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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과 대화하는 생이 아주 기쁘다” 중국 대련 소재 고려박물관 황희면 관장
이계환/이승현 기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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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12  15:5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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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련(大連, 다롄)에서만 25년간 살면서 우리 민족의 유물을 수집해 현지에서 어엿이 박물관을 낸 한국인이 있다. 대련에서 해운업과 한국어학원을 운영하다 고려박물관을 건립한 황희면(黃熙冕, 67) 관장.

유물에 문외한이었던 그가 박물관을 건립하게 된 동기는 호기심에서 시작해 사명감으로 수집한 3천여 점의 유물을 살리기 위한 일념 때문이었다. 박물관을 건립한 그는 후반생 인생을 우리 유물과 함께 지내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이 박물관 건립이라는 문을 열었으니 이제 젊은 사람들이 우리 문화유물 경영에 함께 참여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박물관과 집에서 유물 속에 파묻혀 살면서 “유물과 대화를 한다”면서, 이제 우리 민족의 유물이 한류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유물 예찬론자이기도 하다. 아울러, 그는 현재 꽉 막힌 남북관계에 대해 당연히 대화와 개선을 바란다면서 “유물 속에 민족문제의 답이 있다”는 조언을 잊지 않았다.

황 관장과의 인터뷰는 8월 5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이계환 기자가 인터뷰에 나섰으며, 이승현 기자가 사진과 녹취를 정리했다. / 편집자 주

 

“대련 시장을 걷다가 조선시대 유물이 한눈에 들어와 본능적으로 수집했다”

   
▲ 우리 민족의 유물을 수집, 전시한 고려박물관 황희면 관장과의 인터뷰는 8월 5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이계환: 관장님께서는 중국 대련(大連, 다롄)에서 우리 민족의 유물을 전시한 고려박물관을 건립,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먼저 독자들을 위해 자신에 대해 소개해 달라.

■ 황희면: 나는 학번으로는 69학번이고 대학을 1977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선박회사 해운 대리점에 입사했으니 해운업을 시작한 거다. 이때 미국 배를 이용하다보니 세계의 항구에 들어가고 나오는 게 자유로웠다. 나름대로 각 지역 항구사정도 알고 그랬다. 이때부터 중국 사정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우리가 갈 곳은 중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한참 미국을 기회의 땅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1970~80년대에 미국엘 갔다. 나는 앞으로는 미국이 아닌 중국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는 중국이 개혁.개방 되기 전이었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중국이 큰 시장일 것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미국 잡지 등을 통해서 가끔 나오는 중국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해운업 하는 친구들이 그런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내가 선박회사를 나와 직접 해운회사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더욱 굳혔다. 우리와 수교만 되면 직접 중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가 1992년 8월 한.중 수교가 정식 승인된 후 마음먹었던 것을 실현하겠다는 생각으로 홍콩을 통해서 중국에 들어갔다.

해운업을 했던 경험으로 중국의 가장 좋은 항구가 어디냐를 생각한 끝에 대련항을 찾았다. 수심도 깊고 북쪽으로는 물류 창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련을 타깃으로 하고 중국을 처음 가니까 이왕 가는 김에 이리 저리 둘러가자는 생각에 홍콩에서 비자를 받아서 광쩌우, 상하이를 거쳐 대련에 처음 발을 디뎠다.

□ 그때까지는 박물관이 아니라 해운업이 관심사였다.

■ 그렇다. 당시에는 사업으로 중국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대련에 도착해서 보니까 그때는 딱 부산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침 처음 묵었던 호텔도 부둣가에 있어서 마치 중앙동에서 보는 부산 앞바다라는 느낌이어서 전혀 낯설지도 않고 내가 생각했던 것과 딱 맞구나 하는 생각에 그렇게 결정을 했다. 마음을 굳히고 바로 실행을 한 것인데, 근데 사실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어려운 일이 많았다.

