묵묵히 실천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북한선교의 모델과 선교적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또한 필자는 앞으로도 라진선봉에서의 공식적인 교회설립은 요원하고 불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과 함께 북한 경제특구의 상징인 라선시에서의 종교허용과 종교자유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를 점검해보았다. 현재 북한이 처한 북미대결전과 남한의 극우 보수정권과의 대결구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라선시에서의 강경한 종교 제한 정책을 펼 수 밖에 없는 북측의 입장도 생각해보았다. 또한 그동안 라선시에서 체포되고 억류된 대표적인 사례들 중에서 미국의 전용수(에디전) 목사, 배준호(케네스배) 선교사 그리고 캐나다의 김재열 선교사와 임현수 목사 이상 4인의 사건을 통해 왜 하필 자신들이 헌신적으로 대북 지원사업을 하는 현장에서 이와 같은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는가를 객관적으로 살펴보았다.
    
라선시에서는 예배를 통해 북 인민들을 끌어들이거나 기독교를 전파하는 행위는 일절 금기시되어 있다. 공식적인 교회당은 없어도 북 당국에서는 라선시에 상주하는 해외동포나 외국인들이 자체적으로 주일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 거주하는 미국교포 크리스 김과 그의 가족들과 사역 일행들 그리고 만나미션의 이영호 박사와 같이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의료봉사를 하는 사역자들은 라선시에서 어떤 방식으로 예배 공동체를 운영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 중국에서 라선시로 입국하기 위한 차량 행렬들이 권하통상구를 진입하기 위해 일렬로 대기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권하세관을 통과하기 위해 끝없이 늘어서 있는 차량행렬을 배경으로 삼은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8.15전에 이미 해방된 라진선봉의 역사적 유래
     
먼저 라진선봉의 역사적 유래와 배경을 잠시 살펴보면 선봉군은 라선특별시에 딸려 있는 군(郡)으로서 옛 이름은 웅기군(雄基郡)이라고 한다. 웅기는 해방 전부터 내려오던 경흥군을 대부분 포함했다. 한반도 최동북단에 있는 양항이었던 웅기는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만주와 일본을 잇는 종단항으로 선택되었고 소련이 일본과의 전투를 위해 웅기를 지나 한반도 북동부로 진격할 때 최초로 상륙한 지역이 바로 이곳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당시에도 항일투쟁의 방편으로 소련군과 함께 이곳으로 진격해 상륙함으로서 조선 최초로 8.15 이전에 이미 해방된 역사적인 지역이다.
     
한반도의 최동북단이지만 우리나라의 일부였던 웅기지역(라선지역)이 이처럼 일제강점기가 극에 달하던 시기에 본토의 해방에 앞서 먼저 광복을 맞이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북 당국은 이 사건을 두고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기 하루 전 날에 김일성 주석의 주도로 조선인들이 앞장서서 일본에 대한 공격을 가장 먼저 개시했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래서 원래 명칭이 웅기군(雄基郡)이었는데 그 지명을 ‘선봉군(先鋒郡)’이라고 개칭했다고 한다.
    
아무튼 2015년 현재 라선특별시는 20동 12리에 인구가 20만 명에 육박한 196,954명이라는 설명을 들으니 인구 200만 명을 꿈꾼다는 라선경제 특구의 당초 목표가 점점 이뤄지는 듯했다. 라선시의 행정구역 개편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1991년 12월 라진선봉지역을 ‘자유경제무역지대’로 선포하여 경제특구로 지정한 북 최고인민회의는 이후 1993년 9월에는 라진선봉시로 개편하고 직할시로 승격시켰다. 그 후 98년 말부터 ‘자유경제무역지대’라는 명칭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그냥 ‘경제무역지대’로 명명되었으며 2000년 8월 중순부터는 도(道)급인 라선직할시로 승격됐고 행정구역 명칭을 ‘라선시’로 요약해 호칭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2001년 3월에는 직할시이며 경제무역지대로 선포했던 라선시를 다시 함경북도에 소속된 시의 하나로 편입시켰다.
   
