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3박 4일간의 방북 일정을 마치고 8일 돌아왔습니다. 이 여사는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민간 신분인 저는 이번 방북에 어떠한 공식 업무도 부여받지 않았다”면서도 “6.15정신을 기리며 키우는데 일조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모든 일정을 소화했다”고 의미심장하게 밝혔습니다.

그런데 일각에서 이 여사와 김정은 제1위원장과의 면담이 이뤄지지 않은 것을 두고 이번 방북의 의미를 폄하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이 여사의 방북이 지난해 12월 김 제1위원장의 친서 초청을 통해 추진됐다는 점에서 면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상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 대통령을 숙소인 백화원까지 안내하면서 “공산주의자도 도덕이 있다”고는 “제가 나이가 어리고 하니 내일 찾아와서 대통령님을 만나겠다”라고 한 ‘예의바른’ 말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김 제1위원장이 이 여사를 만나는 게 당연한 도리(?)라고까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면담 불발은 이 여사의 방북 때부터 예정돼 있었습니다. 단순히 현 시기 경색된 남북관계 때문만은 아닙니다. 원래 이 여사의 방북 건은 오래 전부터 북측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남겨둔 카드였습니다. 북측이 초청을 했으며 이 여사의 방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남측의 허락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사가 귀국 기자회견에서 “이번 방북은 박근혜 대통령의 배려로 가능했으며,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편안하고 뜻있는 여정을 마쳤다”고 말한 것은 그 이유입니다.

따라서 이 여사의 방북은 남과 북이 관계개선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카드가 생활력을 갖기 위해서는 박 대통령이 북으로 향하는 이 여사를 만났어야 합니다. 만나서 대북 메시지를 건넸으면 좋았을 것이고, 적어도 고령인 이 여사의 건강과 장도를 비는 정성이라도 보였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김 제1위원장은 이 여사를 흔쾌히 맞이했을 것입니다.

북측으로서는 구순이 넘은 노(老)여사를 멀리 보내면서 만나지도 않고 아무런 메시지도 주지 않은 남측에 서운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남측 당국은 이 여사의 방북을 ‘개인 자격’이라고 선까지 그었습니다. 북측은 뻔한 기회마저 살리지 않는 남측에 대해 대화를 원치 않는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이런 판에 김 제1위원장이 나서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여사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대남 화해 메시지를 던지는 것인데 남측이 화답할 리가 없다고 본 것이지요.

그래서 나온 묘안이 제3자를 통한 안부와 배려입니다. 김대중평화센터가 밝힌 바에 따르면, 김 제1위원장이 이 여사와 모든 일정을 함께한 맹경일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통해 ‘이희호 여사님 평양 방문을 환영한다’는 인사말을 전하면서 ‘이희호 여사님은 선대 김정일 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6.15선언을 하신 고결한 분이기에 정성껏 편히 모시고, 여사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해드리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김 제1위원장은 제3자를 내세움으로써, 초청자로서의 면을 세워 이 여사에게 최대한의 배려와 정중함을 보이면서도 남측 당국한테는 ‘남측이 원하지 않기에 우리도 대화할 의지가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입니다. 이 여사의 방북으로 6.15공동선언의 정신은 이어졌지만, 박근혜 정부에서의 남북관계 개선은 요원해졌음이 확인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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