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겸 / 동국대학교 북한학 석사

 

이번에는 우리에게 친숙하며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도시인 개성시의 지명 유래에 대해 살펴보겠다. 잘 알다시피 개성시 인근에는 남북 경제협력의 산실인 개성공단이 입지하며 2007~2008년 약 1년간 남북 관광사업이 진행된 바 있다. 우리에게 친숙하고도 가까운 개성시, 그 지명의 유래와 지역의 역사, 중요성에 대해 짚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 <그림 1> 최근의 개성시 지도 (자료: http://nk.joins.com)

 

▲ <그림 2> 고려시기 개성의 지도 (고려왕궁 북쪽으로 송악산이 위치한다). 자료:http://egloos.zum.com/botw/v/10674574

 

『향토대백과』에 의하면, 개성의 지명 유래는 고구려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당시 개성지역은 동비홀과 부소갑으로 불리었는데, ‘동비홀’은 개성을, ‘부소갑’은 송악산을 의미했다. 동비홀의 어원은 도비구루(두비구루)인데, 도비(두비)는 “열다”, 구루는 “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열린 성”“열려진 곳에 있는 성”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부속갑이라는 명칭은 부소산(송악산의 일부)과 관련해 생겨난 이름이다. 백제에서는 송악산이 청목산이나 청목령으로 불리었는데, 송악산에 푸른 소나무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기 신라시기에 들어와 비로소 송악산과 개성군의 호칭을 얻었다. 개성(開成)은 뜻풀이 그대로 “성을 연다”라는 의미이며, 고려 때 ‘동비홀’의 의미를 계승한 것으로 추측된다. 송악산(松岳山)도 뜻풀이 그대로 “소나무가 있는 큰 산”이라는 의미이며 과거의 뜻을 이어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개성시의 지명은 대부분 “열린 성”이라는 의미 혹은 송악산으로부터 유래한 것들이다.
 
고려 건국 1년 후인 919년 개성은 수도가 되었다. 그러면서 개성과 송악은 통합되었고, 개성은 개경, 황도, 황성, 경도 등으로 불리었다. 고려 왕조와 함께 500년 가까이 한민족의 수도로 군림하였다. 이 당시 개성은 수도일 뿐만 아니라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개성의 백성들은 특유의 상인기질을 발휘하여 전국적인 상업중심지로서 개성은 자리 잡는다. 이로부터 ‘개성상인’과 ‘개성인삼’(당시 주교역품)이라는 상징을 얻은 것이다.

조선 초기 수도가 한양으로 바뀌면서 개성은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고, 송도, 송경, 중경 혹은 개성이라고 불리었다. 송도, 송경이라는 이름들도 소나무가 많은 송악산을 끼고 있는 도읍지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과 함께 개성시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해방 후 개성시 지역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가 한국전쟁 후 북한 지역에 속하게 된다. 남한과의 접경지역이며 군사요충지라는 이유로 북한에서 개성시는 직할시 혹은 특급시로 특별대우를 받게 된다. 해방 직후 분단된 시기의 개성은 남북한 그리고 미소의 대립과 각축의 장소이기도 했다(박소영, 『개성 각쟁이의 사회주의 적응사』 참고).

이렇듯 독특한 역사와 개성(個性)을 가진 개성시는 우리에게, 그리고 남북한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도시이다. 허재완 교수(중앙대)는 남북한 갈등의 최소화와 효과적인 개발, 역사적 정통성 등의 이유로 향후 통일한국의 수도로서 개성시를 지목하기도 했다. 또한 개성시의 역사유적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그 역사와 유·무형의 자원, 지명에 대한 보다 많은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성시가 “열린 성”이라는 의미처럼 앞으로 남북한이 서로 마음을 열고 통일을 일구어나갈 공간이 되는 것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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