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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교회를 가다㉓ 평양신학원(상)<연재> 최재영 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63회)
최재영  |  9191j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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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6.13  11: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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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59회부터는 정전협정 이후 지금까지 크게 드러나지 않으면서 신앙의 계보와 맥을 이어오고 있는 북측 가정교회(처소교회, 가정예배처소)를 다룰 것이다. 또한 북측 기독교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두 기관인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과 ‘평양신학원(평양신학교)’을 참관한 이야기들을 통해 북측 기독교의 실상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남측이나 서구식 기독교의 일방적 관점이 아니라 ‘북조선식 사회주의 교회’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한다. / 필자 주 

    

평양신학원을 가다
    
필자가 방문한 평양신학원은 평양시를 관통하는 대동강 북서쪽 봉수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신학원을 가려면 칠골교회 인근 광복거리에서 보통강 지류를 따라 1.5㎞를 올라가면 봉수산 기슭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한 조그련 본부와 봉수교회당이 위치한 주차장에 도착해야 한다. 주차장 오른쪽에는 아담한 담장이 설치돼 있는데 담장 끝자락에 난 작은 출입문을 들어가면 신학원 캠퍼스가 시작된다. 동굴처럼 조경된 포도넝쿨을 통과하면 마치 비밀의 정원 같은 아름다운 동산(일명, 에덴동산)이 나오며 동산 한가운데는 각종 묘종을 심은 제1온실동이 나오며 그 동산 끝자락에 평양신학원 교사(校舍)가 나온다.
    
필자는 오경우 서기장의 안내를 받으며 캠퍼스를 향하는 도중에 몇몇 학생들과 마주 치기도 했고 신학교에 도착해서 강의실과 도서실을 비롯한 학교 시설들을 모두 둘러봤다. 평양신학원이 이곳에 신축되기 전에는 원래 조그련 본부 3층에 있었으나 2003년 9월에 신학교 건물을 이곳에 짓고 이전했다. 봉수교회당과 조그련 연맹 본부가 모두 하나의 타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보니 세 기관이 모두 유기적으로 연관을 맺고 상호 협력관계에 있었으며 매주 신학원 교육관에서는 봉수교회 성가대원들이 주일 성가연습을 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또한 이 세 기관은 북 기독교를 이끄는 가장 중추적인 핵심 기관으로서 북 기독교를 상징하는 브랜드이다.

   
▲ 현재의 평양신학원 건물.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신학원 캠퍼스 입구. 봉수교회당 우측에 조성되어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신학원 캠퍼스에서 바라본 봉수교회당 우측면.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신학원 캠퍼스 내에 조성된 제1온실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신학원 캠퍼스 내 제1온실 시설물과 비닐하우스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캠퍼스의 시설들과 이모저모
    
평양신학원은 일반대학교처럼 야외에 특별한 시설물이 조성되거나 여러 개의 부속건물들이 세워지지 않았으며 단순한 한 개 동의 건물만 서 있을 뿐이었다. 신학원 건물은 지하1층, 지상 3층으로 지어졌으며 강의실(교실), 교육관, 회의실, 독서실, 도서관, 운동실, 영접실, 교무실, 교장실, 식당 등으로 다양하게 꾸려졌다. 이 건물은 2003년 4월 6일, 기공식 예배를 드리고 2003년 9월에 완공됐다.
    
언뜻 보기에 열악한 학교처럼 보일지 몰라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재학생이 12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현재의 시설로도 충분하다. 12명의 전체 재학생들보다 많은 교수진과 강사진 그리고 철저한 학습과 성서교육 중심의 신학교육 등은 매우 바람직한 교육 시스템으로 보였다. 소수 정예요원들처럼 매우 안정적이고 든든해 보였으며 도서관에는 생각보다 다양하고 많은 서적들이 확보되었고 도서관 한쪽 코너에는 홍동근 목사를 기념하는 서가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홍 목사는 방북기간 중이던 2001년 11월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타계했으며 1급 국립묘지인 평양 신미리 애국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 후 1주기를 맞이한 2002년 11월에 홍 목사의 기독교 유품과 신학서적 2,000권이 조그련 연맹에 기증되며 이곳 신학교 도서관에 자리 잡은 것이다. 이를 위해 당시 홍 목사의 부인인 홍정자 여사(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의 누님)가 직접 평양을 방문해 남편의 평소 소원인 ‘홍동근 목사 기념 서가’를 꾸몄다.
   