그동안 라선시는 직할시였기 때문에 함경북도라는 도명이 붙지 않았었다. 이에 따라 당시 직할시는 평양시, 남포시, 개성시 등 3개시로 줄었는데 이는 행정개편상 라선시를 함경북도에 포함시키면서 일반 시로 격을 낮춘 것이다. 이어서 2004년 1월에는 함경북도 라선특급시가 되었다가, 다시 2010년 1월 4일 도급인 라선특별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이곳 라선특별시는 다른 지역보다 행정 구역이 자주 개편되었는데, 이는 그만큼 북 당국과 최고지도부의 관심이 크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해방 전 라진선봉에 세워졌던 교회당들
      
라선특별시는 1991년 12월 자유무역지대로 지정된 후 95년부터 외국의 투자자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특히 라진선봉에 대한 국제투자 설명회가 열린 다음부터 전례 없이 외국의 투자가 활기를 띠고 있었다. 현재 170개 업체가 입주해 활발한 기업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중 대부분은 중국기업이며 그 뒤를 이어 미국과 유럽의 기업들도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다. 필자는 나진선봉은 과연 어떤 곳이며 어떻게 해서 경제특구로 지정되었는지 사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해방 전에는 이곳에 교회당들이 얼마나 세워졌으며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었는지 궁금해 오늘날의 라진선봉 경제특구 지역에 해방 전부터 존재했던 교회들을 살펴보았다.
      
필자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해방 전에는 이곳 라진선봉지역에 25개의 교회들이 운영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아직 확인이 되지 않은 교회들이 몇 개 더 남아있다. 먼저 라진지역에 있던 교회들 중에서 확인 곳은 총 8개 교회당이었으며 교파는 대부분 장로교회였다. 라진제2교회, 석포교회, 장산교회, 경성읍교회, 라진교회, 라진제일교회 6개 교회이며 나머지 2개교회인 경성교회, 사직동교회는 교파가 무엇인지 불확실하다.
     
또한 선봉지역은 총 17개 교회가 확인되었는데 장로교회는 조산동교회, 대암동교회, 서수라교회, 서포항교회, 웅기교회, 고무산교회, 황만동교회, 대진교회, 부령교회 9개 교회이며, 성결교회는 라진교회, 웅기중앙교회, 굴포교회 3개교회이고, 침례교회는 신상교회, 고성동교회, 홍의동교회, 웅기교회, 사회교회, 고무산교회 등 6개교회이다. 특히 장로교 소속의 고무산교회와 달리 같은 이름이지만 교단이 다른 고무산교회는 함북선이 지나고 무산선이 갈라지는 곳에 있던 ‘고무산(古茂山) 침례교회’를 말한다. 당시 함경북도 부령군(富寧郡) 서상면 무릉리에 있었으며 부령군은 회령의 남쪽, 청진의 북쪽, 무산의 동쪽에 있는 군이며 ‘고무산’이라는 명칭은 ‘옛날에 무산이 있던 지역’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분단 이후 6.25전쟁을 치룬 후 현재까지 라선시 지역에는 평양처럼 북 당국과 조그련에서 공식적으로 세운 교회당은 존재하지 않으며 남한교회나 서방세계에서 세운 교회당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크리스 김처럼 라선시에 주재하는 해외동포 사역자들에 의해 합법적으로 드려지는 교회 공동체는 여러 개가 존재하고 있다.

왜 경제특구가 되었나?
     
라선시의 기독교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제특구 지역으로서의 라선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특구는 경제개발특구와 관광특구로 나눠지며 모두 13곳이다. 먼저 ‘경제특구’는 신의주, 황금평(위화도), 평성, 남포, 강령, 해주, 개성, 온성, 라선 등 9곳이며 ‘관광특구’는 백두산, 칠보산, 원산, 금강산 등 4곳이다. 특히 라선 경제특구는 전체 특구 중에서 가장 먼저 지정된 곳이다.
      
그리고 라선특구에 이어 2002년 9월 12일에는 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전격적으로 ‘신의주 특별행정구’가 발표되면서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라진선봉지역의 경우처럼 일시적으로나마 남한에서는 대북투자 열풍과 대북선교 열풍이 불기도 했다. 그러나 신의주 특구장관으로 임명된 중국의 양빈 회장의 구속으로 모든 특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후 개성공업 특구와 금강산 관광특구 등이 연이어 지정되면서 이 네 곳은 북한의 대표적인 4대 특구로 인식되었다.
       
