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 전국 순회 통일콘서트를 진행하다 강제출국 당한 재미동포 신은미 씨와 남북경협기업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유동호)가 올해의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사장 임동원)은 재미동포 신은미 씨와 남북경협기업비상대책위원회를 제17회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자로 선정하고 29일 오전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3층 청암홀에서 시상식을 개최, 이들에게 상패와 상금을 수여했다.
고광헌 심사위원장은 “신은미 씨는 북한 동포들의 소박한 일상을 널리 알려 남북 화해협력 필요성에 대한 인식의 저변을 넓힌 게 주요 공적”이라며, “신 씨의 활동은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라는 여행기에 압축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북한 주민들의 일상과 정서를 특유의 쉬운 생활언어로 전달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고 말했다.
또 남북경협 기업인들은 “5.24조치의 가장 큰 직접 피해자이며, 대부분은 중소기업가들로 여전히 경영사정이 어렵지만 피해구제는 물론 전반적인 남북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활동에 여러 해 동안 헌신하고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다”고 말했다.
다만 5.24조치의 철회와 남북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다양한 활동에는 비대위뿐만 아니라 다른 남북경협 기업단체들도 참여했다는 사정을 고려해 ‘남북경협 회복을 촉구한 사람들’로 시상 대상을 넓히되 대표 수상단체로 ‘남북경협비대위’를 지정했다고 덧붙였다.
강제출국을 당한 뒤 5년간 귀국할 수 없는 처지인 신은미 씨는 영상메시지로 수상 소감과 발언을 전해왔다.
신씨는 자신이 쓴 두 권의 북한 기행문은 ‘통일이야기’가 아닌 ‘사랑이야기’이며, ‘민족의 화합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은 북한을 여행하면서 북녘의 동포들을 사랑하게 된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이라고 겸손하게 소회를 밝혔다.
그는 비록 모국에서 강제출국 당했지만 해외 동포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 남과 북의 오작교 역할을 할 것이며, 앞으로도 수양가족을 만나기 위해 기회가 닿는 대로 북한을 방문해 ‘사랑 이야기’를 전하겠다고 말했다.
유동호 남북경협기업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5.24조치 이후 지난 5년 간 “하루아침에 통일의 주체에서 이방인으로, 평화의 사도에서 악의 세력과 동조한 역도로 전락했으며, 집에선 무능한 아빠가 되었고 신용으로 살아가는 사회에선 불량한 빨간 줄이 그어졌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냉대 속에 어느 순간 3류 인생으로 몰락했다”며 회고하고 “평생을 가방 들고 기업만 하던 남북경협인들이 익숙하지 않은 손 피켓과 주먹을 쥐고 목이 터져라 5.24조치 해제를 외쳤다”고 말했다.
유 위원장은 “지난 2003년 5월 비대위를 출범시킨 후 지난해 5.24조치 4주기 당시 처음으로 7개 단체가 연대를 시작했고 올해 개최한 ‘5.24 조치 해제를 위한 문화제’에는 100여개 단체가 뜻을 모았다”고 설명하면서 단체명을 일일이 열거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축사에서 “신은미 선생은 북한 여행기에서 북한 사회의 명과 암, 그리고 허와 실을 있는 그대로 소개했다. 북한을 40년 가까이 직업적으로 연구해 온 내가 볼 때 그 책은 절대로 북한을 찬양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북한 바로알기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고 신 씨를 적극 변호했다.
정 전 장관은 그렇지 않고서야 문화체육관광부와 통일부가 이 책을 우수도서로 선정할 수 없었을 것이며, 만약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이 있었다면 검찰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지 못하고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출국처분을 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번 일로 해서 한국 사회의 ‘종북몰이’에 편향성이 강하며, 법적 근거 없는 정치적 공세에 불과하다는 점을 오히려 검찰이 역설적으로 입증해 주었다며, 이것만으로도 신 씨의 수상자격이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또 남북경협 비대위 등 경협인들이 남북경협 부활을 위해 외롭고 힘겨운 투쟁을 벌여왔다며 격려하고, 한겨레통일문화상 하나로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위로가 되기에는 부족하겠지만 우리 사회의 깨어있는 지성들이 경협인들의 편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했다.
