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서 ( 겨레말큰사전 책임연구원)


92년 겨울, 의무경찰로 복무하던 때의 일이다. 겨울이 농촌에서 농한기인 것처럼 의무경찰에게는 시위가 없는 ‘무시위기’여서 주로 방범 근무를 나갔다. 그런데 겨울철 방범 근무지는 매서운 겨울바람을 막을 수 없는 골목길이나 대로변에 정해진다는 것이 문제 아닌 문제였다. 그래서 근무지가 배정되면 머리털이 쭈뼛쭈뼛 는 겨울바람을 피해 근처 빌라나 아파트 현관에 들어가 있거나 열려 있는 방범 초소에 들어가 전기난로를 피우고 시간을 때우곤 했다. 그런데 밤에는 그런 방법을 쓸 수가 없었다. 낮과 달리 밤에는 빌라와 아파트 출입자가 많아서 눈치가 보여서 안되고, 방범 초소에는 방범대원 아저씨들의 날이 눈 때문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울밤에 골목길이나 대로변에 있으면 뜨끈한 차가 생각이 나고 으레 배가 고파왔다. 그러면 근무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표적물을 찾고는 그리로 장소를 옮겼다. 우리가 옮긴 장소는 지하에 있는 주점의 출입구였다. 그러곤 주점 출입문 앞에 서서 들어가는 손님마다 일일이 불심검문을 했다. 불심검문을 하면 술을 먹으러 가던 사람들은 기분이 상해서 발길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30분 정도 불심검문을 하면 이윽고 주점 사장님이 나왔다. 사장님이 밖으로 나오는 이유는 딱 하나로, 손님들이 한참 들 시간인데 영 파리만 날리기 때문이어서 그 이유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장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출입문 앞에서 들어가는 손님들을 상대로 불심검문하는 우리들이었다. 그 장면을 확인한 사장님은 우리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말했다.

“좀 다른 데 가서 근무를 서시면 안될까요?”

그 말에 우린 이렇게 답했다.

“우리 오늘 근무지가 여깁니다. 그래서 옮길 수가 없습니다. 밤 12시까지는 여기서 근무를 서야 합니다.”

우리의 답에 사장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주점으로 들어가 따뜻한 커피와 함께 먹을 것을 가지고 나왔다. 우린 그 자리에 서서 사장이 주는 커피로 추위를 달래고 빵으로 허기를 달랬다. 먹기를 마치면 우린 답례로 주점 출입문에서 벗어나 주었다. 주인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면 화가 날 일이었겠지만 그렇게 우리는 매섭게 추운 겨울밤에 커피와 빵을 얻어먹었다.

이상이 내가 겨울밤에 커피와 빵을 얻어먹은 사례가 아닌 《표준국어대사전》 ‘서다’의 풀이 17개 가운데 많이 사용하는 ‘서다’의 예이다.

북측의 ‘서다’의 쓰임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아래의 북측 용례를 보면 낯설기도 하고 이게 무슨 말인지 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 많은 기술자들이 갱도가 붕락된다고, 그러면 광산이 {선다고} 반대했지만 명식은 그것을 방지할 수 있는 단시간 지체발파법을 주장했다는 것이다.《김영철: 새발파소리》

갱도가 무너졌는데 광산이 선다고 하니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에게 ‘광산이 선다’라는 말은 ‘광산이 생긴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갱도가 무너졌는데 광산이 생긴다는 것은 도무지 성립할 수 없는, 십분 이해하려고 애써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인 것이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도 않고 해석도 되지 않는 ‘많은 기술자들이 갱도가 붕락된다고, 그러면 광산이 {선다고} 반대했지만….’의 문장의 명확한 의미는 《조선말대사전》의 단 한줄의 풀이, ⑪번 풀이에 답이 있다.

《조선말대사전》

서다 [동](자)
① 바닥에서 우를 향하여 곧은 자세로 되다.
………………………
⑪ (문제 같은 것이) 설정되거나 나서다. ¶ 문제가 {서다}.

즉, ‘많은 기술자들이 갱도가 붕락된다고, 그러면 광산이 {선다고} 반대했지만….’에서의 ‘광산이 선다고’의 의미를 풀면 ‘광산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뜻인 것이다. 그래서 북측 용례에는 남측과 달리 ‘문제’와 같이 어울려서 ‘서다’가 쓰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 내 조금전에 면에다도 통보했지만 이제 되게 문제가 {설} 거요.《허여극: 봄하늘》

⁃ 나는 재혼에 대해서 분별없이 무조건 반대하거나 하진 않아. 그러나 나 개인에게 있어서는 약간 문제가 좀 달리 {선다고} 봐요.《리춘영: 새현실속에서》

⁃ 원, 이런 졸장부라구야. 좋은 일을 위해서 규정을 좀 어기는 건 문제가 {서지} 않아, 흘러가는 물에 그물질을 하기로서니 뭘 그리 떨고 있나.《송병준: 푸른잎》

⁃ 설계를 하면 나와 우리 부서와 기업소에는 얼마간 “리익”이지만 나아가서는 수천원의 국가돈이 허궁 달아나게 되오. 물론 수천원이란 우리 기업소와 나라살림살이에 비해볼 때 자리도 나지 않을 액수요. 또 후날에라도 문제가 {서면} 지시대로 했을 뿐인 나 혼자만 책임질 일은 아니요.《김원석: 참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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