4대 특구는 북 당국에 의해 북한 영토 전체를 동서남북의 구도 하에 설정한 지역으로서 북 전체의 경제성장을 유도해 나가는 동시에 외국인의 투자사업을 계기로 세계경제와의 조화와 대외 교류를 확대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주 특구는 특구장관 구속이후 현재까지 시작조차 못하고 중단된 상태이며 금강산관광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 개성공단은 박근혜 정부 하에서 폐쇄 조치를 당해 남측과의 직접 교류는 중단된 상태에 있으나 라진선봉지역 만큼은 유일하게 남측이나 해외동포 기업과 종교단체와의 교류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 최초로 선포된 라진선봉 자유경제 무역지대는 최고인민회의를 통한 김일성 주석의 최종 재가에 의해 1991년 12월에 전격 발표되었다. 이는 현재 북한에 매장된 원유 매장량이 세계 12위권 안에 드는데 그중에서 라진선봉의 육지와 인근 해역에 엄청난 원유가 매장되어 있기 때문에 원유를 채굴하거나 정제하는 산업시설이 필요했으며 또한 원유로 제품을 만드는 각종 공장과 기업들의 설립등이 필요했기 때문에 자유무역지대로 선포된 것이다.
     
이에 따른 외국의 투자가들과 각종 기업들의 입주를 위한 인프라구축을 위해 특구지정이 불가피했으며 추후에는 자유무역지대의 목적과 취지가 더 광범위해져 중국의 홍콩 특구의 의미로 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마침 자유경제무역지대로 지정될 무렵에는 구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의 해체사태 발생했고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추진하는 두만강지구 개발계획 등이 경제특구로 지정되는데 간접적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 결과 남측과 해외동포들의 대북투자열풍과 대북선교열풍이 거세게 불었던 것이다.

▲ 고기잡이 선박 서너 척이 라진만 앞바다에서 여유롭게 고기를 잡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푸른 동해 바다와 맞닿은 라진항 바닷가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라진항 바닷가에 정착돼 있는 인공기가 부착된 어선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라진선봉지역에 교회를 설립하려다 실패한 사례들
    
라진선봉지역이 경제특구로 지정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국내외 수많은 기독교 교회와 단체가 다양한 대북지원사업에 앞장서 왔다. 특히 이들은 다양한 방법의 선교적 지원사업을 하면서 자연스레 교회당을 건축하려는 시도를 해왔으나 20년이 넘도록 아직까지 한 번도 성사된 적은 없다. 그 이유는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교회당만을 세우려 했기 때문이다. 1991년 12월에 자유무역구로 지정된 후 95년부터 본격적으로 외국투자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라진선봉 국제투자설명회의가 열린 다음부터는 외국의 투자가 전례 없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특히 남한의 교회들과 기업들도 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남측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기관들이 라진선봉에 교회당을 건축하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아 부었으나 종국에 가서는 모두 결렬되거나 실패했다.
     
1991년 9월 서울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가 대북지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방북을 시작하며 물꼬를 트기 시작했고 그 후 95년과 97년에도 평양을 방문해 라진선봉지역에 과학기술대(과기대) 건립문제를 논의한 그는 종교인중 가장 먼저 방북했다. 곽 목사는 대북지원 부문에서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보다 앞서 북한에 소 떼를 전달했는데 당시 곽 목사가 담임을 맡고 있는 소망교회를 다니던 정몽준 전 의원이 이런 곽 목사의 모습을 보고 부친 정주영 회장에게 건의해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도 소떼 방북이라는 세기적인 이벤트로 국내외에 큰 이슈를 불러일으키며 경색된 남북관계 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곽 목사는 수백억 원대 프로젝트인 평양 과학기술대 건립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아 연변과 평양에 과학기술대를 건립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으나 현재 라선시 과기대 설립은 유보되었다.
    
1992년 1월에는 분단 후 최초로 남한 개신교계를 대표한 지도자의 방북이 성사됐다. 당시 남측의 권호경 KNCC(한국교회협의회) 총무가 북측의 고기준 조선기독교도연맹(조기련) 서기장의 초청으로 방북해 김일성 주석도 면담하고 조기련 위원장 등 핵심 관계자들과 회담을 갖기도 했고 서울에서 열리는 KNCC총회에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등 역사적인 방북을 했다.
    