1992~93년만 해도 지금과 같은 대련은 아니었고 우리가 볼 때는 모든 면에서 상당히 낙후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러 파란만장한 일을 겪었고 해운업을 하는데 그것도 만만치가 않았다.

□ 중국에서 해운업으로 시작했는데 지금 하는 일은 박물관이다. 그렇게 바뀌게 된 동기나 계기는?

■ 주말에는 무료하기도 해서 대련 시내를 활보하다 보니까 대련의 주말에 길거리에서 열리는 시장도 가보고 했는데, 그런 곳에서 가까운 조선시대 우리 유물들이 한눈에 띠는 게 많아서 본능적으로 수집을 했다. 우리 것이 보이니까 당연히 돈을 내고 샀다. 기쁜 마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했다. 그런 식으로 시작을 해서 나중에는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다가 여러 가지 기회가 있어서 호기심이 생겼다.

당시 사업도 심도 있게 펴 나갔는데, 우리 유물을 보았기 때문에 출장을 가도 우리 유물이 있는지를 찾아보게 되고 그러다가 급속도로 유물을 많이 수집하게 됐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수집을 하면서도 내가 전공은 아니니까 한국의 학자들도 있고 해서 그분들과 연락을 해서 이런 유물이 있더라는 연락을 해주면 끝날 줄 알았는데... 한국에 와서 수소문 끝에 이름 있는 학자들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분들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 다른 반응이라면?

■ 학자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거기(중국)에 그런 게(우리 유물) 있을 수가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다시 중국에 돌아와서 여러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중국 사람들은 이게 다 너희들(한국) 유물이라고 하는데 한국 전문가들은 그렇게 반갑게 생각하질 않고 배척하는 듯한 말을 하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 그러면서 나는 유물에 대해서 더 깊이 관심을 갖게 됐다. 

□ 원래 유물 전문가는 아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유물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공부도 하고 물어도 보고 하면서 독학한 경우였겠다.

■ 그렇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중국 현지에서 나온 유물들을 보면서 중국 전문가들은 쩔쩔매면서 이건 너네 유물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반응이 아니라서 갈등을 많이 느꼈다. 그러다가 생각한 게 이건 아니다. 내가 더 연구를 해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방향을 좀 바꿨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내가 박물관을 해야 우리 유물이 살아날 수 있겠다’

   
▲ 중국 대련 소재 고려박물관 전경. [통일뉴스 자료사진]

□ 그게 박물관 건립인가?

■ 그렇다.

□ 그 시점이 대략 언제쯤인가?

■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쯤인 2000년 넘어서 박물관 건립 준비를 시작했다. 그때는 대련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외국어학원을 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많이 남기도 해서 나름 본격적으로 중국 책도 보면서 우리 역사도 다시 보고, 한국의 재야 사학자들의 연구 그룹도 만나게 되면서 서로 교류하게 되었다. 이들은 중국의 사서를 통해서 나름의 연구를 한 것이다. 그래서 재야 사학자들은 중국 대륙에서 출토한 유물을 갖고 있는 나와는 이야기가 잘 되었다. 사서로 본 지역에서 유물이 났다고 하니까 이야기가 잘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역사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유물이니까, 일단은 수집을 하자고 결심하고 강도를 높여서 본격적으로 수집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박물관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물들을 한국으로 가져갈 수도 없는 일이고 사고파는 일도 아니니까.

‘내가 박물관을 해야 우리 유물이 살아날 수 있겠다’는 마음은 먹었지만, 한국에 와서 친구들과 박물관 건립에 대해 이야길 해도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중국에서 박물관을 짓겠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어쨌든 목표는 그렇게 세웠다. 그런데 사실은 나 자신도 박물관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도 몰랐고 계획도 없었다. 일단 우리 유물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박물관이 필요하다는 일념으로 쭉 밀고 나간 것 같다.

□ 박물관을 건립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는데, 명칭을 고려박물관이라고 지은 이유는? 고구려박물관, 한민족박물관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 텐데...

