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59회부터는 정전협정 이후 지금까지 크게 드러나지 않으면서 신앙의 계보와 맥을 이어오고 있는 북측 가정교회(처소교회, 가정예배처소)를 다룰 것이다. 또한 북측 기독교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두 기관인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과 ‘평양신학원(평양신학교)’을 참관한 이야기들을 통해 북측 기독교의 실상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남측이나 서구식 기독교의 일방적 관점이 아니라 ‘북조선식 사회주의 교회’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한다. / 필자 주 

 

봉수, 칠골교회 분위기와는 다른 가정교회 예배
     
북에는 2016년 현재 전국적으로 520개소의 가정예배소가 확실히 존재한다. 가정예배소의 최초 기원은 해방 공간과 더불어 북측 지역에 인민정부가 들어서는 특수한 환경을 배경으로 처음 발단이 됐다. 6.25전쟁을 치르고 상흔과 반기독교적 정서 속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한 풀뿌리 신자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겨난 독특한 형태의 교회가 된 것이다. 당시는 전쟁 폐허로 인해 벽돌로 건축된 가시적인 교회당과 종교시설물들이 거의 전무한 상태인데다 목회자들의 대다수가 월남해버려 교역자 수급마저 원활하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자구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가정교회는 전문적인 목회자 대신 주로 전도사를 중심으로 장로, 집사, 권사 등 평신도 지도자들이 책임자로 세워졌으며 때로는 조선기독교련맹(조기련) 소속 목회자 한 명이 여러 개의 가정교회를 순회하며 관할하기도 했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이런 가정교회 시스템은 비단 개신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훗날 천주교에도 적용하여 현재 장충성당 외에도 여러 개의 가정교회를 두고 있으며 남한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분류된 통일교도 북에 가정교회가 몇 개 정도 있다.
     
봉수, 칠골교회의 경우 주일예배가 끝나면 신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지만 가정교회의 경우는 달랐다. 주로 신자들이 거주하는 주택의 응접실이나 안방에서 드려지는 가정교회는 주일예배가 끝나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귀가하지 않고 계속 남아 간단한 식사와 친교 시간을 갖는다. 또한 예배순서는 일반 교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순서와 동일하며 설교내용은 민족우월주의, 국수주의적인 내용 그리고 민족통일에 대한 염원이 곁들어져 있으나 성경 본문에서는 결코 벗어나지는 않았다.
     
대표 기도의 내용은 신앙(종교적 믿음)과 교양(도덕과 윤리차원)의 경계선에 있는 듯 했으며 아무래도 권선징악을 떠올리는 내용으로 기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 담당자는 대개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편이었고 때로는 감정에 복받쳐 울먹이기도 한다. 어떤 이는 간절한 음성으로 기도문을 읽어 내려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아예 기도문 원고를 보지 않고 눈을 감고 기도를 했으며 회중들은 기도내용에 공감이 되거나 기도가 절정에 오를 때 ‘아멘’으로 화답했다. 또한 가정교회 신자들에게 있어 가장 즐거워하는 시간처럼 보이는 회중 찬송시간에는 감동과 은혜가 조화된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애절함과 즐거움이 뒤섞인 영성을 소유한 듯한 상태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듯 보였다.
     
또한 일부의 오해나 우려와는 달리 예배 참석자나 설교  내용을 감시하기 위한 보위부원이나 감시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매우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예배가 드려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그릇된 염려를 하는 부류들은 대개 가정교회와 지하교회를 이해하지 못한 혼선에서 비롯된다. 북의 가정교회나 처소교회를 모르면 북 기독교의 전체 실상을 모른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북 기독교의 모체가 되며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가정교회와 처소교회를 전혀 모르면서 그동안 북에 대한 종교 탄압과 종교 자유를 문제 삼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북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가정교회와 처소교회가 탄생하게 된 배경과 역사적 환경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 남한교회 방문단이 가정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남한교회 방문단이 가정교회에서 북측 신자들과 손을 잡고 주일예배의 마지막 폐회찬송을 부르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북측 가정교회 신자들이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설교를 부탁받은 남측 대표단의 목회자가 가정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북 기독교 당국은 광고나 홍보를 하지 않는다
     
