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어린 시절 밑도 끝도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워낙 실감이 나서 내가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니면 생시인지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꿈을 꾸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공포감을 느꼈던 것은 꿈에서 깨어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 거였다. 몸부림치다가 깨어난 얼굴에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사람들은 `크는 꿈`이라며 위로를 했지만 그 때의 공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공포는 꿈이 아니라 현실세계가 많아졌다. 부모가 없어질까 하는 두려움, 혹은 전설에 고향에서 나오는 구미호에 대한 공포감 따위에서 우락부락한 친구들이나 선배들에게 두들겨 맞는 두려움, 학교 선생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사회에 나와서는 돈을 벌지 못하거나 친구들에게 뒤떨어지며 인정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에 밤잠을 설쳤다. 

사람들은 원초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주로 늙음, 죽음, 배고픔 따위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은 학력, 지식, 직업, 출세, 명예, 책임감, 혹은 남자다움, 여자다움 따위의 공포심을 습득한다. 이는 원초적인 공포심보다 훨씬 더 큰 두려움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공포심은 사회질서와 제도를 통해 습득하고 확대된다. 사회적 공포심의 한 쪽에는 감옥, 정신병원, 파산, 왕따, 자살 같은 응징체계가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공포심은 지배이데올로기로 활용된다. 사람들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버둥친다.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 남을 이용하여 사기를 치고, 국민적 불신을 조장한다. 미국의 테러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미국의 광기는 최강대국이라는 또 다른 나약한 공포심의 발현이다. 물론 뻔한 정치, 경제적 계산이 숨어있겠지만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더욱 공포감을 조장한다. 공포감에 빠져있는 사람은 이성적인 판단이 마비된다. 오로지 생존에 대한 본능과 공격성만 살아있을 뿐이다.

중세시절 타락한 성직자는 성경과 지식을 독점함으로써 백성을 공포감에 몰아 넣어 착취했다. 질병에 대한 공포감은 마녀사냥을 불렀고, 권력에 대한 공포감은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 수천 만 명을 죽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무지가 냉전체계와 군비경쟁과 전쟁을 일으켰다. 가깝게는 북한에 대한 무지가 인권을 유린하고, 남의 나라 군대를 서울 한복판에 상주시키며, 매카시즘을 부활시켜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한다. 혼자 잘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이상한 공포심과 밀리면 끝장이라는 공포심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공포감은 감성을 자극하면서 만들어진다. 시각적인 공포심보다 촉각이나 청각에 의한 공포감이 크다는 것이 일반적이며 멀티형 공포 즉, 시각, 청각, 촉각을 총동원하면 공포심을 극대화할 수 있다. 언론과 방송은 사회적 공포감을 멀티형으로 전달하며 확대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 음모론이 끼여들고 두려움의 대상을 추상적으로 만들면 똑똑한 사람들의 이성을 충분히 마비시킬 수 있는 힘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본질이 뻔히 보이고,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있는 공포는 유치한 개그보다도 못하다. 공포의 대상을 알고 있으면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사람들은 공포심을 없애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어쩌면 이것이 인류를 발전시킨 동력일 수도 있다. 죽음과 병의 공포로부터, 배고픔과 추위의 공포로부터, 전쟁과 파괴의 공포로부터, 무지와 왜곡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철학과 자유와 예술과 학문을 발전시켰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지로 오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철저히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합리적 이성을 되찾는 일이다.

▶문영광/청춘의 위훈/조선화/141*212/1997


두려움을 이기는 사람들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북한화가 문영광이 그린 <청춘의 위훈>이라는 조선화이다. 이 작품은 가로 길이가 2미터가 넘는 대작으로 1997년에 제작되었다. 

먼저 작품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원산과 금강산을 연결하는 도로나 철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교량을 만드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멀리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90년대 북한사회를 이끌던 구호가 선명하고, 교량공사를 맡은 청년들은 좌측 깃발에서 알 수 있듯이 `속도전청년돌격대` 대원들이다. 배경은 눈발이 날리는 것과 떠다니는 얼음덩어리, 입은 옷으로 봐서 겨울인 듯하다. 날씨는 악천후이고, 시간은 늦은 저녁이나 밤이다. 물론 이러한 배경설정은 주제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이 작품은 공사기간을 맞추거나 혹은 어려운 공사구역을 당의 영도 아래 청년들의 불굴에 찬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해 가는 모습을 극적인 순간포착과 힘있는 붓질로 표현하고 있다. 큰 나무더미를 크레인에 매달고 중심을 잡는 청년노동자의 모습은 마치 전장에서 전투를 벌이는 병사의 모습처럼 그려졌다. 주형상으로 표현된 중심부의 남성은 나무더미를 들어올리면서 오른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동료들을 격려하고 있다. 입에서는 허연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한겨울인데도 맨손으로 일하는 노동자도 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속도전청년돌격대`는 자원한 청년들인지, 아니면 원래 건설노동자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건설현장에 임하는 청년들의 표정은 진지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교량공사를 위해 배나 크레인 같은 중장비가 동원된 것으로 봐서 굳이 이렇게 사람의 손으로 공사를 해야 하나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작품의 감동은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정황으로 봐서 공사 중에 어디가 무너지거나 악천후에 쓸려 내려가는 문제가 생겼고, 이를 빠르게, 그것도 사람의 손으로 직접 복구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설마 작가가 공사장을 쫄쫄 따라다니다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 사진기로 찍어서 그린 작품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작품은 공사 중에 생긴 문제를 `청년돌격대`가 불굴의 투지로 해결했다는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 틀림없다.

북한미술에서는 이러한 건설현장을 다룬 작품이 많다. 노동자의 생산성을 향상하기 위해 월급과 노동강도를 이용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권력에 의한 강제가 주된 원동력일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 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의 미술작품 속에서는 노동자의 자발성이 단연 돋보인다. 아니 노동자의 자발성을 끌어내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1997년이면 북한에서는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 거기에 미국의 압력이 드센 시기였다. 이렇게 두렵고 공포스러운 상황을 북한의 노동당은 당의 영도를 믿고 북한 인민들이 불굴의 투지로 이겨내기를 원했다. 물론 북한은 전쟁을 원하지도 할 능력도 없었다. 결국 믿을 것은 북한의 인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추운 겨울, 허망하게 무너진 교량을 복구하기 위해 늦은 밤까지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는 불끈 쥔 주먹과 고함소리는 공포심의 힘에 눌려 나약하게 주저앉는 사람들에게 큰 용기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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