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숟가락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행동하기를 원한다. 어린 아이가 부모의 친절을 거부하고 어설프게 숟가락을 잡을 때부터 사람의 주체성은 학습과 사회적 경험을 통해 발전한다. 남의 생각과 결정에 자신을 맡겨버리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 사람은 나약하거나 정신이 미숙한 사람이다. 어찌 보면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주체성을 키워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왕이나 귀족 정도만이 주체적인 결정과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노예나 백성들은 그저 누군가가 결정한 사항에 따라가거나 부역해야 하는 존재였다. 왕이나 귀족에서 돈 많은 시민으로, 지식인으로 독립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개인성이 강해지고 개성이나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상과 문화가 만들어졌다.

이제 사람들은 전체주의나 개인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사회는 촌스럽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한껏 치장을 해 개성을 드러내며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한다. 옛날 왕이나 세도가가 지나가면 엎드려 머리를 처박는 모습이나 면장이나 경찰이 지나가면 허리를 굽혀 길을 비키는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국회의원이나 경찰이 지나가도 주눅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에 대항해 싸우고, 자신의 이익과 가치를 위해 국가사회와 싸운다. 개성과 다양성을 부추기는 상품이나 문화는 히트를 치고,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는 연대와 네트워크가 세상을 주도한다.

하지만 사람의 자주성을 얻기 위한 싸움은 진행형이다. 여전히 세상은 명령하고 억압하려는 소수의 권력자와 노예근성에 찌든 많은 사람들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독립성과 존엄성을 저해하는 방법도 고단위 술수로 바뀌었다. 돈과 권력을 좆는 공부 잘하는 인재들이 머리를 빌려주고, 단순 무식한 언론행동대원을 적절히 잘 활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모는 독립적이고 충분히 개성적인데, 머리는 노예근성으로 꽉 찬 기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미술도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왕과 귀족들만을 위한 미술에서 돈 많은 시민들의 미술로 발전했고, 지금은 이발소, 쫑쫑이 그림일지언정 집안 한 켠을 장식하고 있다. 미술의 발전은 사람의 인식수준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한다. 또한 자유롭고 개성적이며 다양성을 추구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무엇보다 주체적인 모습을 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술품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지만 미술을 대하는 태도나 감상하는 수준은 그야말로 초등학생 수준이다. 서양미술을 받아 들인지 오래됐지만 여전히 아그리파, 비너스 따위의 석고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의 문화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이다. 예술은 사람의 교양을 나타내는 주요한 척도 중에 하나다. 또한 대중문화의 뿌리이기도 하다.

나는 어린아이가 어설프게 숟가락을 잡고 흘리면서 밥을 먹는 그 본성을 사랑한다. 그 과정을 거쳐 아이는 누구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생명을 위해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미술은 삶의 목표가 아니다. 단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올바른 가치를 만들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그리고 연대와 관계를 통해 더 큰 물줄기를 만든다면 더욱 좋은 일이고.

북한의 석고상

▶연필소묘/노동청년/김광철/1995

이번에는 북한의 유명한 평양미대생의 습작을 몇 점 소개한다. 평양미대는 북한에서 가장 권위 있고 유명한 미술대학이다. 소개에 따르면 평양미술대학은 1947년 평양미술대학의 전신인 평양미술전문학교로 출발하여 지금은 7개의 학부와 30여 개의 강좌, 6개의 연구실을 가진 주체미술연구소와 3년제 박사원, 2년제 연구원, 미술관, 실습공장 등 완비된 교육체계와 조건을 갖추고 능력 있는 미술전문가를 키워내는 종합적인 미술인재양성기지이다.

특히 조선화학부는 지금까지 1800여명의 조선화 전문가를 키워냈고, <김일성상>계관인 2명, 노력영웅 2명, 인민미술가 16명, 공훈예술가 40여명, 그리고 국제.국내미술전람회의 금메달 수상자만들도 무려 90여명이나 배출한 곳이다. 평양미대 출신들이 지금의 북한 미술계를 이끌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필소묘/꽃파는 처녀/한창혁/1988

가끔 사람들이 `북한에도 석고상이 있어요?`라고 묻는다. 답은 `있다`이다.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석고상의 모습이 다를 뿐이다. 석고상을 그리는 것은 미술기초교육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흰 석고상은 명암연습을 하는데 도움이 되고, 인물모델을 사용하는 것보다 저렴하며, 안정적이고 반복적으로 연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우리 미술입시학원에서 사용하는 석고상이 서양의 그리이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을 조각한 것을 본뜬 모습이라면 북한의 석고상은 북한 사람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게 다르다. 기본기를 익히는 차원에서는 별 차이가 없지만 감성과 정서를 중요시하는 미술에서 어떤 대상을 그리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이를테면 노동자를 그리는 사람은 노동자와 노동에 가치를 두게 되고, 재벌을 그리는 사람은 돈에 관심이 많아지는 현상이 특별나지 않듯이 말이다.

▶연필소묘/과거의 어린 탄부/서삼혁/1995

북한은 자신들의 미술을 `주체미술`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북한의 주체사상과 미술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주체사상과 결합된 미술은 형식면에서 `조선화`로 잘 드러나며, 내용면에서는 `당성, 인민성, 계급성` 따위로 구현된다.

미술대학 초급생들이 주로 활용하는 석고상의 주인공은 원구나 사각기둥, 삼각뿔 따위의 도형들과 손 모양의 석고, 눈 모양의 석고상도 있지만, 인물에서는 노동자, 노력영웅, 꽃파는 처녀상, 과거의 어린 탄부상과 같이 주제의식이 강한 석고상을 주로 활용한다. 우리나라에도 서양얼굴의 석고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입시학원을 가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석굴암의 금강역사와 세종대왕도 석고상으로 나와있다.

북한 미대생이 그린 습작을 보면 기초소묘를 매우 중시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소묘는 사물의 형태와 명암, 구도, 공간감, 원근감을 익히는데 필수적인 과정이면서 다른 매체 즉, 조각, 판화, 디자인 따위의 기본기 역할도 한다. 결국 사실적인 기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북한미술의 특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미술은 사람의 감성과 정서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릴 적 서양인의 석고상을 그리면서 만들어진 정서와 미감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마치 옛날에 들었던 팝송에 지금도 친근감이 가듯이 말이다. 이 땅에 살면서 서양인의 얼굴을 선호하는 미감이 판을 친다면 우리 누이와 어머니와 형제의 얼굴을 어떻게 보일까?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