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대 / 동국대 북한학 박사수료


모든 사람이 같은 곳을 보는 것은 아니다. 기억 역시도 마찬가지다. 추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거나 생각하기 싫은 일임에도 일종의 외상(外傷) 때문에 머릿속에 기억되는 경우가 있다. 여러분에게 2002년의 기억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입장과 처지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일런지 모른다.

2002년을 남북한과 관련 있는 ‘사건’으로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먼저 ‘2002 한일 월드컵’을 꼽을 수 있다. 기억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한 때는 월드컵의 남북한 공동 개최가 잠시나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또한 ‘제2차 연평해전’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은 월드컵이라는 대규모 국제행사로 인해 주목을 받지 못했다. 

북한의 2002년은 다른 어느 해보다 극적이었다. 2002년 1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했다. 북한은 미국의 동맹인 일본을 출구의 대상으로 잡았다. 평양(국제)영화제 직후인 9월 17일 ‘북일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1년에 이어 2002년 8월에도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무엇보다 경제협력에 관한 논의가 최우선이었다. 내부적으로 7월과 9월에는 경제개혁의 하나로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신의주 특별행정구’를 내놓았다. 아울러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선보이며 자신들의 체제가 굳건함을 과시하고자 했다.

▲ 제8차 평양(국제)영화제에서 러시아 영화 <별>이 ‘장편예술영화 부문’에서 ‘횃불 금상’을 수상했다.

2002년 9월 4일부터 13일까지 열린 여덟 번째 영화제는 앞서 언급한 북한의 대내외 일정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통상 평양(국제)영화제의 개막식 연설은 북한 측 인사가 먼저 하고, 2인의 국외인사가 차례대로 맡아 왔다.

5회 대회에서는 콜롬비아와 이란이, 6회 대회는 시리아와 말레이시아가, 지난 대회는 이집트와 이란 측에서 연설을 하였다. 연설 국가는 ‘쁠럭불가담 및 기타 발전도상나라들의 평양영화축전’이라는 행사의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번 대회는 러시아와 인도네시아 대표가 연설을 맡았다. 러시아의 연설은 이례적이다.

이는 당시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동시에 2000년대 들어 평양(국제)영화제가 기존 참가국을 넘어선 외연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러시아가 출품한 영화 <별>은 영화제 대상 격인 ‘횃불 금상’을 수상했다. 단편영화에서는 <기타 등등>이 촬영상을 받았다.  

▲ 제8차 평양(국제)영화제에서 북한 영화 <살아있는 영혼들>이 ‘횃불 은상’과 ‘남자배우 연기상’을 받았다.

북한 영화 <살아있는 영혼들>은 ‘횃불 은상’과 ‘남자배우 연기상’을 받았다. <살아있는 영혼들>은 일제강점기 일본에 강제노역으로 끌려갔던 한국인 노동자들의 귀향선 ‘우키시마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사건은 최대 수천 명이 사망한 최악의 해난사고로 알려졌지만 사고원인은 ‘미국에 의한 기뢰 폭발’과 ‘일본의 고의적인 폭침’으로 나뉘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영화는 일본의 소행인 것으로 다룬다.

당시 영화제에는 일본 측 영화 관계자와 재일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대표단이 참석했고, ‘북일 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결국, 북한 입장에서는 영화제를 통해 일본의 만행을 환기하고, 회담 국면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영화를 활용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 제8차 평양(국제)영화제에서 영국 기록영화 <삶의 경기>가 ‘축전조직위원회 특별상’을 받았다.

끝으로, 주목할 영화는 축전조직위원회 특별상을 받은 영국 기록영화 <삶의 경기>이다. 북한 영화제에서도 영화의 ‘원제목’과 ‘번역제목’을 병기하고 있지만, 이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매 기고 때마다 ‘원제목’을 알아내는 건 큰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삶의 경기>는 <그들의 인생경기>, <그들 생애 최고의 게임>, <일생일대의 경기>로 번역되기도 했고, 한국 관객들에게는 <천리마 축구단>으로 더 잘 알려진 <The game of their lives>이다.

대니얼 고든(Daniel Gordon)이 제작한 이 작품은 북한에서 촬영된 첫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이며 영국 BBC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영화는 ‘8회(1966년)’ 월드컵 대회에서 ‘8강’에 오른 북한 축구선수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우연하게도 ‘8차’ 영화제에서 특별상에 뽑혔다. 북한을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영국작품의 수상은 그 자체로 새로운 광경이다.

다음 편에는 2004년 9월 12일부터 9월 20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9차 평양(국제)영화제를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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