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의지란 단연코 환상이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고와 의도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도 없는 배경 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 우리는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상당히 도발적인 주장이다. 사실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논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 자유 의지의 존재 인정을 기반으로 흉악한 범죄에 대한 처벌이 정당화되기도 한다. 즉 ‘너는 그렇게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또 다른 가능성도 있었는데, 결국 너의 의지로 그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살인마들이 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은 물론이고, 매일 매일 쏟아지는 흉악범들이 스스로 ‘그럴 의도가 없었다’ ‘고의가 아니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단순히 그들의 구차한 변명?

여기에 또 하나, 범죄자들이 어릴 때 학대를 받았거나, 혹은 뇌에 종양 따위가 있어 정상적인 뇌 기능이 힘들었다면? 이것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것도 그 사람의 자유 의지로 봐야 할까?

워낙 개념 없고 무분별하고, 민족적 자긍심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농담을 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분들 계시겠다) ‘미드(미국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이다. 사실, 나의 백수 시절을 따뜻하게 위로해 준 것은 독서와 함께, 바로 미드 감상이었다. 특히나 범죄 수사물.

그 중 ‘크리미널 마인드’라는 미드가 있다. 말 그대로 범죄자의 심리 상태를 분석해, 결국 그들을 잡아내는 내용이다. FBI에 소속된 이들은 범죄 현장이나 범죄 수법 등을 토대로 범죄자를 프로파일링한다. 즉 그들을 ‘어떤 종류’의 범죄자로 분류하고 정의내리는 것이다.

즐겨보는 드라마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볼 때마다, 이건 좀 ‘어거지’라고 느낄 때가 많다. 몇 건의 사건만을 토대로 범죄자의 연령, 인종, 성별, 성격, 직업까지 추측한다. 아니, 거의 단정짓는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거의 다 들어맞는다.

물론 통계자료나 여러 가지 근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러한 통계자료만으로 새롭게 발생하는 범죄를 ‘정형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기존의 수많은 범죄 유형 중 한 가지를 따랐다면, 범인 역시 그 유형에 맞는 사람이라고 100% 단정 지을 수 있을까?

▲ 샘 해리스, 『자유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시공사, 2013. 2.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저자는 널리 알려진 자유 의지의 관념이 다음 두 가지 가정에 근거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우리 모두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것과 달리 행동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우리가 하는 사고와 행동의 의식적 원천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단연코 강조한다. 이 두 가정은 모두 틀렸다고.

나는 오늘 아침 커피를 마셨다. 왜? 우유를 마실 수도 있었는데, 왜 커피를 마셨을까? 커피가 더 좋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는 왜 우유를 마셨던 것일까? 알 도리가 없다. 원래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내 의식 몰래 우유를 먼저 선택하여,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의지를 꺾은 것일까? 나는 의식적으로 커피 말고 우유를 자유롭게 선택한 것일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 선택은 ‘내 뇌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그마저도 내가 조사를 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설사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내안의 내’가 눈치 채기 전에 우유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해도 그것은 나의 치밀한 의지의 결과가 아닌, 무의식적 요인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게 만약 내 의지의 산물이었다면 왜 하필 어제가 아닌 오늘이었을까? 왜 나중에는 이런 충동이 생기지 않을까? 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알 도리가 없다.

저자는 우리의 뇌가 매 순간 처리하는 정보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과학적 실험의 결과들을 근거로 제시한다. 뇌파검사나 자기공명영상장치를 통해 확인한 결과, 우리 스스로 내린 결정을 인식하기도 전에 뇌의 운동피질이 활동하고 있고, 인간의 뇌가 우리가 무엇을 할지 이미 결정해 놓았음이 밝혀졌다. 실험에 의하면 우리의 행동 중 80% 정도를 이미 타인이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자유 의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만약 자유 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도덕적이나 법률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처벌할 근거가 사라지는 것일까? “우리의 의식적인 정신의 ‘무의식적인’ 기원을 놓고 볼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이 선택에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저자는 인간을 자연 현상으로 바라본다고 해서 형법제도가 훼손될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유 의지의 존재를 억지로 인정해야만 사회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즉 자유 의지의 부정이 도덕을 약화시키거나, 사회 정치적 자유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죄를 저지를 이를 사회에 위험한 자로 여기기 위해 굳이 자유 의지라는 개념을 ‘반길’ 이유는 전혀 없다고 말한다.

얇은 분량의 책이 전해주는 무거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유 의지의 부정은 곧 인간의 주체성과 영혼, 나아가 이성에 대한 부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결국 저자의 주장에 상당한 타당성이 존재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내일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아니 당장 이렇게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거나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키보드를 통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있지만, 내가 키보드를 지금 당장 두드리고 싶다는 마음을 내 의지대로 ‘바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행위 외에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것을 할 자유도 없다. 나는 나의 행동의 의도 자체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내가 무엇을 의도하는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을 할 자유가 있는지 묻는다. 당연히 우리는 그런 자유가 없다.

우리의 뇌 속에서 ‘생각’이란, 우리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그냥 발생하지만, 결국 우리 행동의 주인이 된다. 물론 의식적으로 우리가 생각을 하고 행동에 옮긴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 이후의 다음 선택은 ‘선행 원인’이라는 암흑 속에서 출현하게 되고, 그 원인들은 우리 경험의 의식적 목격자로서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즉 우리의 선택은 앞선 사건들의 산물이며, 그 사건들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아, 어렵도다~!

이 얇은 책 한 권으로 감히(!) 자유 의지 논쟁에 결론을 지어버린 저자. 물론 이에 이견을 제기하는 측에서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나 역시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 책을 통해 느낀 점. 통계와 기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잡다한 것들로 한 인간의 행동이나 심리를 함부로 정의내리거나 판단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아직 우리 스스로도 모르는 그 무엇(!)이 너무도 깊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달랑 이 한 가지만 느꼈어도, 나에겐 큰 수확이다. 관련된 도서나 글들을 더 찾아봐야겠다는 강렬한 ‘자유 의지(!)’를 느낀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나의 의지가 맞는 것일까?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