이 당시부터 지금까지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미주지역과 유럽지역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한인교회들과 기독교단체들이 라선시에 유치원, 고아원, 양로원, 병원 등을 설립했으며 식량지원과 의료지원사업을 해왔다. 또한 각종 농업기술지원과 농업자재지원, 소, 돼지, 염소 등의 가축 농장 운영과 지원 등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지원단체는 한민족복지재단과 만나미션, 기윤실 등이며 두레공동체의 지원사업도 돋보였다. 그밖에도 이름 없이 은밀하게 라진선봉을 후원하는 보건, 복지, 식량, 의료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는 한국교회와 해외한인 기독교 단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교회건축과는 별도로 이들 대북지원단체들은 지금도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다.

▲ 라진항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이름 모를 작은 섬. [사진제공 - 최재영]

 

▲ 항만에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석탄을 운반하기 위해 최신식 대형 중장비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항만에 쌓인 석탄을 운반하기 위해 대형 포크레인이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1. 최초의 라선시 교회당 건축 계약자는 신원그룹
    
분단 이후 가장 먼저 북 라진선봉 경제특구에 교회당 설립을 타진하고 계약한 곳은 교회가 아닌 기업이었다. 1995년 1월 당시 크리스찬 기업이면서 남측의 종합의류회사였던 신원그룹이 국내 최초로 라진선봉지역에 교회당 설립 투자를 위해 박성철 회장이 직접 북한의 김정우 대외협력추진위원회위원장과 만나 합의를 통해 성사시켰다. 이 교회당은 라진선봉 지역에 거주하는 현지 인민들을 위한 교회가 아닌 그곳에 상주하는 외국인들을 위한 용도였으며 설계상으로 4백 50석 규모로 건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약 성사 후 2-3개월 안에 곧 착공될 예정이었으나 여러 가지 제약과 장애 요인 등으로 결렬되고 결국 훗날 라진선봉이 아닌 개성공단에서 교회당을 건축하기로 합의되었다.
     
당시 대한기독교성결교(기성) 교단에 소속된 신길교회 장로로 재직 중이던 박 회장은 그 직전에도 방북 시 성경과 찬송 30권을 평양 봉수교회에 전달하기도 하는 등 남북교회 교류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당시 교회건축이 성사되었다면 평양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에 이어 북에서 세 번째 세워지는 민간교회 기록을 세울 뻔 했으나 결국 라진선봉 지역에 건축하려는 계획은 무산되고 그 이후 경기도 개성공단 내에 교회당이 건축되어 그동안 활발하게 운영되어 오던 중 박근혜 정부 하에서의 개성공단 폐쇄조치로 교회당 운영도 중단된 상태에 있다.

2. 한국교회 리더였던 ‘강남 4인방 목사’들의 교회당 건축 시도
    
1995년 5월 3일에는 신원그룹 박성철 장로의 뒤를 이어 통일원(통일부의 전신)의 승인을 받은 가톨릭 신부들과 개신교 목사들 8명이 라진선봉지역의 교회당 건축과 의료지원 등의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방북했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북한 핵 문제의 유엔안보리 회부 등 남북간 극단적인 긴장관계가 조성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과는 달리 각종 민간교류를 단계적으로 활성화해 나가는 차원에서 기독교 성직자들의 방북을 지원한 것이다. 북측이 제네바에서 합의한 핵 협상 불이행으로 국제적 대북제재와 남북관계가 긴장상태에 빠지려는 움직임 속에서도 경제교류는 물론 사회, 문화, 종교 교류는 단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하던 시국이었다.
      
