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일본의 동태를 살피고 온 조선통신사들은 각각 다른 의견을 제출했고, 황윤길은 “반드시 머지않아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통신사들이 가지고 온 히데요시의 국서 즉 왜서(倭書)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로 쳐들어가겠다”는 대목까지 있었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로써 피터 로지가 지적했듯이 1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사건, 임진왜란이 1592년에 발발했다.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에서 발췌)

조선시대 임진왜란이나 양대 호란을 지금 되짚어보면 중요한 외교적 실책들을 누구나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아가던 조선의 관료들이나 백성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곤 중대한 외교적 신호들을 제때 간파하지 못한 채 평소 관성대로 정책을 펴고 일상을 살아갔던 것이다. 심지어 황윤길의 명백한 경고나 히데요시의 노골적 침략의도도 자기 편할 대로 해석하고 만다. 유성룡은 나중에 <징비록>에서 “이때 국가는 오랫동안 승평(昇平)한 세월이 흐를 때이다”라고 변명했다.

▲ 한국은 OSJD 제 10차 국제철도물류회의를 서울에 유치하는 등 정회원 가입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북한과 중국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사진은 5월 28일 OSJD 서울회의 모습. [사진 출처 - 국토교통부 홈페이지]
지난 4일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국제철도협력기구(OSJD)의 제43차 장관회의에서 한국의 OSJD 회원국 승인 여부를 묻는 투표에서 북한이 반대표를 던져 가입이 무산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투표 하루 전날 박근혜 대통령이 참관한 가운데 500km 이상 사거리의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했으니 북한의 반대 쯤은 눈하나 깜짝할 사안도 못 된다. 물론, 겉보기와 달리 지난 4월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OSJD 사장단회의에서나 6월 몽골 장관회의에서 북한에 찬성표를 달라고 사정사정하기도 했다지만.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이나 대북정책이 각 기관별로 손발이 안 맞고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정작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대한 신호는 다른데 있다. 28개 OSJD 회원국 중에 북한을 제외하곤 러시아도 몽골도 모두 찬성했지만 중국만이 유일하게 기권했다는 점이다. 사실상 반대표를 던진 셈이다. 남북 철도연결 사업에 이해관계가 가장 큰 나라는 어쨌든 중국임에 틀림없다. 남북을 관통하는 철도가 열리면 러시아로도 연결되지만 중국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중국이 왜 한국의 OSJD 가입을 사실상 비토했을까?

▲ OSJD 한국 가입 투표 전날인 지난 3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방과학연구소(ADD) 안흥시험장에서 사거리 500㎞ 이상의 탄도미사일(현무-2B)의 발사모습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홈페이지]
중국의 한국 OSJD 회원국 승인 기권은 중대하고 심각한 외교적 신호다. 지금과 같은 대외 행보를 보이는 한국은 미국, 일본과 손잡고 영원히 해양세력, 섬나라에 머물러 있으라는 경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SJD 가입 실패 당일 배포한 국토교통부의 보도자료를 보면 중국의 기권에 대한 진지한 반성은 없다. 심지어 “북한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한국을 지지하는 만큼 조속한 시일 내에 정회원 가입이 가능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큰소리쳤다. 북한만 문제라는 식이다.

중국은 주한미군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 체제 구축을 사실상 용인하고 있는 한국에게 여러 차례 경고를 보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의 직접적 경고를 비롯한 중국 고위층의 잇단 공개적 신호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미국과 손잡고 버젓이 대중국 군사적 포위망 구축에 나서고 있다. 사드 배치 명분이야 북한의 군사적 위협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 구축이라는 사실은 국제적 상식에 속한다.

더구나 OSJD 투표 하루 전날인 3일 박근혜 대통령은 사거리 500㎞ 이상인 탄도미사일인 개량형 현무2B의 시험발사 현장을 지켜보았다. 2012년 개정한 한·미 미사일지침에 따르면 한국은 사거리 800㎞에 탄두 중량 500㎏까지 늘릴 수 있는 상황이다. 한반도의 종심이 1,000㎞ 내외이고 북한지역은 500㎞ 내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를 지켜보는 중국의 심경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최근 한국 정부는 미국의 압력과 외교정책 실패를 우려해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는 물론 군사적 협력까지 서두르고 있다. 중국이 일본과 정상외교를 펴는 것은 미국으로부터 일본을 조금이라도 떼어놓으려는 중국의 외교구상에 따른 것이겠지만, 한국 정부의 일본 접근은 미국의 압박에 더해 외교적 고립을 자초했다는 여론을 우려해 서둘러 관계정상화에 나서는 꼴이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이 직집 나서 그간 한일관계의 발목을 잡았던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현재 협상의 마지막 단계에 있다”고 앞장서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미국이 바라는 한.미.일 3각 군사동맹 강화는 이제 시간문제일 뿐으로 보인다.

▲ 미국의 세계 최대 핵잠수함인 '미시간호'가 23일 오후 해군 부산기지에 입항했다. 주한미군 측은 장병휴식 일환이라고 했지만 훈련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사진 출처-미국 태평양사령부 홈페이지]
유엔의 북한인권사무소가 서울에서 문을 연 23일, 미국의 세계 최대 핵잠수함인 ‘미시간호’가 부산기지에 입항했고, 북한은 두 명의 한국인에게 무기노동교화형을 선고했다. 또한 중국 인민해방군 고위인사는 오는 9월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열리는 항일전쟁 승리 기념 열병식에 한국 국군과 북한 인민군을 동시에 초청한다고 밝혔다. 인권문제를 국제이슈화 해서 자신이 싫어하는 나라를 압박하는 미국의 수법은 중국에게 너무도 익숙하고, 시도때도 없이 대형 미군함이 들락거리는 한반도 남쪽 해역에 중국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은 자신들의 열병식 초청에 한국이 어떻게 반응하지는 지 주의깊게 지켜볼 것이다.

굴곡 많은 현대사의 굽이굽이를 헤쳐 광복 70주년을 맞는 올해, 얄궂게도 한중관계는 복잡하게 꼬여만 가고 있다. 특히 우리는 거창한 ‘중국몽’을 꾸며 새롭게 굴기한 중국을 제1 교역국으로 삼은 지 오래다. 싫건 좋건 중국과의 관계를 슬기롭게 풀어가지 못할 경우 치러야할 대가가 너무 커져버린 것이다. 중국이 발신한 중대한 외교적 신호를 놓친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주창하고 있는 ‘실크로드 익스프레스’ 구상의 실현은커녕 우리의 미래는 대륙에 갇힌 섬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추가,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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