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 4377년 경신(서기 1920년) 7월 군사훈련을 실시한 지 약 1년 만에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은 정규군 1,500명을 통솔하고 지방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신병모집과 무기입수에 분망(奔忙) 중이었으며 연성대장 이범석 장군은 사관졸업생 600명을 인솔하여 밤낮을 이어 맹훈련을 실시할 즈음 천만 뜻밖에도 중국 동북구 혼성여단장 맹부덕이 서대보 본영을 찾아와 말하기를 “현재 일본의 간섭과 항의가 자못 심하니 귀군(貴軍)은 길림성경(境)에서 떠나 산중으로 옮겨달라”고 하였다.

그것은 경신년에 이르기까지 동북만에 있는 우리 독립군 수는 급증하고 군비도 노령 해삼위를 통하여 다량 구입한 다음 일대(一大) 군단을 편성하였다는 사실을 탐지한 일본 육군성 당국이 크게 당황하여 소위 대토벌할 것을 결정하고 중국 동북군벌 장작림에게 다음과 같은 항의를 제기한 까닭이었다.

“중, 일 양국은 우호국임에도 불구하고 내면으로는 중국 영토 내에 있는 한인(韓人)을 도와 그들이 조직한 독립군대부대가 무장하고 일본에 항쟁하니 조선 내에서도 그 피해가 적지 않다. 이 사실은 중국 당국이 직접 간접으로 이들을 보호하는 결과인즉 우리는 부득이 중국을 상대로 무력행사를 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일본의 항의에 접한 중국 당국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부당한 내정간섭에 불쾌하였지마는 외교 방편 상 할 수 없이 일군에 협력하여 우리 광복군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이면으로는 아군을 보호하여 일군(日軍)의 눈에 띄지 않는 산중으로 피하도록 한 것이다.

▲ 백야 김좌진(金佐鎭, 1889.11.24~1930.1.24)
 [사진출처 - 대종교]
이에 우리 광복군은 중국이 일본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처지를 이해하고 진지(陣地)의 이동을 약속한 다음 백두산 동북록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때 곧 경신년 9월초에 북로군정서는 군사이동단을 조직하여 단장에 이범석 장군을 임명하고 장병들의 동복(冬服)을 만들면서 이동 준비에 분망하던 중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훈춘대학살사건이 일어났다.

때마침 시베리아에 출정하였던 일군(日軍) 제19사단이 장고봉을 넘어 남하하는 중에 있고 제21사단은 나남(羅南)으로부터 북상하여 왕청현에 있는 북로군정서를 목표로 양면협공작전을 계획하고 진격 중에 있었다.

이 사실을 탐지한 우리 광복군은 동년 9월 7일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하여 일본군 3대대가 무산으로부터 내습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백운평 전방 삼림지역에 유리한 지형을 택하여 적군이 진입할 좌우산협에 백발백중하는 정포(精砲) 600명을 十자 진으로 매복하고 대기하였다

이러한 아군의 동향을 모르는 적은 삼면으로 청산리를 포위하고 기마1부대는 벌써 아군이 잠복하고 있는 백운평 삼림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아군은 편의대의 정찰로 적의 병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또한 적이 체류하고 있는 부근 주민으로 하여금 아군의 병력은 극히 미약하고 투지가 없고 사기가 저상(沮喪)돼 있다고 적에게 허위 선전하여 적으로 하여금 방심케 하였다.

그리하여 동월 10일 북로군정서의 광복군은 2대로 재편성하여 제1지대는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이 직접 지휘하고 제2지대는 연성대장 이범석 장군이 지휘했다.

▲ 철기 이범석(李範奭, 1900~1972)
[사진출처 - 대종교]
동 10일 조조(早朝)에 적 전위대는 무심코 이 十자망을 지나려다가 적전(敵前) 지휘 이범석 장군의 선발포로 전도하던 적장이 꺼꾸러지자 뇌우같이 퍼붓는 포환에 2천 수백명의 적 전위대는 일시에 전멸되었다.

그러나 적의 전군(全軍)이 박멸된 것이 아니므로 또다시 공격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은 제2지대에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리었다.