또한 다른 서가의 도서들도 남측 교회들과 여러 기관에서 보내준 서적들이 많이 보였는데 남측 교회들과 기관들의 서적 보내기운동 덕택에 낯익은 많은 신학 서적들이 눈에 띄었다. 또한 강의실 벽면에는 “령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약 2:25)”라는 신약성경 구절이 붉은색 판에 황금색으로 새겨져 있어 이채로웠다. 또한 교육관 벽면에는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깊이 아는 것이 슬기이다(잠언 9:10)”라는 구약성경 구절이 쓰여 있었다.

   
▲ 평양신학원 입구 현판 아래의 필자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신학원 1층 로비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신학원 교육관 내부.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신학원 강의실 내부.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신학원 2층 복도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남북의 합의로 건축되고 운영된 평양신학원
    
평양신학원은 2003년 9월, 남측의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 통합) 남북한선교위원회 측과 기독교대한감리회 서부연회(기감 서부) 측의 지원으로 현재 위치에 6억 원 예산을 투입해 연 건축 면적 340.5평으로 건축했다. 오래 전부터 신학원 건축과 운영에 대해 예장 통합과 기감측이 큰 관심과 동참의사를 밝힌 상황이기 때문에 두 교단은 사전에 중복투자를 막기 위해 각각 역할을 분담하기로 해 약속하고 건축 관련 설계와 자재비 지원부분은 통합 측에서 하고 신학원 운영 지원비는 기감 서부 측에서 하기로 각각 합의해 성사된 것이다.
  
특히 2003년 4월 6일은 통합 측 대표단이 평양신학원 건축 기공예배에 직접 참석해 강영섭 위원장을 비롯한 조그련 관계자들과 함께 기공식 예배를 드렸으며 건축 자재 구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조그련 측에서 조달했으며 남측에서 골조용 자재까지 남포항으로 운반하며 순조롭게 공사가 진행돼 기공식 후 약 6개월이 지난 2003년 9월에 건물을 완공했다. 동시에 기감측은 평양신학원 운영을 위해 매학기 10만 달러를 지원하기 시작했으나 이명박 정부의 5.24조치로 인해 지원과 교류는 전격 중단됐다.
   
평양신학원의 신축으로 인해 전쟁 후 그동안 어렵게 신앙을 지켜오던 북의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온전한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는 계기가 되어 신자들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평양신학원 건축을 계기로 연이어 봉수교회가 신축되고 북한판 성경과 찬송가가 편찬된 것도 고무적인 일이었으며 남과 북의 교회가 서로 교류와 협력을 하는데 있어 그 역할이 매우 컸다.
   
남한의 통합 측과 조그련 측은 봉수교회 뒷편 언덕에 평양 제1온실과 평양신학원 건축을  성사시키자 이에 탄력을 받은 양측은 2005년 11월에 기존 봉수교회를 헐고 새롭게 신축하기로 합의하게 된다. 이처럼 평양신학원 건축은 북 기독교 역사에 있어 여러 가지 기념비적인 일들을 연이어 성사시키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지난 1972년 설립 이래 지금까지 평양신학원은 조용한 침묵 속에 45년 동안 ‘북조선식 기독교’ 혹은 ‘사회주의 기독교’가 뿌리내리도록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평양신학원 교수실과 교무실 앞에 선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신학원 영접실.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신학원 도서관 내부의 ‘홍동근 목사 기념 서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생전의 홍동근 목사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신학원 학생들이 여가시간을 통해 운동을 즐기도록 탁구대와 당구대가 갖춰져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봉수교회 주일성가대원들은 평양신학원 교육관에서 연습을 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신학교 입학 조건과 목사안수 과정