그동안 필자가 북측 기독교를 탐방하고 이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분명한 사실 중에 하나는 북 당국이나 해당 기관인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 등은 자신들의 교회 실태에 대해 일부러 외부에 드러내거나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법이 없다. 또한 자신들의 자국 내에 활동하는 기독교에 대해 자본주의식의 광고나 홍보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처럼 자신들을 적극 홍보하거나 증명하기 위해 광고나 선전을 하려고 애쓰지 않았으며 잘 알려지지 않은 가정교회와 처소교회의 실체를 외부세계에 알리는 일들도 자제하고 있다. 기존 봉수, 칠골교회 외에도 여러 유형의 교회들과 신자들이 있건만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남한과 서방세계는 북이 종교를 탄압하고 인권을 억압하고 있다며 몰아붙이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북 당국은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진실을 알리면 좋으련만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증명에 매우 인색하다. 오히려 필자가 방북할 때 마치 고고학을 발굴하듯 여기저기 탐방해 기독교의 실상을 확보해 외부세계에 알려야 하는 현실이다. 필자는 이런 부분 때문에 오히려 북측 기독교가 더 진정성 있어 보였다.
     
북 당국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증명하거나 외국에 보여주기 위한 교회가 아니라 그냥 진솔하고 소박하게 외래종교를 자신들의 것으로 소화하며 드러나지 않게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필자는 종교를 대하는 북측 인민들이 우리와는 종교를 대하는 정서와 문화가 사뭇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민족종교로 정착시키다
     
북 일반 인민들은 과거 6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회주의와 주체사상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종교문화나 사상을 쉽게 접하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그들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북한식 기독교 전통을 싸그리 무시하고 남한교회나 미국교회 방식이 아니라고 무조건 폄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특히 북을 습관적으로 비판하는 세력들은 “북측 교회는 대남선전용, 대외과시용, 홍보용, 외화벌이용의 목적으로 설립됐으며 겉은 진짜교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가짜교회다” 라며 매도한다. 심지어 “봉수, 칠골교회 교인들은 모두 가짜이며 그들 대부분 노동당 당원이나 그 가족들이며 실제로는 예수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며 근거 없는 모함을 한다.
      
그러나 북 인민들은 자신들이 피땀 흘려 지켜온 민족정신과 자주정신의 바탕 위에 주체문화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가정교회를 이끌어왔고 몇몇 교회당들을 건축하며 예배를 드려왔다. 필자가 관찰해보니 북측 기독교 공동체들은 정전협정 이후 지금까지 주체문화가 뿌리내리며 자연스럽게 토착화되었으며 기독교의 정체성은 주체문화와 공존하며 민족종교화 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 기독교라는 거대하고도 세계적인 종교를 자신들만의 고유한 민족종교로 정착시킨 유일한 국가는 지구상에 이북 사회뿐이 없는 것 같다.
    
북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아마 북측 교회도 남측이 믿는 방식대로 믿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북 교회에 대한 실체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미국의 시각에 의해서 해석되고 제공된 정보와 남한의 정권에 의해 재생산된 정보에 의해 터무니없이 왜곡되고 있다. 특히 북 교회에 대해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진정성부터 의심하는 행위들은 북 기독교 실상을 파악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북에는 진짜 기독교가 없다며 단정 짓는 사람들은 도대체 북으로부터 어떤 종교 활동의 모습을 목격해야 속 시원하게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말할 것인가? 아마 그들의 생각 속에는 종교적 가치보다 정치적 가치가 앞서기 때문에 “북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비근한 예로 남한과 서방세계의 비판세력들은 6.25전쟁 직후에는 북 사회를 종교의 무덤이라고 비판했다가 실제 종교인들이 모임을 갖고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되자 이번엔 십자가가 걸린 교회당이 없기 때문에 종교가 없다고 비판했다. 그 후 북측이 교회당을 건축하자 이번엔 형식적인 가짜교회라며 매도하고 비판해왔다.

가정교회는 ‘주체적 신앙’의 모델 케이스인가?
    
