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대 / 동국대 북한학 박사수료


다음의 공통점은?

‘서울국제영화제’, ‘대한민국 영화대상’, ‘고양어린이국제영화제’,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 ‘핑크영화제’ ….

‘제5차 쁠럭불가담 및 기타 발전도상 나라들의 평양영화축전(1996)’을 소개하기에 앞서 퀴즈로 먼저 포문을 열었다. 영화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들어 본 영화제일 것이다. ‘서울국제영화제’는 2000년 ‘서울넷페스티벌’이라는 명칭으로, ‘대한민국 영화대상’은 2002년에, ‘고양어린이국제영화제’는 2005년에,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와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 ‘핑크영화제’는 2007년에 처음 개최하였다. 이들 영화제는 무엇이 유사한 걸까?

정답을 맞힌 분이 있는지 모르겠다. 앞서 언급한 영화제는 현재 폐지되었거나 잠정 중단한 영화제이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 국제적인 문화 행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가 열리고,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를 개최하면서 축제가 본격적으로 닻을 올렸다. 이후 2000년대는 가히 문예 부흥기가 아닌가 싶다. 한국영화의 흥행, 대외 위상과 궤를 같이해 여러 시도가 이루어졌다. 기존 영화제와 차별화된 축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오신 분들에게는 송구한 이야기지만, 새천년에는 ‘영화제’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났다.

앞서 언급한 영화제가 지속해서 이어지지 못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정부와 지자체 등의 예산 지원에 따라 영화제는 큰 영향을 받는다. 지역단체장이나 경영자의 의지가 주요하게 작용한다. 이 경우 영화제는 다른 목적을 위한 홍보와 선전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홍보와 선전의 과잉은 자칫 필요 이상의 영화제를 양산하기도 한다. 수요를 넘어선 공급은 예산 지원에도 한계를 보이고 차별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영화제 본래의 취지보다는 다른 목적에 따라 존폐가 결정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결국, 지역의 특성, 문화적 인프라, 콘텐츠, 이에 맞는 수요자의 요구,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 등이 융합하지 못하면 일시적인 행사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철저하게 국가 주도로 이루어진다. 여러 영화제가 자율적으로 경쟁하지 않는다. 하나의 주제에 하나의 행사만이 존재한다. 둘은 없다. 영화제가 난립할 여지가 없다. 종종 공무원을 복지부동(伏地不動), 무사안일에 빠져있다고 하는 데, 북한의 영화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무원들이 만든다고 생각하면 된다. 사실상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존폐의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공교롭게도 제5차 평양(국제)영화제가 열린 1996년은 극도의 경제적인 어려움과 국제적 고립을 겪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이다. 영화제가 열리지 않아도 전혀 어색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1996년 9월 16일부터 24일까지 다섯 번째 축제가 열렸다. 북한의 어려운 사정을 반영이라도 하듯 이종옥 부주석은 이례적으로 영화제 개막식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오늘 우리 인민은 래일(내일)을 위한 오늘에 사는 고결한 인생관을 지니고 《고난의 행군》 정신,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하여 부닥치는 온갖 난관과 시련을 용감히 극복해 나가고 있으며 신심과 락관(낙관)에 넘쳐 내 나라, 내 조국을 더욱 부강하게 하기 위하여 억세게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는 “온갖 난관과 시련을 겪고 있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언급하였다. 그 시련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알고 계시다. 제3차(1992년), 제4차(1994년) 영화제와 더불어 제5차(1996년) 영화제의 국내외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1992년의 경우 북한은 <민족과 운명>이라는 다부작 영화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내부적으로 결속을 다지고, 외부로부터 홀로서기를 시도하고자 했다. 1994년에는 지도자의 사망을 계기로 영화제를 추모제로 바꿔 놓았다. 추모제는 국제적이었다. 반면 1996년은 이전 영화제와 비교해 주목을 끌 만한 이슈가 없었다. 비슷한 시기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를 목표로 ‘부산국제영화제’가 첫걸음마를 시작했다.

■ 4차, 5차 평양영화축전과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참가 규모

4차 평양영화축전(1994)
1994. 9.26 ~ 10. 4

5차 평양영화축전(1996)
1996. 9.16 ~ 9.24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1996)
1996. 9.13 ~ 9.21

50개 나라 100여 편

40여개 나라, 60여개 단체

31개국 169편

취지와 성격이 다른 두 영화제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만 한반도에서 남과 북이 ‘총성 없는 문화전쟁’을 벌이게 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남한이야 크게 의식하지 않았겠지만 북한의 시각에서 분명 ‘부산국제영화제’의 출발은 자극을 받을만한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북한의 영화제작 여건은 어려웠다. 5차 평양영화축전에서 북한은 <그는 오늘도 대오에 서있다>가 기록영화 부문 ‘홰불금상(최우수상)’과 ‘연출상’을 수상했다. 당시의 열악한 상황을 반영해 예술영화 부문에서 주목을 받은 북한 작품은 없었다. 새로운 시도가 필요했지만, 경제적 상황이 줄곧 발목을 잡았다. 전환점이 필요했다. 다음 영화제는 어떨까?

1998년 9월 16일부터 9월 25일까지 열린 제6차 평양(국제)영화제에서 확인해보자.

(수정, 6.18 11:55)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