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돌을 맞아, 대전지역에서도 갖가지 행사들이 마련된 가운데,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피토하는 증언을 듣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8월 14일, 대전시청 북문 건너편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해방에서 통일로'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대전시민 통일한마당’이 바로 그 현장이다.
지금도 복수의 칼날을 품고 살아...

무대에 오른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 김한수 할아버지(97세, 대덕구 와동 거주)의 첫 목소리다. 100세를 앞둔 분의 목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우렁차고, 정정했다.
1918년에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난 김한수 할아버지는 1944년 8월 고향에서 나가사키에 있는 미쓰비시 조선소로 강제 징용당해 중노동과 인간 이하의 노예생활을 강요받았다.
먼저 김한수 할아버지는 강제징용 당했던 과정과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했던 강제노동을 증언했다. 김한수 할아버지는 전시 무기인 항공모함 제작과정에 동원됐다. 오늘날 일본에서 미쓰비시가 이처럼 크기까지는 김한수 할아버지처럼 대가없이 강제로 끌려간 노동자들의 노동의 댓가가 바탕이 된 것이다.
그곳에서의 음식은 상상할 수 없이 비인간적이었다. 그곳에서 먹었던 음식에 대해 묻자, 김한수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개들한테도 그런 음식을 주지 않습니다. 기름을 짜고 남은 깻묵. 그것도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그것을 닦아가지고서는 찝니다. 쪄가지고 도시락통에 담는데, 그게 푸스럭 푸스럭 해가지고 기울여 트리면 주르륵 모래와 같이 쏟아집니다.”
김한수 할아버지의 증언을 듣던 시민들은 일본의 비인간적인 행태에 분노의 탄식을 터트렸다.
이어 김한수 할아버지는 “그들(일본)이 한국인을 끌고 온 것은 일을 시키기 위해서 일 뿐”이라며, “한국인이 죽으면 내버리고, 죽지 않게만 하고 일을 시켜 먹었다”고 말하며, “지금도 복수의 칼날을 품고 산다”고 말해 일본에 대한 복수심이 얼마나 큰지 짐작케 했다.
조선소 공장에서 일하던 중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원폭피해를 당하던 일을 김한수 할아버지가 말할 때에는 증언을 듣던 시민들이 한층 더 숙연해졌다.
미쓰비시 조선소의 자이언트 크레인을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하고, 일본이 중국인이나 미국 포로들을 강제로 일을 시킨 것은 잘 못이지만,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사람들의 경우는 경우가 다르다며 사과를 거부한 사실에 대해 생각을 묻자 강제징용 피해 당사자인 김한수 할아버지는 “가슴이 메어져서 차마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에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전했다.
“왜놈의 악독한 손에 끌려가서 개나 돼지도 먹지 않는 음식을 먹어가면서 강요당했던 피폭자의 한사람으로 여러분에게 간절히 호소하고 싶은 말씀은 내 나라 내 방어는 내 힘으로라는 기본정신을 잊지 마세요. 이준 열사와 같은 그런 분과 같이 국권을 훼손당했을 때에는 배를 갈라 피를 뿜을 수 있는 그런 용맹스럽고, 자랑스러운 젊은이가 되어주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강제징용 지옥섬을 관광지로? 일본은 죄받아야 마땅
김한수 할아버지에 이어 증언의 무대에 오른 분은 지옥의 섬 하시마(일명 군함도)에 끌려가 석탄을 캐는 강제노동에 징용됐던 최장섭 할아버지(87세, 동구 판암동 거주)였다.
16살의 어린 나이로 1943년에 하시마 섬의 탄광에 끌려가게 된 최장섭 할아버지는 그곳에서의 2년 10개월간의 탄광생활을 ‘철창 없는 감옥생활’로 표현했다.
최장섭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국내로 강제징용 당했다가 손가락이 잘려 돌아왔고, 아버지 대신에 형님을 강제징용하려 하자 형님은 달아났고, 이에 16살의 막내인 최장섭 할아버지가 일본 강제징용에 끌려갔다.

최장섭 할아버지는 강제징용 당했던 하시마 섬의 해저 1000m 깊이의 탄광에서 가장 끝인 ‘막장’에서 일을 했다.
최장섭 할아버지는 그곳에서의 삶을 “(탄광 속 고열로 인해)겨울 여름 없이 팬티 하나 차고, 콩딩이 밥 하나 이것으로 살아왔다”며 “(하시마 섬은)사방이 바다여서 도망갈 데 없지만, 목숨 걸고 바다에 몸을 던질 만큼 하루하루가 지겨운 나날”이었다고 회고했다.
최장섭 할아버지는 탄광에서 일을 하던 중 쏟아진 돌에 깔려 다치기도 했다. 다행히 최장섭 할아버지는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 왔지만, 돌아오지 못하거나, 죽은 경우도 많았다.
현장에 있던 시민들은 할아버지의 증언을 조용히 경청했고, 고된 강제징용 생활을 들을 때에는 눈물을 글썽였다.
일본이 하시마 섬을 유네스코 문화제로 등록한 것에 대해서 최장섭 할아버지는 “일본이 우리 (강제징용)노동자들에게는 묻지도 안하고 관광지를 만든다는 것은 죄받아야 마땅하다”며 일본을 강하게 비난했다.
증언을 들은 김희정 시인는 “그분(강제징용피해자)들의 지옥 같은 곳에서의 경험과 삶을 어찌 짧은 시간 내에, 그것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면서도 “할아버지들은 울분을 터트리지만, 그것이 연민으로 그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역사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젊은 사람들에게는 할아버지들의 피토하는 증언들이 역사의식으로 발전시키기 어려운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일본에게 항의문구 하나 써서 보내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

“일본 아베 총리가 ‘미국하고 중국하고는 사죄를 하되, 한국은 일단 논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우리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정부요인들은... 그 말을 듣고서 일본에게 항의문구하나 써서 보내지 못하고, 우리 국민이 못 먹고, 못 입고 모아서 보내는 혈세만 받아먹고 그 자리에서 앉아서 국회의원이다, 국무의원이다 이러고 있는 겁니까?”
“국회의원 여러분. 좀 정신 좀 차리세요들. 주책없는 인간들, 도대체가 뭐하는 거에요. 이준 열사와 같이 할복자살은 못할망정 그 일본놈이 하는 행위를 듣고선 넋 놓고 그 자리에 앉아서 뭐 국무의원으로 뭐하는 거에요 도대체가... 그렇게 못하겠으면 전부 다 그 자리에 내려놓고, 김한수에게 일임해요. 내 배를 갈라서 피를 뿌리고서나 복수를 하고서 죽을 테니까? 도대체가 정부에 나갈 때에는 일단 마지막 돌아갈 때에 그때 공개할 수 있는 유서 한장이라도 써놓고 그 자리에 나가요들...”
김한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공원에 쩌렁쩌렁 울렸고, 참가자들은 박수로 환호했다.
일본군 ‘위안부’ 더불어 강제징용도 일본 사죄 받아내야
8월 14일은 광복절을 하루 앞둔 날이기도 하지만,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기도 하다.
‘평화나비 대전행동’ 관계자는 “지난 3월 1일 평화의 소녀상 제막 이후, 8.15광복절과 위안부 기림일을 맞아 소녀상 앞에서 뜻 깊은 통일한마당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다음 달 9일부터 매달 둘째 주 수요일에 대전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수요집회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덧붙여 “강제징용 문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반드시 받아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대전시민 300여명이 참여했으며, 마지막에는 시민대합창으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함께 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