가정교회들이나 칠골, 봉수교회를 막론하고 필자가 탐방한 모든 기독교 공동체들은 토착화의 과정을 착실히 진행시키고 있었으며 이렇게 된 이면에는 단재 신채호나 김일성 주석처럼 민족주의 종교관에 뿌리를 둔 사상들이 영향을 끼친 듯 보였다. 단재의 명언으로 잘 알려진 아래의 글은 정확한 출처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각 나라마다 외래종교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새겨둘 만한 교훈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조선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조선’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조선’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조선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조선’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위엣 글은 다음에 나오는 단재의 신문 기고문에서 추가되거나 편집된 듯 보였다. 1925년 새해를 맞은 단재는 1월 2일자 동아일보 <낭객(浪客)의 신년만필(新年漫筆)>이라는 연재물을 통해 당시 유행하던 사회운동에 대한 논평과 전망을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이해문제(利害問題)를 위하여 석가(釋迦)도 나고 공자(孔子)도 나고 예수도 나고 마르크스도 나고 크로포트킨도 났다......(중략)......우리 조선(朝鮮) 사람은 매양 이해(利害) 이외(以外)에서 진리(眞理)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釋迦)가 들어오면 조선(朝鮮)의 석가(釋迦)가 되지 않고 석가(釋迦)의 조선(朝鮮)이 되며, 공자(孔子)가 들어오면 조선(朝鮮)의 공자(孔子)가 되지 않고 공자(孔子)의 조선(朝鮮)이 되며, 무슨 주의(主義)가 들어와도 조선(朝鮮)의 주의(主義)가 되지 않고 주의(主義)의 조선(朝鮮)이 되려한다.”

이러한 단재의 주장뿐 아니라 훗날 김일성 주석도 각종 인터뷰와 회고록을 통해 단재와 일맥상통하는 주장을 했는데 외래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김 주석의 견해와 주관은 다음과 같이 매우 선명하다.

“예수를 믿어도 미국의 하나님을 믿지 말고 조선의 하나님을 믿으라.”

“온 세상 사람들이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기를 바라는 기독교 정신과 인간의 자주적인 삶을 주장하는 나의 사상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김 주석의 이 같은 언급(세기와 더불어, 제1권, 104페이지)은 기독교 신앙을 믿어도 우리 것으로 소화해 자주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자는 의미로 풀이된다. 북에서 오랫동안 조선기독교연맹 서기장을 지낸 고기준 목사는 생전 자신의 회고록에서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다만 일부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맹목적으로 믿는데 대해 수령님께서 ‘하느님을 믿을 바에야 조선의 하느님을 믿어야지 무엇 때문에 먼 미국의 하느님을 믿겠습니까? 미국 놈들을 믿어 보았자 얻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신데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오히려 1946년 11월 공화국 북반부에서 첫 민주선거를 앞두고 기독교인들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악랄하게 책동하고 있던 내외 반동들의 정체를 폭로하면서 우리 기독교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의 정치적 권리를 당당히 행사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어 고기준 서기장은 김일성 주석의 종교관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했다.

“주석께서는 ‘종교를 믿는가 믿지 않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의사에 맡겨야 하는 것이며 종교를 믿어도 조선 사람의 얼을 가지고 내 나라 내 민족을 위해 믿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종교관과 애국애족의 이념을 가진 종교인들에 대해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조금도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변함없이 함께 손잡고 나갈 동행자로 품어주고 내세워 주셨습니다. 또한 종교를 악용하는 것을 반대 배격하였지 종교와 종교인들을 멀리 하거나 차별한 적이 없습니다.”

조선 땅에 불교와 천주교 등이 전래될 때 원주민들의 풍습과 정서에 결합되어 그에 걸맞는 형식으로 바뀌며 정착했듯 북에서의 기독교 역시 그렇게 자기 식의 종교로 소화되어 자기  논리와 방식으로 기독교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를 수용해가고 있었다. 결국 남과 북의 기독교는 종교성과 신앙색채가 서로 다를 뿐 교회로서의 본질은 서로 다르지 않다고 보여진다.

▲ 옥중의 단재 신채호 선생. [사진제공 - 최재영]

 

▲ 미주 한인교회 목사들과 함께한 조선기독교련맹 고기준 서기장(좌측부터 김의환 목사, 고기준 목사, 이정근 목사, 홍동근 목사).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 창전거리 고층 아파트 인근에 세워진 ‘영생탑’. [사진제공 - 최재영]


기독교의 영생과 주체의 영생탑과의 관계
     
평양시내를 지나다보면 가끔 도로 한복판에 ‘영생탑(永生塔)’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한다. 탑에는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글귀가 음각 혹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얼핏 보기엔 마치 기독교의 ‘부활교리’를 복사한 듯 느껴지는 저 문구를 혹시 남한과 서방세계의 일반 기독교 신자들이 읽는다면 대부분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거부감이 들 것이라 여겨졌다. 특히 목회자들의 눈에는 마치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임마누엘’ 교리와 사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일 것이다.
    