이들 8명은 북 대외경제협력추진위 김정우 위원장 명의의 초청장을 받고 5월 15일-6월 20일까지 1주일간 방북했는데 당시 개신교의 홍정길 목사(남서울 교회), 이동원 목사(지구촌 교회), 옥한흠 목사(사랑의 교회), 하용조 목사(온누리 교회)등 개신교의 핵심리더들인 이들은 이른바 ‘강남 4인방 목사’ 혹은 ‘복음주의 4인방 목사’로 별칭되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개신교를 대표해 라진선봉에 교회당을 세우는 방안을 협상하고자 중국을 경유해 방북을 했다. 한편 이들은 라진선봉교회를 설립하는 문제 외에도 조선 최초의 교회로 기록되는 황해도 소래교회의 유적지 복원문제도 협의하려는 목적이 있었으나 준비 미흡과 북한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결국 모두 결렬되고 말았다. 그후 4인방 목사 중에서 홍 목사만이 ‘남북나눔운동’을 비롯해 활발한 대북지원을 하고 있다.
      
한편 개신교의 ‘강남 4인방 목사’들과 함께 방북한 가톨릭 사제들은 당시 김상진 신부(성베네딕도 수도원), 김영환(대구카톨릭대 의학부 총장), 김석좌(예수의 작은마을 원장), 안경렬 신부(반포 천주교회)였다. 천주교 측은 라진선봉지역에 2백 병상 규모의 가톨릭교회 병원건립 등 의료선교 문제를 협의했으며 북측과의 협상은 급진전되어 2년 후인 1997년 4월 안동교구장 두봉주교 등 가톨릭교회 성직자 9명이 참석한 가운데 병원기공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공사를 시작한지 8년만인 2005년 8월 5일에 준공식을 했던 것이다. 남측 가톨릭교회의 이름으로 북측 영토 라선시에 건설된 의료시설로서는 분단 이후 처음이며 운영은 베네딕도수도회가 맡았다. 수도회 측은 북측과의 계약을 통해 외국인 의사를 파견할 수 있다는 조항을 명시함으로써 나중에 남측 의사가 방북해 진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북 당국에서는 ‘라선시인민병원’으로 부르는 ‘라선국제가톨릭병원’은 현재 대지 5천여 평에 지상 3층, 연건평 1천 530여 평, 100병상 규모의 기초적 종합병원을 운영 중에 있다.     

3. 한국교회협의회(KNCC)의 교회당 건축 시도
     
1997년 3월에는 뉴욕에서 남북미 3국간의 교회협의회에서 남북의 교회 대표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개최했고 이어 6월에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독일교회의 날’ 행사에서 남북의 기독교 대표 양측이 다시 만나면서 라진선봉의 기독교 타운 건립 제안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남북의 대표들은 우선 라진선봉에 기독교선교센터를 설립하기로 합의하였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3개월 후인 1997년 9월 23-30일까지 김동완 KNCC 총무와 김영주 KNCC 일치협력국장이 직접 방북해 강영섭 조기련 위원장과 세 차례 회담을 갖고 라진 선봉지역에 교회당 건축과 기독교 종합복지타운을 건설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김동완 총무 일행의 방북은 92년 1월 KNCC 총무였던 권오경 목사의 방북에 이어 5년 만에 이뤄진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북 영토에 교회당 설립이 가능한 지역은 자유무역지대 경제특구로 지정된 라진선봉이 유일했기 때문에 그곳에 교회당 건립을 추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측 영토에 남측교회가 주도해서 교회당을 건축하는 문제는 그리 쉽게 진척되지 않았다. 북측 조그련의 요구사항과 남측 대표단의 대북인식과 선교관의 차이로 인해 결국 교회건축 계획은 무산되었다. 