정영무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는 “한겨레통일문화상은 통일의 길에 남들보다 앞서가는 분들에게 드리는 한 송이 꽃, 헌화”라며 상패에 새겨진 통일의 꽃에 대해 설명하고 “축하의 의미도 있지만 그 길을 가는 도중 입었을 몸과 마음의 상처를 감싸주는 위로의 의미가 담겨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1999년 제정된 한겨레통일문화상은 첫해 고 윤이상 선생을 시작으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4회, 2002년), 리영희(9회, 2007년), 백낙청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명예대표(2009년, 11회) 등의 역대 수상자들을 배출했으며, 지난해에는 정세현 원광대학교 총장(당시)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날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이 신은미 씨에 대한 시상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며 시상식장인 한겨레신문사 앞에서 농성을 벌이는 등 해프닝이 있었으나 행사는 별다른 불상사 없이 끝났다.
한편, 한겨레신문사 노조는 이들 일부 보수단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신은미 씨 등에 대한 시상을 강행한 한겨레통일문화재단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힌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신은미씨가 영상으로 보내온 수상자 발언> 안녕하세요. 신은미입니다. 먼저, 통일에 대해 문외한인 제게 이런 큰 상을 내려주신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임동원 이사장님을 비롯하여 저를 후보자로 추천해 주신 여러 단체와 개인,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처럼 뜻 깊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직접 참석하지 못하고 영상으로 대신하게 된 것을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처음 접하고 저는 ‘두려움’과 함께 ‘과연 제가 이런 큰 상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쓴 두 권의 북한 기행문, 『재미동표 아줌마, 북한에 가다-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 그리고 『재미동표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행복한 여행』은 ‘통일 이야기’가 아닌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민족의 화합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저의 간절한 염원은 북한을 여행하며 북녘의 동포들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2011년 어느 여름날, 인터넷을 통해 다음 여행지를 찾던 남편은 북한이 남한 국적자를 제외한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관광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북한도 우리나라 반쪽 땅이니 북한을 한번 여행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게 제의했습니다. 북한이라면 달나라보다도 낯설게 느꼈던 저는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으며 마침내 2011년 10월, 북한여행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내키기 않는 마음에 호기심만 품고 따라간 북한 여행은 충격 그 자체였으며, 다소 교만하고 냉소적인 마음으로 떠난 북녘 땅으로의 여행을 통해 저는 저의 거짓 신앙과 지난 날 조국에 대해 생각 없이 살아온 이기적이고도 무심했던 제 삶을 뒤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태어나 매우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개신교 목사님이셨던 외할아버지께서는 제헌 국회의원으로서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킨 대표적인 국회의원이셨으며, 저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육군 장교로 참전해 조국의 최북단까지 진군했던 군인이셨습니다. 자연스레 저 역시 지극히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그나마 제가 남편을 따라 북한에 여행을 간 것도, ‘그들은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하는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여러 차례의 여행으로 확인한 것은 오히려 ‘어쩌면 우리와 이토록 똑 같을까’라는 동질감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나, 유적지를 참관할 때나, 인생의 희로애락을 얘기할 때나...그 무엇 하나 제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또한 동질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조국이 분단되어 있다는 생각에 슬픔은 배가되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민족의 비극적 운명을 체험하고, 민족애를 느꼈으며 통일에 대한 염원을 갖게 된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녘 동포들의 아픔과 힘겨움이 그들만의 아픔과 힘겨움이 아닌,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 우리 모두의 아픔이요 힘겨움임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첫 북한여행 때 금강산에서 만난 북녘의 아이들을 품안에 안고 사진을 찍으면서 마음속으로 속삭였던 말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남북의 사랑스런 아이들아, 너희들은 절대로 서로 총을 겨누지 마라, 손에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행복의 노래만 부르거라.” 