이러한 탑들은 평양 중심지역뿐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의 거리나 학교 등에 골고루 세워져 있다. 심지어 남한과 해외교회들이 모금해 설립한 평양과학기술대학 캠퍼스 안에도  영생탑이 우뚝 세워져있다. 탑 전면에 세로로 기록된 이 문구는 지금도 유훈 통치가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전혀 이해가 안 될 뿐 아니라 상극처럼 여겨질 수 있다. 과거에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지녔던 사람이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가? 그뿐 아니라 더 나아가 죽은 사람이 어떻게 통치행위까지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자세히 알고 보면 이런 의문점들은 주체사상과 기독교가 ‘영생’이라는 주제를 두고 학문적인 측면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철저한 사회주의 국가인 북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는 달리 사회주의를 더욱 강화하게 만든 주체사상으로  재무장된 사회이다. 그런데 이 주체사상은 인간을 ‘육체적 생명’ 그 이상의 의미로 본다. 무엇보다 주체사상은 인간을 ‘사회정치적 생명’을 가진 고귀한 존재로도 보는 것이다. 육체를 지닌 개인의 한 생애는 죽음(의학적 사망선고)으로서 끝이 나지만 그가 속했던 사회와 집단은 영원히 존재하고 발전한다는 것이다. 즉  생전에 이웃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며 자기 목숨까지도 민중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삶을 살았을 때 그 사람은 영원한 사회적 생명체와 함께 영생하게 된다는 원리이다.
       
민중과 혁명의 이익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헌신과 투쟁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칠 때 개인의 육체적 생명은 끝이 나도 그가 지닌 사회정치적 생명은 사회정치적 집단과 더불어 영생하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필자는 ‘영생탑’의 문구를 그런 의미에서 접근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종교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북 체제 자체를 종교집단으로 매도 할 수 있고 주체사상을 마치 이단적 교리로 취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옥류동 가정교회 강세영 장로 가정사의 비극
    
평양 대동강구역에 있는 옥류동 가정예배처소를 방문하면 강세영 장로라는 칠십 중반이 넘은 여성 장로가 교회 책임자로서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를 전한다. 1940년 평양 서성교회 담임을 맡은 강병석(康炳錫) 목사의 딸이라고 하는 그녀는 가정교회 성도들로부터 매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가족사와 직결된 강 장로의 간증과 신앙 스토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가 겪었던 비극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진다. 특히 해방 직후 자신의 부친 강병석 목사가 남에서 북파한 정치공작대가 던진 수류탄에 의해 살해된 뼈아픈 기억을 술회하는 대목에서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해방 직후 남쪽에서는 신익희를 본부장으로 하는 ‘정치공작대 중앙본부’가 조직되어 곧바로 실행에 옮기기 위해 북 핵심 요인들을 테러하거나 살해하기 시작했다. 테러행위는 정치공작대 산하 지하단체인 ‘백의사’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실행되었다. ‘백의사’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게 잘 알려진 염응택(영화 ‘암살’의 염동진)이 북에서 월남한 의혈청년학생들을 규합해 1945년 12월 서울에서 조직한 정치테러 단체이다. 이들은 46년 3·1절 기념행사장에서 당시 김일성 위원장을 비롯해 최용건, 김책, 강량욱 목사에 대한 암살을 계획해 실행에 옮긴 것이다.
    
정치공작대원들은 3·1절 기념식장에서의 김일성 암살 작전이 실패하자 연이어 권총과 수류탄을 준비해 최용건, 김책의 집을 습격했으나 이마저 실패하자 마지막으로 강량욱 목사 제거에 혈안이 되었다. 당시 강량욱 목사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2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서기장(실무책임자)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서기장 직책을 맡으면서 동시에 고정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결국 이들 대원들은 1946년 3월 13일 한밤중에 강 목사 사택을 기습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김정의라는 인물의 주도로 최기성, 이성열, 최의호, 이희주 등이 규합돼 강량욱 목사 암살단을 조직했던 것이다.
     
