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기념일을 제외한 북한의 최대 정치행사인 조선노동당 대회가 36년만에 막이 올랐다. 북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5월 6일 당 7차 대회를 평양에서 개회한다는 결정서를 26일 발표했다.

당 대회는 조선노동당의 상위에 있는 최고지도기관으로 당 규약에 명시되어 있다. 이는 당 최고 의사결정 정책기구라는 의미로, 최고 정책결정자들이 모여 당의 방향과 정책 및 전략 등 당 사업에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기관이다.

당 대회에서는 △중앙위원회.당중앙검사위원회 사업 총화, △당 강령 및 규약 채택 또는 수정.보충, △당 노선과 정책, 전략전술의 기본문제 토의.결정, △당 총비서 추대, △당 중앙위원회 및 당중앙검사위원회 선거 등을 결정한다.

오는 5월 열리는 당 7차 대회는 김일성 시대 이후 처음이라는 점에서 김정은 시대의 향후 노정을 엿볼 수 있는 자리이다. 당 대회는 1946년 1차 대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6회 열렸다. 과거 당 대회의 역사를 통해 김정은 시대를 대표할 당 7차 대회를 가늠해본다.

평균 6.8년 주기로 평균 6.5일 열린 당 대회

당 대회라는 명칭은 1961년 당 4차 대회부터 사용됐다. 당 1, 2차 대회는 전당대회, 당 3차 대회는 당 정기대회로 불렸다.

대회 개최 시기도 1년에 1회(당 1,2차 대회), 4년에 1회(당 3,4,5차 대회), 5년에 1회(당 6차 대회)로 당 규약에 명시됐지만, 2010년 당 규약을 개정하면서 당 대회 시기가 삭제됐다.

김일성 시대에만 총 6회 열린 당 대회는 각각 2년, 8년, 5년, 9년, 10년을 간격으로 평균 6.8년을 주기로 개최됐다. 김일성 시대에 당 대회가 자주 열린 배경은 초기 당을 설립하고 한국전쟁을 거쳐 당의 기초를 세우고 유일체계 성립을 통한 권력구축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보통 기념행사를 축하하는 대회는 1~2일 정도인데 비해 과거 당 대회는 최소 3일에서 최대 12일 간 평균 6.5일 동안 평양에서 개최됐다.

▲ 북한 역대 당 대회 시기, 주요 의제 및 내용, 참석자 수.[자료정리-통일뉴스]

주요 의제는 당 대회 개회시마다 당시의 중대한 정치문제 및 정책이 다뤄졌고, 이에 따른 당 규약 개정, 정책 결정서 발표 등이 있어 당 대회는 북한 정치상황의 변화를 개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당 대회 대표자는 도당 대표회 또는 당 총회에서 선거되며, 당 규약에 따라 선출 비율은 당 중앙위원회가 결정한다. 이렇게 선출돼 참석하는 이들 중에는 당원에서 선출된 결의권을 가진 대의원과 후보당원 중에서 선출된 발언권을 가진 대의원, 방청자로 나뉜다.

1980년에 열린 당 6차 대회에서는 당중앙위원회가 정한 비율에 따라 당원 1천명 당 결의권 대표자 1명, 후보당원 1천명 당 발언권 대표자 1명이 선출됐다.

당 대회 참석자 수는 1차 801명, 2차 990명, 3차 916명, 4차 1천675명, 5차 1천871명, 6차 3천220명으로 5차 당 대회부터는 당 대회 대표자 직업에 따른 구분이 발표되지 않았다.

당 대회에는 해외인사들도 초대되는데, 1956년 당 3차 대회에는 소련과 중국 공산당 대표들이 참석했고, 당 6차 대회에는 118개국 117개 대표단이 참석했는데 대표적으로 이선념 중국 부주석, 그리쉰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 세쿠투레 기니 대통령, 무가베 짐바브웨 총리 등이 있다.

그래서 당 7차 대회 외빈 참석 여부가 주목받지만, 1980년에 열린 당 6차 대회는 당 창건 35돌에 맞춰 열렸기 때문에 해외인사가 대거 참석했기에 이번 당 대회와 비교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있다.

당 대회는 각각 진행순서가 다르지만 대개 개회사→회의를 위한 주석단, 대표자격심사위원회, 회의록편집위원회, 서기부 선거→의제선정→축사 및 축전→중앙위원회 및 중앙검사위원회 보고→중앙위원회 및 중앙검사위원회 토론→당 지도기관 선거→결정서 채택→폐회사 순으로 진행된다.

▲ 1961년 당 4차 대회에 참석한 김일성 주석. 당시 북한은 당 규약 개정을 통해 김일성 단일지도체계를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정책노선을 설정하고 경제.대남분야를 다루는 당 대회

1946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간 열린 당 1차 대회는 당과 국가체제를 성립하던 시기라는 점에서 당과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주력했다. 의제는 정치관련 내용이 총 10개 중 7개, 외교관련 내용이 3개였다.

해방 후 1945년 10월 13일 발족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1946년 4월 '북조선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꾸고 당 1차 대회를 통해 '조선신민당'과 '북조선노동당'으로 통합했다는 점에서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라고도 불린다.

여기서는 △북조선 공산당과 조선 신민당이 합동하여 북조선 노동당을 창립함에 대한 결정서, △북조선 노동당 강령에 대한 결정서, △북조선 노동당 규약에 대한 결정서, △북조선 노동당 기관지에 대한 결정서, △남조선에서 3당이 통일당으로 합동하는 사업 진행에 대한 북조선 노동당 창립대회 결정서 등이 발표됐다.

