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대 / 동국대 북한학 박사수료


2000년 9월 13일부터 21일까지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 일곱 번째 평양(국제)영화제가 열렸다. 축전조직위원회 위원장인 강능수 문화상은 개막사에서, “일곱 번째 영화제가 지난 6월 북남공동선언의 발표로 통일의 앞길이 열리고, 자국의 국제적 권위가 높아지는 시기에 진행된다”고 하였다. 북한은 1990년대에 ‘형제국’이라고 칭했던 사회주의권의 붕괴, 지도자의 사망, 고난의 행군, 사회주의 강행군 등을 거쳤다. 암울했던 시기를 접고, 2000년 들어 주변국과의 관계 회복에 공을 들이면서 변화를 모색하였다.
 
5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중국을 비공식 방문해 강택민 주석과 회담을 했다. 6월에는 남북한의 지도자가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얼굴을 마주했다. 7월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였다. 이전까지 소련과 러시아의 최고지도자가 북한을 방문한 사례는 없었다. 소련 붕괴 후 소원했던 북한과 러시아가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4월과 8월에는 각 당국자가 평양과 일본을 오가며 북·일 교섭을 진행했다. 물론 이러한 북한의 움직임이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얼어붙었던 남북관계와 대외관계의 분위기 쇄신을 위한 신호탄임에는 분명했다. 또한, 2000년은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이었다. 축전조직위원회 위원장의 개막사처럼 ‘제7차 평양영화축전’은 이전보다 좋은 환경에서 개최되었다.

참가국은 30여 나라, 출품작은 백여 편으로 직전 대회보다 참가국 규모의 큰 변화는 없지만, 작품 수는 30~40% 증가하였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일본 영화가 처음으로 출품되어 북한 주민에게 공개되었다. 야마다 요지(山田洋次, 1931년 9월 13일~ )가 연출한 <학교>는 낙원영화관에서 17일 북한 관객들을 만났다. 18일에는 <남자는 괴로워: 하이비스커스꽃>이 상영되었다. 총 6편의 일본영화가 일반 극장에 소개되었고 관객들은 자막이 없는 대신, 남녀배우 한 쌍이 대사를 통역해주는 방식으로 영화를 관람했다. 북한에서의 일본 영화 상영은 축전조직위원회의 요청으로 성사되었다.

▲ 제7차 평양(국제)영화제에서 북한 영화 <사랑의 대지>가 ‘여우주연상’과 ‘심사위원회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영예의 대상인 ‘횃불 금상’에 이란 영화 <잃어버린 사랑>이, ‘횃불 은상’과 ‘횃불 동상’엔 이집트 영화 <충격>과 중국의 <국가>가 각각 차지했다. 북한은 <사랑의 대지>가 ‘여우주연상’과 ‘심사위원회 특별상’을 수상했다. 1999년작 <사랑의 대지>는 재일조선인 출신의 한정옥(22세)과 이를 간호하는 김귀녀(27세)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한정옥은 일본의 조선학교 거주 당시 일본 불량배에게 폭행을 당해 상처를 담고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녀는 어머니마저 없다. 영화는 보건의료 분야에서 모성적인 사랑으로 치료하는 김귀녀를 부각하고 있다.

영화제 개최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북한 김일성이 <남자는 괴로워> 등의 일본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일본 감독과 영화를 초청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일곱 번째 영화제는 김일성 사후인 2000년에 열려 지도자의 개인적 취향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북한과 일본이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상황이었기에 북한 당국이 영화제를 하나의 매개체로 보았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야 할 것이다. 일본 감독을 자국에 초청했으니 의례적으로 양국 간의 민감한 부분은 배제할 수도 있지만 <사랑의 대지>는 일본 내에서 재일조선인들의 억압과 차별, 멸시를 다루고 있다. 심지어 영화제에서 2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자신들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북한이라는 나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조선의 훌륭한 딸>이 ‘기록 및 단편영화 부문’에서 영화문학상을 받았다.

끝으로 북한은 <조선의 훌륭한 딸>이 ‘기록 및 단편영화 부문’에서 영화문학상을 받았다. 영화는 1998년 8월 29일 스페인에서 열린 제7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마라톤 우승자 정성옥 선수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당시 북한은 정성옥 선수의 우승을 대포동 1호(=백두산 1호, 로켓명으로는 광명성 1호) 발사와 더불어 놀랄만한 사건으로 소개하였다. 정 선수는 북한 체육인으로는 처음으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우승날인 8월 29일은 공교롭게도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경술국치일(1910년 8월 29일)이라 선전 효과는 배가 되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겠지만 유독 이번 영화제의 수상작들은 ‘일본’과 관련이 깊다. 전체적으로 보면 2000년 들어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도 시도하는 등 1990년대와는 다른 북한 당국의 의지가 엿보인다. 영화제에서도 일부 변화가 감지되었다. 2002년에는 또 어떤 모습일까?

다음에는 2002년 9월 4일부터 9월 13일까지 열린 제8차 평양(국제)영화제를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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