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판 다보스포럼’으로 불리는 보아오(博鰲)포럼에서 중국이 추진 중인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실체를 드러냈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언명한 ‘실크로드 익스프레스(SRX)’는 아직 구상 단계에 머물고 있어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시진핑 주석은 28일 보아오포럼 기조연설에서 “일대일로 구상은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이미 60여개 국가와 국제기구가 참가하거나 참가에 긍정적인 의사를 표명했다”며 “일대일로는 중국의 독주가 아니라 관련국들의 합창곡”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탄력받는 시진핑의 일대일로 구상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8일 2015년 보아오포럼 개막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출처 -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
2013년 9,10월부터 시진핑 주석이 야심차게 추진 중인 일대일로 사업은 육상으로는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거쳐 유럽 대륙까지 철로를 연결해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형성하고 해상으로는 중국 연해와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인도양을 거쳐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연결하는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구축하는 대역사(役事)다.

중국은 이미 지난해 11월 18일 중국 저장성 이우(義烏)시에서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까지 운행하는 세계 최장의 1만 3052㎞ 직통열차 ‘이신어우(義新歐)선을 개통한 바 있다.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와 외교부, 상무부는 중국 하이난(海南)성에서 보아오포럼이 열리고 있는 28일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 실크로드 공동 건설 추진을 위한 전망과 행동’을 발표했다

특히 일대일로의 중점 사업으로 정책 소통, 인프라 연통(聯通), 무역 창통(暢通), 자금 융통, 민심 상통 등 ‘5대 통(通)’을 제시해 단순한 교통 인프라의 연결은 물론, 자유무역지대 건설, 송유관.가스관 등 에너지 협력, 금융 협력 등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더구나 중국이 주도하는 AIIB에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6개국의 참가에 이어 3월말 참가 마감일을 앞두고 한국을 비롯해 호주, 러시아, 브라질 등이 참가의사를 밝혀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은 더욱 힘을 얻게 된 형국이다.

일대일로 구상 실현을 위한 자금을 실크로드기금은 물론 AIIB를 통해서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400억달러(약 44조원)를 실크로드기금으로 먼저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의 참여 결정 과정을 통해 보았듯이 미국은 중국 주도의 AIIB 추진에 경계감을 표했지만 결국 관련국들은 국익 차원에서 AIIB에 참여함으로써 사실상 중국이 ‘뜨는 해’임을 보여줬다.

진척 더딘 박근혜의 '유라시아 이니셔니브' 구상

▲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10월 18일 '유라시아 이니셔티' 구상을 처음으로 밝히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시진핑 주석이 일대일로를 주창한 시점과 큰 시차 없이 박근혜 대통령은 한.러 정상회담을 앞두고 2013년 10월 18일 “저는 유라시아를 ‘하나의 대륙’, ‘창조의 대륙’, ‘평화의 대륙’으로 만들어 가는 몇 가지 방향인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제안하고자 한다”면서 “부산을 출발해 북한, 러시아, 중국, 중앙아시아, 유럽을 관통하는 ‘실크로드 익스프레스(SRX)’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고 SRX 구상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이후 박 대통령은 같은해 11월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종단철도(KTR)와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의 연결’에 인식을 같이하고, 포스코와 현대상선, 코레일(이하 3사)은 ‘라진-하산 프로젝트’ 참여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11월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첫 시범사업으로 러시아산 유연탄 4만 5천톤을 실은 중국 국적의 화물선이 북한 라진항을 거쳐 포항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3사들은 본격적인 ‘라진-하산 프로젝트’ 사업 참여를 위한 본계약을 미뤄두고 있다. 남북철도가 연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항구를 거친 물류는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북경제협력을 금지하고 있는 5.24조치는 여전히 엄존하고 있고 남북관계는 갈수록 경색되고 있다.

▲ 지난해 11월 27일 러시아산 유연탄을 북한 라진항에서 선적하고 있다. 이 석탄은 12월 1일 포항항에서 하역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같은 상황 탓인지 올해 주요 사업도 외교부가 코레일과 함께 오는 7~8월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 중국횡단철도(TCR), 몽골횡단철도(TMR) 등을 이용해 러시아·중국·몽골·중앙아시아·유럽을 횡단하는 ‘유라시아 친선특급’이라는 상징적 이벤트 밖에 없다.

국토부는 올해 주요업무 추진계획을 발표, “한반도 통일시대를 적극 대비하기 위해서 경원선 철도 단절구간, 문산에서 남방한계선 구간 고속도로 등 남한 내 단절구간 연결을 위한 사전 준비와 조사·설계 등을 본격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국토부 관계자는 31일 “첫 출발점을 우리 미연결 구간을 연결하는 것, 두 번째로 북한쪽 통과하는 것, 세 번째가 북한 쪽 속도를 높여 실제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고 그 다음 단계가 국제협력 강화”라며 “개성-신의주 철도.도로만 하더라도 30조원 가까운 엄청난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보통 의사결정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당장 남북 철도연결이나 실크로드 익스프레스 구상이 실현될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국내 철도 미연결 구간을 연결하면서 ‘통일준비’를 하자는 입장인 셈이다.