■ 중국 사람들은 고구려, 고려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꺼리’라고 한다. ‘꺼리’는 중국 사람들이 우리 민족, 동이족을 일컫는 대명사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코리아’는 고려에서 나온 것이라 지금 중국에서도 쓰는 것이고 ‘꺼리’라고 하면 한반도 우리 민족을 통칭해서 그렇게 쓴다. 그런 점에서 중국에 있으면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단어가 ‘꺼리’이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고려박물관’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또 하나 ‘고구려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지금 중국에서 가장 민감해 하는 것이 고구려 문제인데,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중국정부에서 민감해 하는 문제를 굳이 꺼내서 이익 될 것이 하나도 없다. 어차피 중국에서 박물관을 하는데 중국에서 민감해 하는 고구려를 명칭에 집어넣을 건 없다. 그래서 고려를 넣은 것이다.

□ 중국에서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은 허가사항인가?

■ 외국인인 한국 사람이 중국에서 박물관을 낼 수는 없다. 나중에 알았지만 돈으로 되는 일도 아니었다. 계속 밀고 나가다 보니까 방법이 나왔다. 현재 고려박물관은 중국 국가박물관으로 허가받은 영성자박물관(간판은 영성자민속박물관으로 되어 있음)의 위탁 운영 사업자로 지정받아 세를 내는 조건으로 들어가 경영을 하면서, 문화부 소속의 영성자박물관으로부터 ‘고려 특정관’의 허가를 받아 운영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중국에는 56개 소수민족이 존재하는데 지금은 조선족에 해당하는 고려박물관을 운영하고 나아가 몽골 등 소수민족 박물관으로 확대하겠다는 신청을 내어서 대련시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것이다.

□ 그래도 결국엔 우리 민족의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니 중국 당국의 제지 등이 있었을 것 같다.

■ 사실 많이 걱정을 했다. 내가 외국인이니까. 외국인은 박물관을 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중국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별 문제없이 운영을 했다. 관장인 나에 대해서 조사를 많이 했다. 대련에서만 25년 살고 있고 대련 한인회장을 했고 학원을 15년 했다. 문화인이고 장사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평가가 있다고 본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앞으로 미래는 동방이고 중국과 한국은 함께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 왔다.

□ 중국은 동북공정을 진행했다. 고려박물관 설립 과정에서 마찰을 빚었을 것 같다.

■ 굳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내가 그럴 위치에 있지 않다. 동북공정도 감정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중국민들을 자극시키는 것은 이익 될 것이 없다고 본다. 특히 재야 사학자들의 반발이 심한데 중국은 중국의 입장이 있으니까.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하면 된다. 관점의 차이가 있으니까, 우리는 우리의 관점과 작업을 키워서 어느 시점에 서로 만나서 이야기하면 될 일이라고 본다.

“유물과 대화하는 생이 아주 기쁘다”

□ 고려박물관의 정확한 위치, 개관시기를 소개해 달라.

■ 2011년 5월 개관했다. 만 5년 조금 넘은 셈이다. 주소는 중국 요녕성 대련시 감정자구. 부근에 1400년 된 은행나무로 유명한 영흥사라는 절터가 있다.

   
▲ 고려박물관 내부에 유물을 전시한 모습. [통일뉴스 자료사진]

□ 고려박물관 내 유물 규모는?

■ 내가 수집한 유물은 3,000점정도 된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1,000점정도. 나머지는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 이제 시작한 것이고 아직 갈 길이 멀다.

□ 유물 정리나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나.

■ 자녀들이 학교 다니다가 성장하고 출가해서 한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한국과 중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혼자서 하고 있다. 나의 후반생 인생은 우리 유물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기회를 만난 것은 일찍 중국에 갔기 때문인데, 박물관을 하면서 사실 많은 고민을 했다. 가족들도 많이 만류를 했다. 원래 박물관을 하려고 중국에 갔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부담은 없는데,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오겠느냐는 생각에 잠 못 이룬 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라면,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부딪히면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건 피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솔직히 지금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지만 한편으로 후반생 인생을 보람 있게 갈 수는 있다고 본다. 유물이 있기 때문에 외롭지는 않다. 중국집이 40여평 정도 되는데 유물로 가득 차 있다.