4. 예장 합동 측 교단의 교회당 건축 시도
      
1998년 9월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예장 합동) 총회에서 주도해 라진선봉에 교회당 건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교단 총회산하 ‘북한교회재건위원회(북재위)’가 ‘라진선봉시 동명동’에 있는 대지 약 2000평방미터를 50년간 임대해 교회당을 건립키로 결정하며 교단 차원의 교회당 건축이 본격화됐다. 그러나 애초에 라선시 행정경제위원회의 김수렬 위원장 측과 협상한 주체는 ‘남북사랑나누기협의회’ 사무총장 김민숙 장로였다. 김 장로는 북측과의 협상에 따라 동명동 교회당 설립과 부지사용 승인을 받았으며 9월 7일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북재위 임원회에서 합동 측 교단과 협력해 교회당 건축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김 장로는 당시 두 차례에 걸쳐 라진선봉시를 방문해 현지 유치원과 탁아소 등지에 직접 밀가루 등 식량을 전달하면서 라진선봉 행정경제위원회와 친분을 맺어 오던 중 98년 8월 12일 교회당 설립 승인서를 발급받고 대지 임대계약도 맺게 된 것이다. 라진선봉시 측과 맺은 대지 임대계약은 전체 3000평방미터이며 이중에서 1000평방미터는 공장을 건립하고 나머지 2000평방미터는 교회당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또 대지 1평방미터 당 임대료는 25불로 모두 합하며 총 7만 5000불이 소요되는 금액이었다. 공장부지 1000평은 통합 측의 어느 장로가 임대해서 고추장 공장 용도로 사용하기로 했다. 북재위는 북측에 계약금 2만 달러를 지불하고 9월 10일 나머지 중도금 2만 달러를 라진선봉 행정경제위원회 연길 대표부를 방문해 지급할 예정이었으며 나머지 최종 잔금은 교회건축 현장을 방문해 직접 전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교회부지 임대비 5만 달러는 총회 남북통일기금 등의 지원을 받아 자체 충당할 수 있었지만 추후 교회당 건축 비용은 교단산하 각 교회들이 건축비를 투자하는 방식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그러나 김민숙 장로와 북측과 사이에 이뤄진 임대 계약은 당사자들의 서명만으로 이루어지는 등 계약상의 미흡한 부분이 발견되었고 건축에 따른 재정적인 문제도 봉착하면서 건축계획은 전체적으로 난항을 겪게 되었다. 나선시와 직접 협상을 했던 김 장로는 북측에서 요구한 “교회건물만 단독으로 들어서는 것을 허가해 줄 수 없으나 십자가는 세울 수 있도록 하겠다”는 조건부 수락을 완전 승인된 것으로 오해하는 등 현실적인 문제들이 노출되었다. 결국 총회 북재위 측의 재정적인 문제와 북측의 여러 가지 제한적인 조건 제시로 인해 교회당 건축 계획은 무산되었다. 

5.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교회건축 시도
   
그 후 새천년 밀레니엄을 한 달 앞 둔 1999년 12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산하 ‘북한교회재건위원회(북재위)’에서는 2천년대의 첫 사업으로 라선시에 교회당을 건축하기로 전격 발표를 했다. 북재위 위원장 박태희 목사는 3기 활동 목표를 밝히면서 2천년도 첫 사업으로 라진선봉지역에 교회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발표했는데 그는 이에 앞서 98년 7월 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임기 중에 라진선봉에 교회당을 건립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다. 99년 11월에는 라진선봉 연길 대표부 리형철 대표를 만나 라선시 교회부지와 건축비 등을 5만 달러에 계약까지 하고 귀국했다.
   
그러나 북측은 교회재건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선 4만 달러를 지급하고 나머지 1만 달러는 북 현장에 들어가 지급하기로 하는 등 북재위 지도부는 북측 영토에 교회당을 건축하는 사업에 사활을 거는 듯 했다. 원래 북 당국은 고추공장과 메리야스, 양말 등을 생산하는 공장을 지어줄 것을 요청해 이를 수용하면서 교회당 건축 이야기가 시작된 것인데 북측의 사정을 무시하고 교회당 건축 일념으로 너무 앞서간 것이다. 결국 라선시에 건축하려던 한기총의 교회당 건축 숙원사업은 남측 교회들의 비협조와 한기총 지도부들의 북에 대한 이해부족 등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에도 북한에 교회를 재건하겠다는 한기총의 정책은 많은 우려를 낳았으며 남한 교회가 갖고 있는 교단과 교파 경쟁 그리고 개교회 중심의 이기적인 성장주의와 그에 따른 성공주의의 산물들을 라진선봉에 그대로 이식시킨다는 것은 차라리 교회가 없는 편이 낫다는 비판여론이 있었다. 북한의 입장은 전혀 고려치 않는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선교방식을 고수한 한기총의 교회건축 염원은 결국 물거품이 되었다.