당시 강 목사의 집은 고정교회 안에 있는 목사관(사택)이었는데 암살단은 강량욱이 당연히 안방에서 자고 있을 줄 알고 안방을 집중 공격했다. 그러나 그날따라 외부에서 손님이 두 명 방문하는 바람에 강 목사는 안방을 손님들에게 내어 주고 행랑채에서 자고 있었다. 암살범들은 수류탄을 투척하고 권총을 무차별 난사해 강 목사의 큰 아들 영해 군은 머리에 관통상을 입어 현장에서 즉사하고, 딸도 총알이 어깨에서 가슴으로 관통해 현장에 몇 마디 비명을 지르고 죽었다.
    
그뿐 아니라 강량욱 목사는 얼굴 양쪽과 팔에 총알이 스쳐간 경상을 입었으며 부인은 머리를 다쳤다. 그날 밤 강량욱 목사의 집에 찾아온 두 손님은 김득호(金得鎬) 목사와 강병석 목사였는데 김 목사는 시국에 대한 의논을 위해, 강 목사는 당시 20세였던 강량욱 목사의 큰 아들 영해 군의 중매를 위해 강양욱 목사 사택을 찾아왔다가 큰 변을 당한 것이다.
    
결국 안방에서 자던 손님 두 명 중에 김 목사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나머지 한 명인 강병석 목사는 수류탄이 척추를 관통해 중상을 입고 2년 8개월 동안 치료를 받다가 결국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필자가 방문한 옥류구역 가정교회를 이끌고 있는 강세영 장로는 바로 이날 변을 당해 치료를 받던 중 사망한 강병석 목사의 딸이었던 것이다. 강세영 장로는 아버지가 당시 중화군 초현리교회를 담임하며 교인들과 어울리던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남과 북의 첨예했던 이데올로기 시대의 생생한 파노라마를 보는 듯했다.

▲ 젊은 시절 강량욱 목사의 활동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3년 전 타계한 봉수교회 손효순 목사와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최근 순안구역 가정교회 신자들이 주일예배를 드리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전도의 어려움과 고민에 빠진 북 사회
     
필자가 탐방한 북측 기독교 공동체들은 기독교라는 거대하고 세계적인 종교를 우리나라의 민족종교로 토착화하는 과정을 착실히 진행시키고 있었으며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지금부터 2년 전 세상을 떠난 봉수교회 담임 손효순 목사는 생전 시 필자와의 대화를 통해 목회에 대한 여러 가지 애로사항을 아래와 같이 토로한 적이 있었다.
 
“애초에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미국 사람들에 의해 우리 조선 땅에 들어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조국해방전쟁(6.25전쟁)’ 시기에 야수 같은 만행을 저지른 미국을 겪은 우리로서는 미국에 대한 감정이 아주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과, 인민들에게 ‘예수쟁이는 곧 미국 놈’이라는 식으로 인식되었단 말입니다. 지난 전쟁 시기 피해 중 교회당들이 미군 폭격에 의해 폭격을 당한 곳이 1000여 곳이 넘을 정도로 아주 많았습니다. ‘신의주 제1교회’와 ‘제2교회’를 비롯해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 몰살된 경우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대다수 북 인민들의 반응은 싸늘했고 ‘기독교는 곧 미국’, ‘미국은 곧 기독교’라는 공식이 성립되며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해졌다는 것이다. 정전협정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북과 미국의 적대적 관계가 풀리지 않은 한 북의 대다수 인민들의 감정은 누그러지기는 어려울 것이며 그런 상황에서 대중들을 전도하기가 무척 힘들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손 목사뿐 아니라 전도사 신분으로 남측교회도 방문했던 백봉일 목사(현, 칠골교회 담임)는 조그련의 다른 목사들과 함께 “신도수를 14,000명으로 늘리는 ‘만사운동’을 펼치겠다”고 공언 한 바 있었는데 그도 역시 “전도의 어려운 고민에 빠져있다”고 하소연했다.