북한을 여행한 지 이틀 만에 난생 처음으로 뜨거운 민족애가 가슴을 헤집고 나오는 순간이었습니다. 북녘 동포, 이들이야말로 분명 제가 사랑하고 보듬어 안아줘야 할 내 민족이요, 내 형제자매, 그리고 이웃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고 편협하기 그지없던 마음의 빗장을 부수고 활짝 열어젖히니, 어두웠던 곳곳을 환히 비춰주는 따사로운 빛줄기가 들어왔습니다. 진작 열어젖히지 못한, 미련하고 어리석었던 마음에는 아쉬움만이 가득했습니다. 저의 첫 번째 기행문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을 통해 뜨게 된 마음의 눈으로 써 내려간 글이었습니다. 슬픔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볼 때,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솟아남을 느꼈습니다. 사랑으로 바라보니 그 어떤 것도 굴절되거나 삐뚤어짐이 없고 어그러짐 없이 제 모습대로 보였습니다. 지금도 지나간 기억이 되살아나 미소를 짓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여행 중에 만난 따뜻한 북녘동포들에 대한 기억에 아직도 가슴이 뭉클하고, 스쳐 지나는 사이에 비친 그들의 가난에 지금도 가슴이 에이듯 슬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후 사람들이 제게 “북한은 어떤 나라냐”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답하곤 합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라고 말입니다. 북한여행을 통해 제게는 수양가족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이 이산가족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저의 두 번째 기행문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는 수양가족과 곧 태어날 수양 손주의 선물을 들고 그들의 집을 찾아가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행복한 여행’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저는 2011년 10월 첫 북한관광을 가기 전까지만 해도 민족이니, 동포니, 통일이니 하는 단어조차도 떠올려보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셨을 때, 저는 그 분의 방북 장면을 아무런 감동 없이 바라보았습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약간 불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리기 부끄러우나, 6.15선언이 무엇이라는 것도 북한여행을 통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이룩하신 6.15선언이 우리 민족의 운명에 얼마나 중요한 이정표라는 것을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깨달았으니 그저 저의 무지를 한탄할 뿐입니다. 저는 북녘을 여러 차례 여행하면서 분명히 확신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남과 북, 우리 겨레는 70년의 분단세월 동안, 생활의 양식만 달라졌을 뿐, 우리의 본질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민족적 정서를 그대로 공유하고 있으며, 우리는 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남과 북이 화해하고 서로 협력하여 통일조국으로 향하는 순간, 우리의 남과 북은 더 이상 서로에게 위협이나 골칫거리 상대가 아닌, 서로에게 축복이 되는 관계가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민족의 분단으로 인해 잠시 중단된 찬란한 우리의 역사를 다시 함께 써 내려 가는 가슴 벅찬 상황이 실현될 것입니다. 통일조국에서 살아갈 다수의 주인공은 저 같은 남과 북의 그리고 해외의 평범한 동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분단 장벽을 허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에게 쌓여있는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뜨리지 않은 상태에서 통일이란 한낱 꿈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인 우리는 서로를 향해 눈을 뜨고, 마음을 열고, 두려워 말고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미 마음으로는 통일된 조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 육체적으로는 나의 모국, 대한민국에 앞으로 5년간 갈 수 없는 상황이지만, 저와 한마음으로 민족의 화해와 평화적인 통일을 염원하는 모국의 동포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북녘에도 순박하고 정 많은 나의 형제들이 진정으로 우리 겨레가 하나되기를 저와 한 마음으로 소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록 모국에서 강제출국 당했지만, 해외동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제가 사는 이 곳 미국에서 해 나갈 것입니다. 남과 북이 다시 예전처럼 좋아질 때까지 남과 북의 오작교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조국을 떠나 살아가고 있는 해외동포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수양가족을 만나기 위해 기회가 닿는 대로 북한을 방문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 여러분들께 사랑의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오늘의 이 영광스런 ‘한겨레통일문화상’이 저에게 더 힘을 내어 조국을 사랑하라는 격려라 여기고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리-통일뉴스) |
<유동호 남북경협기업비상대책위 위원장 수상자 발언> (제공-한겨레통일문화재단) |
(추가-1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