특히, 마지막 결정서는 당시 남한에서 공산당, 신민당, 인민당 합당 논의가 진전되지 못한 데 대해 박헌영계에 힘을 실어줬다는 평가이다.

1948년 3월 27일부터 30일까지 4일간 열린 당 2차 대회는 당 1차 대회 이후 1년 7개월만에 열렸다. 이는 당시 규약이 당 대회를 1년 1회 개최라고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오히려 7개월 늦게 열린 셈이다. 4개 총화 중 정치 3개, 외교 1개가 다뤄졌다.

당시는 유엔 감시하 남한 단독선거가 주요 화두였다. 그래서 당 2차 대회에서는 △유엔 남한 단독선거를 비난하고, △남북조선 대표자 연석회의 소집을 찬성하며, △사회주의 경제발전을 위한 당면과업을 정하고, △민족통일전선을 지지하며, △사상분야에서의 당 사업과 투쟁을 강화하고, △당의 발전을 위한 당원들의 구체적인 과업을 설정하는 결정서를 발표했다.

흥미로운 점은 당 1차 대회에서는 김일성과 김두봉이 '북조선노동당' 창립 보고자로 동시에 나선 데 반면, 당 2차 대회 당 중앙위원회 사업결산보고를 김두봉 위원장이 아닌 김일성 부위원장이 했다는 것이다. 이는 김일성이 당 권력을 지배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1956년 4월 23일부터 28일까지 6일간 열린 당 3차 대회는 남북노동당 합당(1949년)과 한국전쟁, 전후복구사업 등을 이유로 늦게 열렸다. 또한,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계 숙청으로 당 재정비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총화내용 8개 중 정치분야 55.5%, 경제분야 22.2%, 외교분야 22.2%로 이 시기부터 경제분야와 대남관련 분야가 따로 제기된 점이 특징이다.

당시는 소련 제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시쵸프가 스탈린 개인독재를 비판하고 공산당 노선을 전환하던 시기로 북한도 이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당 3차 대회에서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이 김일성 개인숭배 비판으로 연결되는지와 당 중앙위원회의 기능 활성화로 레닌주의 집체지도 원칙이 회복될지 여부가 주목받았다.

하지만 당 3차 대회에서는 종파분자를 배격하고 항일투쟁 전통계승을 강조하며 김일성 단일지도체계로 이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과 같은해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해, 당 3차 대회는 북한 정치사의 중요한 기점이었다.

이 밖에도 중공업 우선적 발전과 경공업.농업의 동시발전을 담은 '1차 신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평화통일선언문) 선언문 등이 채택됐고, 당의 기능을 분화해 확장하고 당 규약을 세분화하는 등 당 기틀 마련에 주력했다. 당 대회는 4년에 1회 개최로 명시됐다.

▲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화된1980년 10월 열린 당 6차 대회. [자료사진-통일뉴스]

1961년 9월 11일부터 18일까지 8일간 열린 당 4차 대회는 종파를 청산한 뒤 열려 김일성 단일지도체계를 확립한 회의로 평가된다. 대회 토론자들이 김일성의 반종파투쟁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중앙지도기관 인사들이 항일투쟁세력으로 채워졌다.

여기서는 제1차 7개년 인민경제발전계획이 발표됐고 기술 및 문화혁명을 강조하며, '천리마작업반운동'을 심화시키는 내용의 결정서가 발표됐다.

대외적으로 중소분쟁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에 따라 친선 강화를 강조하며 중립적인 위치'를 표명했고, 5.16쿠데타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대남 선언문을 채택했다.

1970년 11월 2일부터 13일까지 12일간 열린 당 5차 대회는 가장 긴 기간에 열렸다. △위대한 총화, △우리나라 사회주의 제도를 공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국제혁명 역량과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하여, △당 사업을 강화하기 위하여 등이 총화 주제였다.

당 5차 대회의 특징은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는 자리였다는 점이다. 당 규약에 주체사상을 추가하고 '온 사회의 혁명화, 노동계급화', '당 간부들의 혁명화, 노동계급화'를 담았고 중앙지도기관선거를 통해 유일사상체계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숙청했다.

그리고 '인민경제발전 6개년 계획'을 발표했으며, 당시 남한 정세와 평화통일구상 등에 대한 비난이 더해졌고, 일본과 미국에 대한 비난, 공산주의 연대를 강조하는 등의 결정서가 채택됐다.

1980년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5일간 열린 당 6차 대회는 4년에 1회라는 당 규약을 깨고 10년만에 열렸다. 이를 두고 김일성 유일체계가 강화되면서 당 대회가 최고정책결정기구로서의 기능이 약화됐다고 평가된다.

당 6차 대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당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공식적인 후계자로 올라섰다는데 의미가 크다.  이를 반영하듯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 '온 사회의 혁명화, 노동계급화, 인텔리화', '사상.기술.문화 3대혁명'을 담은 결정서가 채택됐다. 

경제분야에서는 '사회주의 경제건설 10대 전망목표'로 전기, 석탄, 강철, 금속, 시멘트, 화학비료, 천, 수산물, 곡물, 간석지 개간 등 경제분야의 대규모 투자를 강조했다.

외교적으로 공산주의 간 관계보다 대남분야에 대한 내용으로 집중됐는데, 대표적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과 '10대 시정방침'이 발표됐다.  이는 '7.4남북공동성명'에 담긴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3원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북한의 역대 당 대회에서 보듯, 당 대회는 대내 정치분야, 경제분야, 대남.대외분야에 대한 노선과 정책, 전략전술 등을 다루고 있다. 이는 북한이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인가를 가늠하는 척도였다. 그런 면에서 오는 5월 6일 열리는 당 7차 대회가 다룰 의제와 결정서는 김정은 시대의 방향타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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