□ 운명이라고도 말했지만, 박물관과 집에서 늘 유물과 함께하면 대화하는 느낌도 있겠다.

■ 실제 유물과 대화를 한다. 유물과 대화하는 생이 아주 기쁘다. 수천 년 암흑 속에 침묵하고 있던 유물을 우리가 만난다는 것은 유물의 영혼을 살려내는 것이고, 그게 또 후대들이 해야 할 일이다. 유물을 보면서 나도 모르는 내 자신과 유물이 일치하는 순간을 접하면서 깜작 놀랄 때가 있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이 유물을 꼭 보호해서 후대들에게 전해주겠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진다. 제일 가슴이 뛰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현명하고 훌륭하다는 느낌을, 피를 나눈 민족이라면 자연스럽게 함께 느끼는 경험을 한 것이다.

중국 사람들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줄지어 보는데... 표정을 다 보니까... 이건 우리 것이 아니라며 선을 긋고 보는 것이 그들의 침묵에서 느껴진다. 반면 한국 사람들은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게 참 신기한 일이다. 똑 같은 연령대의 사람들이 보고 가는데, 한국사람과 중국사람의 관람태도가 다르다. 우리 민족은 피에 강하다는 생각을 다시 갖게 된다.

□ 그런 만큼 더 유물에 애착을 갖고 널리 알리고 싶은 생각이 있을 수 있겠다.

■ 우리 선조들을 못난 선조라고 매도하는 의견도 있지만 역사를 알고 모르고 간에 유물에 답이 있다고 본다. 이렇게 훌륭한 선조들이 있는데... 특히 학생들, 청소년들은 웃고 떠들더라도 박물관에서 유물을 쭉 돌아보기만 하면 우리 민족, 선조의 기를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이제 우리 유물이 한류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물관을 하게 된 동기는 반가사유상 때문

□ 고려박물관에 있는 유물에 대해 설명을 해 달라.

■ 시대별로 다 있다고 보면 된다. 홍산문화가 굉장히 중요하다. 중국이 홍산문화를 자기 역사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도 강하게 있지만 나는 문화 차원에서 그런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 지금 그런 걸 자꾸 따져서 중국과 모순되는 일이 생기는 걸 나는 원하지 않는다.

옥기가 중심인 홍산문화와 함께 고조선의 토기, 삼국의 불상, 그중에서도 반가사유상이 있다. 반가사유상은 일본 사람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 털어 지칭하는 삼국 불상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박물관을 하게 된 동기도 반가사유상을 접하면서 박물관을 꼭 여기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 명함에 있는 사진이 반가사유상이다.

   
▲ 인터뷰 도중 황 관장은 자신이 만든 <고려박물관 소개자료>의 사진을 제시하며 설명을 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자신이 만든 <고려박물관 소개자료>의 사진을 설명하면서) 한국의 국보78호 반가사유상과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1미터가 채 안 된다. 그래도 우리 문화 예술 하는 분들은 이 반가사유상을 세계에서 최고라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알았다. 그런데 고려박물관의 금동 반가사유상은 차원이 다르다. 더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다. 크기로 봐도 1미터 40센티, 1미터 80센티가 되니까. 이게 바로 우리 조상들의 기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가사유상이 고려박물관 유물의 핵심이다.

□ 삼국시대 유물이 그렇고 고려시대 유물을 설명해 달라.

■ 고려시대 유물로는 고려청자가 핵심이다. 유물에는 지금처럼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써 있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중국 등 다른 기타 유물하고는 차별화가 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고려청자 흑백상감이 핵심이다. 유약을 바르기 전에 도자기를 파내서 백토와 자토 두 색깔로 도안을 만드는 상감이라는 고려인의 기법은 세계 특허가 난 것이나 마찬가지로 지금도 아무 분쟁 없이 누구나 다 인정을 한다. 이건 참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찾아가는데 이렇게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 조선시대의 것도 있나.