현재 북에서 목사가 되려면 공식적으로 조그련 연맹 본부에서 직영하는 평양신학원을 필수적으로 졸업해야 한다. 입학 조건을 살펴보면 지원자 본인이 소속한 가정교회나 처소교회 또는 자신이 소속한 조그련의 전국 조직인 도·시·군 연맹 중 한 곳의 추천서를 받아야 하며 고등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한 학력 이상이어야 한다. 신학원을 운영하는 주체는 조그련이기 때문에 연맹측이 입학 서류를 최종 심사하며 합격 여부도 연맹에서 결정한다.
   
그러나 통계적으로 보면 평양신학원 입학 지원자들 중 상당수가 현재 연맹 행정부서나 시도위원회에서 일했거나 현재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이미 기존 일반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많고 평균 연령도 최소 30세 이상이며 사회적, 사상적으로 안정된 기혼자가 대부분이다.
   
또한 지금은 폐쇄되었지만 김일성종합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한 사람이 지원하는 경우에도 정식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조그련의 추천을 받아 평양신학원을 입학해 졸업해야 한다. 평양신학원은 교단 역할을 하는 조그련 산하 신학교이기 때문에 목회자 양성과 공급을 목적으로 운영하는 반면 김일성대 종교학과는 일반적인 종교학을 아우르는 학자를 양성하거나 당의 종교정책 관리부서의 관리직 양성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평양신학원 졸업자들에게 승진, 목사안수, 사역지 배치 등 인사이동을 주관하는 부서가 겉으로 보기엔 조그련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앙당에서 담당하고 있으며 조그련 연맹은 최종적으로 중앙당 비서국의 비준대상이다.
   
전도사와 목사 그리고 전도사의 신분에서 목사의 신분으로 바뀌었을 경우 교역자에 대한 처우 문제와 복지혜택은 일괄적으로 중앙당의 공급대상이며 월급을 비롯해 배급과 부식들을 중앙당 공급소에서 제공받는다. 현재 조그련 소속 교역자는 목사 35명, 전도사 140명 정도인데 평양신학원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조그련 측에 따르면 북 전체 기독교 신자는 15,000여명을 웃돌고 있으며 가정교회가 520여개이며 봉수, 칠골교회 등 공식교회당 등이 있고 그밖에 여러 형태의 공식교회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 이에 신입생, 재학생, 졸업생들은 무조건 이 가정교회와 공식교회들 중에 한 곳에 소속돼야만 한다. 

졸업한 신학생들은 목사 안수를 받기 전까지 대개 전도사로 5년에서 8년간 가정 예배소(처소교회)에서 일하게 되며 그후 목사 안수를 받게 되면 당 간부나 대학교 교원급(교수)에 해당하는 혜택이 주어진다.

   
▲ 남측 기감 신경하 감독(좌)과 조그련 강영섭 위원장(우)이 ‘신학원 지원합의서’에 서명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신학원 원장실에서 남측 예장통합 총회장 안영로 목사와 조그련 강영섭 위원장이 합의서에 서명한 후 환담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남측 기감 신경하 감독(목사)이 평양신학원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남측 기감 서부연회 전영호 총무(목사)가 평양신학원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5년 학제와 각 기수(期數) 구분
    