당국자 “북한이 어떻게 호응해 나오느냐가 관건”

▲ TKR(한반도 종단철도)가 연결되면 중국의 '실크로드 경제벨트'(SRX, TCR)는 물론 TSR(시베리아 횡단철도), TMR(몽골 횡단철도)를 통해 유럽까지 달릴 수 있다. [자료제공 - 남북경제협력연구소]

▲ 경부선을 연결해 TCR(중국 횡단철도)로 뻗어나가고, 중간 정주에서 라선으로 연결해 TCR(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진출하는 남북 고속철도.도로 연결 사업은 현 정권 인수위 시절부터 제안됐다. [자료제공 - 남북경제협력연구소]

외교부 관계자는 30일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유관국별로 협력이 진행되고 있는데, 올해가 실제 사업을 하는 원년”이라며 “유라시아친선특급 사업에 10억원, 한-중앙아협력사무국 추진에 10억원 등 총 27억원 정도의 예산이 처음 책정됐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중국의 일대일로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면서 “북한이 어떻게 호응해 나오느냐가 관건”이라고 덧붙였다.

AIIB 가입 통보일인 지난 27일 다른 외교부 관계자는 “AIIB의 초점은 주로 아세안(동남아)과 서남아에 맞춰져 있다”며 다만 “AIIB 이사회 등에서 ‘북한이 특별한 대상이니 투자하자’고 결정하면 투자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이 추진 중인 일대일로 사업에 ‘신의주-개성’ 구간도 포함돼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신의주-개성’간 철도.도로 건설사업은 중국이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 ‘유라시아 이니셔티’와 상충하는 대목이다.

남북관계의 진전이 더디고 중국의 적극적 투자공세가 이어질 경우 중국식 표준설계에 의한 ‘신의주-개성’ 구간 철도.도로 연결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고, 이는 두구두고 남북경제공동체 구상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김한신 남북경제협력연구소 대표는 "그렇지 않아도 신의주-개성 고속철도.도로 건설 사업이 중국에게 넘어갈 상황이었는데, 일대일로가 힘을 받는 현실이 우려스럽다"며 "당장 우리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장래에 남북경제공동체의 기반이 될 이 사업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한국, 국제철도협력기구 옵저버 자격도 못 갖춰

▲ 지난해 4월 최연혜 코레일 사장(오른쪽 두 번째)이 평양에서 개최된 국제철도협력기구(OSJD) 사장단 정례회의에 참석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같은 상황에서도 정부는 안이한 상황인식에 머물러 있는 정황들이 나타나고 있다. SRX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기본절차에 해당하는 국제철도협력기구(OSJD)에 회원국 가입도 아직 실현시키지 못한 것이 단적인 예다.

한국은 러시아, 중국, 북한을 비롯한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27개국 국가들의 철도협력기구인 OSJD에 지난해 3월에야 ‘옵저버’ 보다도 한 단계 아래인 ‘제휴회원’ 자격을 얻었고, 오는 5월 27~29일 ‘OSJD 사장단회의 및 제10차 국제철도물류회의’를 서울에 유치했다.

그러나 정작 4월 20~24일 체코에서 열리는 ‘제30차 OSJD 사장단회의’를 거쳐 6월 2~5일 몽골에서 열리는 ‘제43차 OSJD 장관회의’에서 정식 회원국 승인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OSJD는 27개 회원국 전원일치로만 신규 회원 승인이 결정되는데 북한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한 차례 한국의 회원 가입을 반대해 비토권을 행사한 바 있다.

‘실크로드 익스프레스’ 추진 범정부 기구 필요

▲ 2007년 12월 11일 문산-봉동 구간 경의선 화물열차가 운행을 개시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안병민 한국교통연구원 연구위원은 “북-중 간 철도 연결은 양자간 협력사업이 아니라 다자간 협력사업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의 최적의 파일럿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면서 북한이 AIIB 참가국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지만 북한 철도 건설을 위한 투자는 국제적 합의로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진단했다.

또한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 재원 문제로 고민하는 우리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민세금으로 조성된 연간 1조원 규모의 남북협력기금, 그 중에서도 북한 인프라 구축에 투자할 수 있는 자금 규모로는 실제로 남북간 철도.도로 연결사업을 추진할 수 없기 때문에 AIIB 투자를 유치해 남북이 주도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판단이다.

안병민 연구위원은 그러나 “국민의 세금으로 남북 철도.도로를 연결하고 화물열차까지 운행했지만, 지금은 모두 중단되고 유지.보수마저 안 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당장 남북 철도 연결을 하자고 하더라도 안전조사부터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나아가 “실크로드 익스프레스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부 관련부처들이 참여하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물론,  현 정부가 실제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추진할 적극적인 의사가 있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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