“우리 공화국 사회는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나라라서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얼마 없습니다. 현재의 신도들도 대부분 과거 부모들이 신자들이었거나 그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전부입니다. 전도를 많이 하려면 부흥회라든가 이런 걸 자주 해야 하는데 사회적으로 거부감을 많이 일으키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아 전도를 하는데 있어서 애를 많이 먹고 있지만 그래도 다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개별전도나 사회봉사활동을 통해 전도사업을 많이 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의 눈으로 볼 때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신자들의 대부분의 연령층은 40대-70대까지의 장년층이 대부분이고 유초등부나 중고등학생은 물론이고 청년 대학생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렇다고 교회 산하 별도의 교회학교가 운영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손효순 목사에게 이런 부분을 염려하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예배시간에 학생들과 청년들이 없는데 그렇다면 훗날 신앙의 계보와 맥이 끊어지는 거 아닙니까? 어떤 대책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제가 학생소년궁전에 가서 아이들을 데려오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그게 뜻대로 잘 안 됩디다.”

그도 그럴 것이 북 당국은 아직 이성 판단력과 자아성 정립이 안 된 청소년들에게는 종교교육을 시킬 수 없도록 법적으로 규제하고 있기 때문에 주일학교나 교회학교가 결코 존재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청년들을 교회에서 찾아 볼 수가 없다. 북은 신앙의 자유는 있으나 만 18세 미만 청소년들에게는 종교교육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애초부터 전도의 대상자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사회이다.

미제와 이승만이 믿는 종교로서의 반기독교 정서
    
북 사회에서의 반기독교적 사회풍조는 ‘미제가 믿는 기독교’ 그리고 ‘리승만(집권 당시 서울 정동감리교회 출석)이 믿는 기독교’로서 인식되며 오히려 북 인민들에게 있어 종교가 타도의 대상이 되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으며 더 나아가 사상의식 개조 작업의 일환인 반종교 선전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그 수위를 넘어 1959년에는 반종교 선전을 위한 소책자들이 마구 쏟아져 나올 정도였다.
   
1959년 노동당출판사에서 펴낸 ‘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는가?’라는 책도 그것들 중의 하나이다.

“지난 3년간의 조선전쟁과 오늘날 남조선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미제가 감행한 무고한 인민에 대한 학살, 약탈, 방화 등 비인간적인 야수적인 만행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약탈에 이용되는 종교의 추악하고 반동적인 본질을 말하여 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 책은 종교를 ‘낙후한 사상 잔재’로 보고 그것의 비과학성과 반동성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우리가 사회주의 건설을 더욱 촉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들 속에 남아 있는 비과학적인 종교, 미신에 대한 잔재들을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주장은 곧 바로 인류의 사회생활에 막대한 해독을 끼쳤다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이런 종류의 반종교 선전 책자들이 출간된 1959년경에는 북의 사회 정치적 분위기로 볼 때 공식적인 교회 활동이 거의 사라진 듯 보였으나 그런 와중에도 가정교회는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8.15 해방 직후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출범하자 ‘반민족 친일청산’을 위한 일제 잔재 소탕은 물론 친미 제국주의자들과 봉건적 지주, 소작제 폐지 등의 토지 개혁 등을 강력히 주도해 나갔으며 2년이 지난 1947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가 출범했다. 이때 당시 북측의 친미 친일성향의 기독교 세력은 기독교 정당을 만들어 대항했고, 선거를 조직적, 공개적으로 보이콧하며 인민정권과 격돌했다.
     
이때 기독교 목회자들과 신자들 중에 일제 부역했던 세력과 친미 세력들은 반제 반봉건에 동참하는 중산층 이상의 지주계급들을 등에 업고 공개적으로 정부와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 이들은 북 체제에서 생존과 적응이 불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같은 기독교 목회자들이라고 해도 지주계층, 부일, 친미세력이 아닌 목사들과 신자들은 자연스레 북 체제 내 존속했다. 이를 두고 남한에 있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ACTS) 총장을 지낸 한철하 박사는 “인민정권에 의해 청산 대상으로 분류된 목사들과 신자들이 받았던 제재는 신앙의 자유문제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성분 때문이었다”라고 평가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평소 유산계급 편에서 무산계급을 착취하였다”는 이유였던 것이다.
    
