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습니다. 향년 88세. 당연히 한 인간의 일생에는 영욕과 공과가 있기 마련입니다.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에서 고인만큼 영욕과 공과가 뚜렷하게 교차하는 정치인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정치문제와 민주화 투쟁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YS’, ‘정치 9단’ 등으로 불리며 온갖 정치 기록을 세운 ‘기록 제조기’ 정치인이었습니다. 약관 25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시작해 최다선인 9선을 했으며, 최연소 야당 원내총무와 최연소 야당 대표 등을 거쳤습니다.

또한 그는 감동을 주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일찍이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대선 후보에 도전했으며, 또한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 맞서 쉴 새 없이 감동적인 투쟁을 벌였습니다. 박 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1979년 의원직이 제명되자 이는 유신체제의 종식을 결정적으로 앞당기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3년, 가택연금 된 그는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이며 온몸으로 대항했습니다.

결국 1993년 대통령이 된 그는 정치군인들의 온상인 하나회 척결로 군정을 사실상 종식시켰으며, 금융실명제와 부동산 실명거래 실시로 경제개혁 정책을 펼쳤습니다. 아울러 전두환 노태우 처벌 등을 통한 ‘역사 바로 세우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물론 재임 말기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를 초래한 점은 큰 과오로 지적돼야 합니다.

이렇듯 그는 ‘민주화’와 ‘개혁’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과 모순이 있었습니다. 6월 항쟁 후 찾아온 13대 대선에서 야당 분열로 패배한 후 정치적 위기가 찾아왔지만, 그는 1990년 전격적인 3당 합당으로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고자 한 것입니다. 평생을 군부독재와 싸웠지만 대통령이 되기 위해 그 군부독재 세력과 손을 잡는 모순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모순은 특히 민족문제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떤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며 감동적인 연설을 했습니다. 이어 그는 곧바로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북측으로 송환하는 등 대북 유화책을 펼쳤습니다. 이 같은 조처는 민주화 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해 당장 민족문제 해결로 나아갈 듯한 기세였습니다. 당연히 남북관계가 개선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1차 북핵 위기가 불거지자 그는 “핵을 가진 자와는 악수할 수 없다”며 대북 강경정책을 주도했습니다. 1994년 한반도 전쟁 위기설이 나돌자 방북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남북 정상회담에 합의했으나 김일성 주석의 타계로 회담이 무산됐습니다. 이때 남측에서 ‘조문 파동’이 일어나면서 남북관계가 급랭했습니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최악의 남북관계를 초래한 것입니다. 그의 대북정책은 일관성 없이 온탕과 냉탕을 오락가락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의 정치 역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치인이 있다면, 다름 아닌 김대중 전 대통령일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한국 정치사에서 ‘양김 시대’를 열며 동지이자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특히 둘의 애증관계는 유명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2009년 서거하기 직전 병상에 누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전격 방문해 극적인 화해를 했다는 점입니다.

돌이켜보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화엔 강했으나 민족문제엔 취약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막 세상을 떠난 고인을 두고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인이 이 시대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천착해야 합니다. 지금 박근혜 정부 들어 한국사회가 과거 독재시대로 되돌아간다는 우려가 팽배해져 있습니다. 고인의 삶을 되새기면서 독재회귀를 막고 민주회복을 맞이하는 성찰의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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