一. 봉미구로부터 들어오는 적군이 약 1시간 후면 도착될 것이오 우리 군의 퇴로는 차단될 위험성이 있으니 삼도구 방면으로 철퇴할 것
二. 제2지대는 원진지에서 항전을 계속하고 제1지대를 전선에서 엄호하여 전장에서 완전 퇴출케 한 다음 철퇴할 것
三. 제2지대는 오늘밤 2시전으로 갑산촌에 도착할 것(거리 약160리)

이리하여 아군은 승리의 철군에 성공하여 이날 밤 2시 40분경에 갑산에 당도하였다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과 나중소 참모장과 연성대장 이범석 장군은 다시 작전계획을 세우고 새벽을 기다리어 적을 공격키로 하였으니 당시 천수평은 우리 교포들의 거주촌락인 바 적기병대 12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5시를 기하여 적에게 총공격을 가하니 사살된 적의 시체와 사상한 마시(馬屍)는 구릉을 이루었고 얼음과 서리로 은세계를 이루었던 천수평 일대는 순식간에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변하였다.

이에 앞서 아군이 청산리를 철수한 후 양면으로 내공하던 적병 간에 서로 오인하고 자상(自相) 사격 끝에 6, 70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청산리와 천수평의 양차(兩次)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아군은 적정(敵情)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얻었으니 그것은 적중대장 도전(島田)이 가납(加納) 연대장에게 보내는 보고서이다.

“19사단사령부는 어랑촌에 주둔해 있고 도전중대가 천수평으로 온 것은 이도구의 경비를 담당하기 위함이다.”

이는 아군이 적에게 섬멸당할 위기에서 구출된 천행의 정보이다 이 사실을 안 아군은 즉시 어랑촌 전방고지로 이동하여 촌각을 다투면서 마록구 고지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적은 전(全)사단병력으로 맹렬히 공격하여 오니 10대 1의 이 치열한 혈전에서 적의 포탄이 총사령관의 군모를 벗기었고 적의 탄환이 이범석 장군의 군도(軍刀)를 두동강으로 단절시키었으며 우리 기관총대장 최인걸은 사격수의 태반이 사상하고 기관총을 실은 말이 쓰러지므로 자기 몸에 기관총을 결속하고 운명을 같이할 비장한 준비까지 하였다.

이 격전에서 협로를 사수하던 아군 병사 40명이 전사하고 적 사상자수는 연대장 가납 이하 일 천여 명이오 2주야를 포연탄우(砲煙彈雨)로 천지를 불분케하던 대혈전도 승리는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청산리대혈전은 그 막을 내렸다.

이 전투에 동원된 적의 병력은 3개 여단이오 아군은 비전투원까지 합하여 불과 1,800명이며 적의 사상자수는 3,300여 명인데 비해 아군 측 전사자는 미미했으니 이는 실로 세계전쟁사상 그 유례가 없는 이과적중(以寡敵衆)의 대혈전이었다.

이 혈전의 승리는 사관연성소 졸업생인 청년 사졸(士卒)의 광복 일념에서의 의기충천한 용전분투와 아울러 주수(主帥)의 신출귀몰하고도 용의주도한 전략에도 힘입었으려니와 무엇보다도 이는 한갖 인력에 의함이 아니오 이 전투원이 대교의 교우인지라 애끊는 민족의 분노가 하늘에 사무쳐 한배검의 음우(陰佑)와 묵시가운데 대승을 거둔 것으로 확신한다.

당시 아군측의 임전(臨戰)조직은 다음과 같다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나중소
부관: 박영희
편성대장: 이범석
종군교관: 이민화
종군교관: 백종렬
종군교관: 한달원
종군교관: 김훈
대대장대리 이중대장: 홍충희
제1중대장: 강화린
제2중대장: 김찬수
제4중대장: 오상세
제1중대 일소대장: 강승경
제1중대 이소대장: 신희경
제2중대 일소대장: 채춘
제2중대 이소대장: 김명하
제3중대 일소대장: 이익구
제3중대 이소대장: 정면수
제4중대 일소대장: 김동변
제4중대 이소대장: 이운강
기관총대 일소대장: 김덕선
기관총대 이소대장: 최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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