1972년 3월에 설립된 평양신학원은 개교 당시 3년제 신학교로 시작했다. 그러나 이 학제는 2000년 9월 들어서 재개교를 하면서 5년제로 바뀌었다. 남측 신학교나 서구의 신학교와 비교를 하자면 3년제에서는 신학대학원 과정에 준하는 M.Div(목회학 석사학위) 과정을 수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5년제로 변경된 의미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미 기존의 일반대학 학부를 졸업한 학생들의 경우에는 M.Div 3년과 Th.M(신학 석사학위) 과정 2년 등을 모두 합해 총 5년을 이수하는 수업이다. 둘째, 고등중학교(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입학하는 학생들에게는 학부과정 Th.B(신학 학사 학위) 4년을 2년만에 수료하고 연이어 M.Div 3년 과정을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비교방법은 개략적인 이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평소 조그련에서 추구하는 학제나 커리큘럼 등은 서구신학교의 방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조그련이 직영하는 목회자 양성기관이다 보니 반드시 사상적으로 무장된 신자이어야 하며 동시에 독실한 믿음을 가진 신자로서 평소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인물 중에서 선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기독교연맹(조기련) 강량욱 위원장의 주도로 1972년 3월에 3년제로 개원한 평양신학원은 1992년까지 20년 동안 제7기 졸업생을 배출했으나 그 후 ‘고난의 행군’ 등의 어려운 사정 등으로 잠시 학사운영이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러다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남북, 북남간의 화해 협력의 기류를 타고 2000년 9월부터 다시 재개원하며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 9월부터는 3년제에서 5년제로 개편하며 다시 8기 입학생을 받기 시작했고 한 기수당 신입생은 그 전과 마찬가지로 10-12명이다. 그 후 지금까지 재학생 숫자는 항상 12명 선을 유지하고 있다. 한 기수가 5년을 공부하고 졸업을 하면 다음 기수 신입생을 새로 선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졸업 후에는 선후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만 선후배가 동시에 학교를 다니는 경우는 전무하다. 또한 9월 신학기제를 채택하고 있어 5년에 한번 돌아오는 7~8월에 입학생을 선발하고 동시에 그해 졸업생도 배출한다. 1974년 제1기 첫 졸업생을 배출 이후 8기생까지 모두 80여명 정도가 졸업을 했다.

평양신학원 기수별 연도를 보면 1기는 1972-73-74년, 2기는 1975-76-77년, 3기는 1978-79-80년, 4기는 1981-82-83년, 5기는 1984-85-86년, 6기는 1987-88-89년, 7기는 1990-91-92년, 8가는 1993-94-95년, 9기는 1996-97-98년이다. 그러나 1999년에는 입학생을 받지 않고 학교운영이 잠시 소강상태에(중단된 것은 아님) 있다가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며 화해기류를 타고 2000년 9월부터 새롭게 재개하며 5년제로 시작했다. 변경 후 첫 기수에 해당하는 제10기는 2000~2004년, 11기는 2005~2009년, 12기는 2010~2014년이며 현재 제13기가 신학수업을 받고 있으며 수업 기간 년도는 2015~2019년까지다. 

교수진과 강사진
  
평양신학원의 원장(교장)은 조그련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맡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직이라고 보면 되고 현재는 강명철 목사가 원장이다. 잘 알려진 대로 강명철 목사의 조부 강량욱 목사는 1972년과 1981년 두 차례에 걸쳐 부주석으로 선출된 영향력이 큰 인물로서 한국 전쟁 이후 이북지역에는 전무했던 신학교를 다시 개교한 주역이었다. 조그련 위원장직을 3대가 계승한 것처럼 평양신학원 원장직도 3대가 이어가고 있다. 초기 원장은 강량욱 목사, 그의 후임으로 강 목사의 차남 강영섭 목사, 또 그의 후임으로 그의 장남인 강명철 목사가 원장으로 근무 중이다.
   