■ 조선시대 것은 많다. 특히 청화백자, 순백자를 내세울 수 있다.

□ 이런 유물들을 모두 중국에서 구입한 건가.

■ 대개 중국에서 구입했다. 우리 유물들 중 고려, 조선시대 유물은 북쪽에서 많이 건너오는데 그런 것도 있다. 홍산문화나 고조선, 고구려는 대륙에 있었으니까 중국에서 구한다고 하더라도, 초기 조선의 유물과 고려청자는 중국 내륙에도 많이 있다.

그런데 왜 운명적이라고 하느냐 하면 이런 걸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돈이 있다고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물 수집하는 사람들은 마치 도박하는 사람처럼 빠져 들어야 길이 열린다. 그렇지 않으면 어렵다.

□ 관장님도 유물 수집에 도박하는 사람처럼 빠졌나?

■ 그런 편이다. 유물 수집은 중도에 포기할 수가 없다. 한 번 시작하면 사명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포기가 안 된다. 초기부터 어떻게 키울 것인지를 많이 고민했다. 한국도 아닌 중국이니까. 첫째 이건 욕심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60세도 넘었으니 사업으로 할 것도 아니고 모든 걸 정리하고 관리하는 차원에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나는 시작만 해 놓겠다.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참여해서 이어갈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이 있다. 내가 개인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고 물꼬는 터놓았으니 여러 사람이 힘을 보태서 더 커지도록 하고 젊은 학자들도 양성해서 동방문명을 더 깊이 연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고려박물관에 전시된  반가사유상. [통일뉴스 자료사진]

□ 고려박물관 유물들 중에 특히 귀한 유물이 있다면?

■ 아까 말한 반가사유상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문화재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 반가사유상에 대해 입을 못 열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감정가가 유물을 보는 데 엉터리로 보더라. 의식적으로 위축되어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잘 만들 수 없다’, ‘조금 모자라야 우리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왜 입을 못 여느냐하면 서로 밥줄이 얽히고설켜서 그런 것이다. 미술가나 조형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은 반가사유상을 보면 이렇게 잘 만들 수 없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중국 사람들도 감탄한다. 선과 미소가 우리의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강단사학에 있는 사람들과는 담을 쌓는다. 어떤 사람은 돈 들여서 그런 일 하지 말라고 하기도 하더라.

국민들이 보고 느끼고 감동을 받으면 같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청나라, 명나라의 화려한 도자기를 보고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조그만 고려청자 도자기를 보면 기가 막히게 마음이 움직인다. 똑같은 고려청자를 보고 중국사람들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래서 감정하는 유물 전문가가 우리 유물을 취급할 일이 아니고 우리 국민들이 누구나 참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 또 다른 귀한 유물들을 설명해 달라.

   
▲ 왼쪽이 고려박물관 소재 용두보당이며 오른쪽이 리움박물관에 있는 국보136호 용두보당. 황 관장은 두 용두보당에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국보136호 용두보당이, 금동인데 리움박물관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고려박물관에 있는 것과 차이가 없다. 그래서 중국에서 나왔지만 고려시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당간(幢竿)이라고 해서 절밖에 크게 세우는 기둥인데 이건 포터블이라고 할 수 있다.

금동 삼족오 촛대도 있다. 이것 보고 한국 사람들은 숨이 턱하고 막히는 느낌을 받는다. 유물이 나온 시대는 당나라이지만 만든 사람은 우리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사람들도 이론이 없다.

고려청자도 있다. 강진이나 부안에서 나는 것만 가지고 고려청자라고 이야기하는데 중국에서 고려청자가 많이 나온다. 무역도 했지만 고려는 물론 조선도 초기에는 대륙에 있다가 반도로 내려온 것이다.