북측은 라선시에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은 부담스럽게 여긴다
    
필자는 교회건축 시도가 연이어 실패한 사례들을 위와 같이 살펴보면서 라진선봉을 마치 사냥꾼의 먹이감처럼 여기고 점령군 같은 선교방식을 자행하는 한국교회와 해외한인교회들의 잘못된 선교관을 바꾸지 않으면 라선시에는 영원히 교회당이 세워지지 못할 것이며 선교 사역자들의 체포와 억류사태는 계속될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한국교회는 선교 100년이 되기 훨씬 전부터 어느새 ‘예수와 성공’을 함께 품고 달려가기 시작했고 민족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개인의 성공을 위한 종교로 전락했으며 우리는 지금 그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해방 전부터 우리나라의 교회는 ‘예수와 민족’을 품었으며 모두가 존경하는 민족 지도자들은 교회를 통해 배출되었으나 현 시대는 역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예수와 통일’ 이라는 봉사와 섬김의 정신으로 다시 민족 앞에 서서 북한을 올바로 이해하고 자주적인 민족정신으로 돌아가 통일지향적인 목회와 선교를 지향해야 통일은 앞당겨질 것이다. 우리민족의 통일은 그 자체가 북한선교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통해 북한 주민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회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선교적 과제로 인식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한국교회와 해외한인교회들은 일방적으로 들이대는 근본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 북한선교만을 고집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기독교윤리실천운동(LA기윤실)에서 20년 넘도록 실무 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유용석 장로는 그동안 대북지원사업을 위해 수십 차례 나선시를 방문한 전문적인 대북사역자이다. 그동안 북 당국은 LA기윤실을 통해 벌인 프로젝트들이 기독교 단체에 의한 사업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묵인해준 것은 기윤실 사역자들이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평소 경건과 절제 그리고 타인에 대한 온유함과 배려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온 유 장로는 대북선교를 하는 교회나 단체들의 잘못된 방식들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

“북은 기독교를 아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여러 방면에서 자신들을 돕고 있기 때문에 받아주고 있는 것이지요. 라선시에서 선교적인 봉사를 하는 사역자들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부분은 절대 이념적이거나 정치적 발언을 해선 안 됩니다. 또한 그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노골적이든 은밀하게든 접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라진선봉의 거리나 건물 등 어디서든지 전도하는 모습이 발견되면 시시각각 모두 다  상부에 보고가 되며 이로 인해 해당 사역자는 위험에 처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전도를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유 장로의 염려처럼 현재 거의 대부분의 북한 지원사역자들은 선교적인 목적 하에 봉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때가 되거나 기회를 엿보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과 전도행위, 예배행위들을 시도하려고 한다. 그리고 발각되면 경고조치를 당하기도 하며 여러 차례의 경고를 무시 할 경우에는 체포되어 억류되거나 재판을 받고 노동 교화형 같은 실형을 언도 받는다. 한국교회와 해외한인교회들은 지금까지 북한이 가장 싫어하는 점령군식 혹은 제국주의식 선교방법을 가장 최선의 방법인양 밀어 붙이고 있으나 실상은 오히려 북한에서의 기독교 입지를 더 좁아지게 하고 말았다. (계속)
        

▲ 신원그룹 박성철 회장(신길성결교회 장로)이 한국교회 최초로 라진선봉 교회건축 계약을 성사시켰으나 결렬되고 말았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복음주의 4인방’ 혹은 ‘강남 4인방 목사’ 등으로 불린 한국교회 리더들이 1995년 5월 방북해 라진선봉의 교회건축을 타진했으나 결렬됐다. 좌측부터 하용조, 옥한흠, 이동원, 홍정길 목사가 당시 승합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1997년 9월, 당시 KNCC 김동완 총무와 김영주 국장이 라진선봉 교회건축을 타진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라선시 동명동’에 교회건축을 승인을 받은 김민숙 장로의 모습. 그는 합동 측 교단과  협력해 라진선봉에 교회당 건축을 추진했으나 결렬되고 말았다. [사진제공 - 최재영]

 

▲ 1999년 11월 한기총 산하 북한교회재건위원장 박태희 목사가 라진선봉교회 건축을 타결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미주 기윤실 책임자인 유용석 장로. 그는 20년간 봉사하면서 라진선봉지역의 대북지원사업을 해왔으며 그가 목격한 무분별한 선교방식을 지향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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