평양신학원 강의는 크게 교실 강의(오프라인)와 교실 밖에서 이뤄지는 통신강의(온라인)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실 강의 보다는 통신강의에 비중을 더 두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신학생들이 공부와 함께 직장일에 종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신 강의는 일정한 과제물을 주고 숙제나 레포트를 제출 받기도하며 각자가 도서관 등에서 관련 자료를 열심히 공부해 작성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또한 이런 경우 서신을 통해 교수와 학생간 소통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학생수가 전교생이 모두 12명이라서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강의실에서 진행하는 신학강의는 주로 조그련 연맹 목사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외국어, 세계사 등의 일반과목은 사회과학원 연구사들과 평양시내 주요대학 교수들을 초빙해서 가르친다. 또한 신학과목 강의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으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신구약성경, 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조선교회사, 세계교회사, 설교학, 목회학, 교회정치, 예배학, 찬송가학(종교음악, 교회음악) 등의 기본 교과목들을 가르친다. 특히 교회음악이나 종교음악을 ‘찬송가학’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필자에게는 이채롭게 느껴졌다.
   
또한 강의실(오프라인) 교수진은 정교수와 외래교수로 구분된다. 외래교수는 주로 남측의 감리교 서부연회의 목사들로 구성된 교수진들이 1년에 두 번씩 방문해 계절학기를 강의하고 돌아간다. 또한 어느 학기에는 평양의 주체사상연구소 박승덕 소장이 외래교수로서 방문해 철학사와 기독교사상에 대해 학생들에게 강의하기도 한다. 정교수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강의한 교수들을 살펴보면 현재 오경우 서기장, 리성봉 목사, 박춘근 목사, 리춘구 목사, 정경숙 교수 등이며 오 목사는 목회학, 리성봉 목사는 성경, 리춘구 목사는 조직신학, 정경숙 교수는 찬송가학을 가르쳐왔다.
    
특히 북 최초로 여성목사 안수를 받은 이성숙 목사가 성서신학, 이태균 원로목사는 조직신학, 칠골교회 담임이었던 황민우 목사와 장승복 목사는 실천신학을 주로 가르쳤고 봉수교회 담임을 맡던 중 3년 전에 타계한 손효순 목사는 역사신학, 리영태 목사는 구약학을 가르쳤다. 리영태 교수는 조직신학과 세계기독교회사를 직접 저술하여 가르치며 구약학도 강의했는데 그는 영국의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변에서 살해당했을 때 현장에 있었던 박춘권의 조카이며, 미국선교사 이눌서(William David Reynolds) 선교사의 비서 출신으로서 그의 성경 번역작업을 도왔던 장본인이기도하다. 뿐만 아니라 리영태 교수는 남측 천주교와 개신교가 공동합작으로 제작한 공동번역성서를 북으로 가져와 그것을 토대로 조그련 직속의 ‘조선 성경전서(북한성경전저)’를 펴낸 실력있는 학자이다.
    
평양신학원이 1972년 개교하자 당장 강의에 필요한 교재와 신학도서가 시급했다. 이때 공급을 맡은 인물이 바로 홍동근 목사였다. 홍 목사는 자신이 시무하는 미국 LA의 ‘선한 사마리아교회’를 통해 제공했으며 그밖에도 여러 남측교회에서 많은 전문서적들을 기증받아 학교를 운영했고 그후 남측 감리교의 학사운영 지원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명박 정권의 5.24대북제재 조치 이후에는 지원이 중단돼 현재는 신학원 자체에서 자립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수들에게도 특강했던 홍동근 목사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홍동근 목사는 1990년 11월부터 평양신학원과 김일성종합대 종교학과를 방문해 강의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매번 출국할 때마다 다량의 강의 서적을 짊어지고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대학 교수 12명과 신학담론을 시작했고 학생들에게도 특강을 했으며 평양신학원에서도 교수들과 학생들을 상대로 매해 봄, 가을 두 학기로 나누어 강의를 했다. 신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강의는 주로 성서강해와 조직신학이었고 특히 기독교개론을 가르쳤다. 구체적으로 성서신학, 사회윤리, 교회사, 기독교선교, 기독교와 주체사상, 기독교와 민족통일 등의 과목을 가르쳤던 홍 목사는 자신이 하는 일이 힘에 겹다며 박순경 교수와 홍근수 목사에게 신학원에서 함께 강의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홍 목사는 2001년 여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며 그 때부터 평양에서 두 학교의 교수로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이며 그후 2001년 11월 11일 그가 타계하는 날까지 11년간 지속되었다.  매년 두 학교의 외래 초청교수로 단기 강좌를 맡은 홍 목사는 항상 보름 일정으로 LA와 평양을 왕래했었다. 마침 평양에 체류 중이던 당시 75세였던 홍 목사는 11월 10일 밤 뇌출혈로 갑자기 운명했다. 생전의 홍 목사가 북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북측 당국의 전폭적인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또한 동역자이자 죽마고우였던 ‘에스라선교회’의 조동진 목사와 미국장로교총회 이승만 목사와 김인식 목사 등의 보이지 않는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졸업생들의 진로
     