친일파와 지주세력의 주축이 된 목사들과 신자들이 월남하자 북에 남아 있던 신자들은  기독교가 퇴출되거나 퇴보하지 않도록 생존을 모색해가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식 기독교로서의 가정교회와 처소교회를 태동케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6.25전쟁이 발발했는데 전쟁의 피해는 매우 심각해 북측지약에만 1000여개 이상의 교회당이 완전 파괴되었고 나머지도 반파되거나 부분적인 훼손을 입은 교회당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월남하고 나머지 목회자들은 비록 소수이지만 인민정부와 별다른 마찰 없이 협력하며 지금까지 존속되어 왔다. 특히 북 기독교를 이끄는 핵심 기구인 조기련(현재 조그련)은 창립부터 지금까지 두 가지 활동을 병행해 왔는데 첫 번째가 가정교회, 처소교회 신자들을 돌보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남한교회나 해외동포 목회자들과 연대하여 통일운동의 파트너로서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한편 해외 기독교인들과 남측 교회 지도자들의 지속적인 방북 활동은 이북 내 각 기독교 공동체들을 더욱 활성화 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종교인 가족’으로 분류된 가정교회 신자들
       
평양은 예로부터 ‘동양의 예루살렘’ 혹은 ‘조선교회의 요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가 매우 부흥하고 흥왕했다. 일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1913년, 북측지역에 732개의 교회가 존재했으며 20년 후인 1942년에는 2,339개로 약 3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온다. 또한 평생을 북한교회사 연구로 몸을 바친 이찬영 목사의 연구 결과(‘해방 전 북한교회 총람’)에 의하면 해방 전에는 이북에만 3,035개의 교회가 존재한 것으로 보고됐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평안북도에 755개, 평안남도 724개, 황해도 870개, 함경도 492개, 강원도와 경기도에 194개의 교회가 있었다. 또한 정확하지는 않지만 북한 조그련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1950년 이전 북한 기독교는 교회수가 약 2,000개, 신자 20만명, 목사 410명, 전도사 498명, 장로 2,142명이었다는 자료를 제공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해방 전 그 많던 3천 개의 교회당들은 6.25전쟁을 기점으로 모두 사라지고 단 한 곳도 복구되지 않았다. 그리고 기존 기독교신자들은 전후 인민정부로부터 ‘종교인 가족’으로 분류되어 가정교회와 처소교회를 다니며 신앙의 그루터기로 그 명맥을 유지해오다 봉수교회, 칠골교회가 건축되고 그 후 다시 가정교회가 재정비되어 전국에 520여 곳을 유지하며 정착시켰다.
    
특히 과거 북 내부에서 ‘종교인 가족’으로 호칭되는 기독교 신앙공동체는 6.25전쟁 이후, 개인적으로 신앙을 유지하거나 혹은 가족이나 일가친척들이 모여 소규모 가정예배 모임으로 유지하기도 하다 1972년 이후 당국에 의해 더욱 합법적으로 제도화되었고 공식화되었다. 6.25전쟁 이후 10만 명의 종교인 가족들이 생존했다고 보았을 때 종교인가족 1세대 중 지금까지 생존 가능한 인구는 20%에 불과하며 그 규모는 10만 명이 채 안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종교인 가족으로 관리되고 있는 이들은 북의 열악한 종교적 환경에서도 분단 70년, 전후 60년 가까이 다양한 방법으로 종교인 가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북 당국과 사회의 차별과 사회적 냉대 속에서도 꾸준히 신앙의 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신자들끼리는 외적으로는 종교인 가족이라는 사회적 차별을 공감하며 집단정체성을 갖고 있고 인맥적으로는 결혼을 비롯한 경조사를 맞았을 때의 상부상조 등 소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72년부터 북 당국은 주로 기독교를 믿는 종교인 가족의 신앙 활동에 대해서는 과거로부터 내려온 개인적 차원의 신앙생활로 간주하여 묵인 내지 용인해 주고 때로는 공식화했던 것이다.
  
그 속에서 종교인 가족들은 2대, 3대로 내려오면서 부모들로부터 구전을 통해 신앙가족이라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나, 안타까운 점은 세례의식이나 침례의식 혹은 성만찬식을 비롯한 종교적 의례를 거의 가져보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신앙적 교리의 내용은 거의 없고 신앙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의식 그리고 신자로서의 율례와 약간의 생활지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

(수정, 27일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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