   
▲ 왼쪽이 탁본한 고려박물관 소재 고구려 벽화이며 우측이 무용총.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 고구려 벽화를 봐라. 무용총에 있는 수렵도 벽화하고 닮은 것이다. 사람이 똑같지 않나. 형태나 자세, 활 쏘는 모습 등등. 말 그림의 꽁지도 그렇지 않나. 고구려 벽화라고 공인된 것이다. 수법이나 이런 게 같지 않나. 회벽을 뜬 것이어서 지금 복제할 수도 없는 진품이다.

문화가 없는 민족은 발전할 수가 없다. 위대한 조상들의 유물이 이렇게 찬란한데 이것도 밝혀내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열어 놓을 테니 젊은 사람들이 경영하라는 것이 나의 뜻이다.

“유물 속에 민족문제의 답이 있다”

□ 주요 관람객은?

■ 한국 관광객들이다. 많이 홍보하고 알려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알고 오는 분들이 있다. 코스는 좋다. 대련공항에서 여순감옥 가는 중간에 있기 때문에 들르기에 좋다. 여순감옥은 우리 현대사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이고 고대사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은 고려박물관을 필수코스로 하면 좋을 것 같다.

목표는 한국의 학생들이 수학여행 오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서 규모를 좀 키우기를 바란다. 중국과는 동방문화를 키우는데 서로 힘을 합쳐야 할 상대라고 생각한다.

   
▲ 황희면 관장이 고려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유물 설명을 하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 유물 구입에 비용이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아울러, 박물관 운영에 필요한 재정운영은 어떻게 하나.

■ 일단은 개관만 해놓자는 생각이었다. 1차 목표는 달성을 한 것 같은데 5년을 견딘 것이다. 다시 제2의 도약을 할 때가 왔는데, 아직 눈에 보이진 않지만 마음으로는 가능할 것 같다. 지금부터는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다.

□ 25년이나 중국에서 생활했는데, 최근 사드배치로 인한 중국의 한국 견제 분위기가 느껴지나. 언론에 보면 중국당국이 한류 스타들의 방송출연을 금지시키거나 상용비자 발급 기준을 강화한다는 보도가 나온다.

■ 앞으로 달라질 것이다. 중국에 있으면서 답답한 게 한국 정부가 한중관계를 잘해서 우리의 이익을 찾으면 좋겠는데, 지난 25년을 보면 중국과 관계에서 우리의 지위가 계속 낮아지고 있다. 이런 판에 사드를 배치한다고 하니, 중국입장에서 볼 때 한국은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이다. 비자나 한류 문제는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단지 그 정도 수준의 문제는 아니고 더 고강도로 나올 수 있다. 이 사드 문제만큼은 분명히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런 압박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중국이 대한민국을 대하는 태도 등에 뭔가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게 더 무서운 일이라고 본다.

□ 대화를 나누다 보니 관장님의 역사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 우리 민족에게는 소중한 역량이 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지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유물에 담겨져 있다. 그래서 우리 손자들, 후손들에게 위대한 우리 조상들의 유물들을 알려줘야 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러한 재능, 철학, 모든 것들을 우리 민족이라면 모두가 공유하고 알게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내 역사관을 굳이 표현한다면 동방민족주의라고나 할까... (웃음)

□ 우리 민족의 유물에 대한 관심이 많다보면 자연스럽게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에도 관심이 가지 않나. 남북관계나 통일문제 등에 대한 소신을 들려 달라.

■ 민족은 같은 혈육이다. 혈육의 문제를 이데올로기로 끊거나 정치적 문제로 풀 수 없다고 본다. 이념이나 정치로 민족문제를 못 푼다면 문화를 가지고 접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물은 우리 민족 공통의 문화유산이다. 유물 속에 민족문제의 답이 있다. 그리고 지금 남북관계가 꽉 막혀 있다. 당연히 남북관계 개선을 바란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남과 북이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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