2000년 이전의 3년제 졸업자와 2000년 이후 5년제 졸업자들은 기본적으로 전국의 가정교회나 처소교회에 소속돼 주어진 일을 감당한다. 그밖에도 조그련 연맹 중앙본부나 지방 연맹 사무실에서 일하거나 혹은 평양신학원에서 일한다. 그중에서 여러 가지 능력이 검증되면 중앙교회에 해당하는 칠골교회나 봉수교회의 담임목사나 부목사로 발탁되기도 한다. 특히 평양신학원 제8기 졸업생 12명의 진로를 살펴보면 당시 봉수교회(3명)와 칠골교회(2명), 평양시 그리스도교연맹(1명), 평안북도 그리스도교연맹(2명), 평안남도 그리스도교연맹(2명), 황해남도 그리스도교연맹(2명) 등 각각 지역 연맹과 그 소속 가정교회로 배치됐다. 졸업생들은 목사 안수를 받기 전까지 자기가 출석했던 도시나 지역의 가정교회나 각 지방의 가정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해야 하며 때로는 연맹 본부나 지역 연맹 사무부서 등지에서 일한다.
      
전임자인 손효순 목사의 타계로 인해 후임으로 부임한 송철민 목사(1968년 7월 31일 생)의 경우를 살펴보면 평양에서 소학교와 고등중학교를 나오고 1984년 사회과학대학에 입학해 1989년에 졸업했고 그 후 개성 역사박물관에서 연구사로 일했다. 그리고 다시 평양의 중앙역사박물관에서 일하다가 평양신학원에 입학해 신학공부를 하던 중 1999년부터 평양봉수교회에서 전도사 수련과 부목사 수련을 받았다.
    
송 목사의 신앙배경에는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평남 성천 출신의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는데 해방 전 강량욱 목사가 성천지역 부흥집회를 왔을 때 받은 영향과 인연으로 전쟁 후에도 집안 어른들이 다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송 목사는 어릴 적부터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분위기에서 자랐으며 성장하면서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 후 송 목사의 조부와 강량욱 목사의 관계가 돈독했던 인연으로 강영섭 목사의 추천을 받아 평양신학원에 입학하게 된 케이스였다. 그 후 2010년 5월에 목사안수를 받은 송철민 목사는 2013년 4월에 봉수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봉수교회 부목사로 활동 중인 한명국 목사의 경우도 비슷했다. 함경남도 영광군 산골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지방에서 성장했는데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조부모가 성경이야기와 찬송을 자주 들려주었고 믿음생활을 하며 성장한 그는 중학교까지 지방에서 다니다가 1982년 평양음악대학교(현재 김원균명칭음악대학교)에 입학해 ‘음악이론’을 공부하면서 바흐, 헨델, 모짜르트 같은 음악가들이 작곡한 음악들을 많이 접했고 그중에 교회음악을 연구하며 신앙을 더욱 체험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한 목사는 음대 연구원으로 일하던 중 1999년 송철민 목사와 같은 시기에 평양신학원에 입학했고 2000년에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연맹 본부에서 선교부 부장으로 사역하다가 2012년 12월부터 봉수교회 부목사로 부임하게 된 케이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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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6-06-19 10:49:20
소식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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