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서(겨레말큰사전 책임연구원)


내가 전경으로 복무하던 90년대 초는 시위가 무척 많았다. 4.19를 기점으로 시작한 시위는 광복절에 이르러 절정을 이르렀다.

그 당시 시위의 대부분이 대학생들 위주였지만 간혹 아줌마들이 하는 시위도 있었다. 아줌마들의 시위는 도시개발공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고, 대학생들과 아줌마 시위의 차이는 현장에 각자 갖고 나오는 준비물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시위할 때 대학생들은 화염병, 각목 등을 들고 나왔지만 아줌마들은 도시락을 들고 나왔으니 그 차이는 하늘과 땅의 간극만큼이나 컸다.

좌우간 바로 그 문제의 도시개발공사가 내가 근무하던 경찰서의 관내에 있어서 갑자기 비상이 걸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비상 출동을 알리는 방송에 따라 신속히 진압장비를 챙겨서 닭장차를 타고 도시개발공사에 가면 구호를 외치고 있는 한 무리의 아줌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줌마들과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정한 선을 경계로 대치를 했다. 아줌마들은 구호를 외쳤고 우린 방패를 들고 아줌마들의 난입에 대비했다. 아줌마들은 목소리 높여 ‘재개발 중단, 철거 중단’을 외쳤다. 도시개발공사에서 시행하는 재개발과 철거 중단을 위해 아줌마들이 모인 것이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 정도 대치를 하고 있으면 아줌마들 사이에서 이런 소리가 나왔다.

“밥 먹고 합시다.”

점심시간인 것이다. 아줌마들은 나무 그늘 밑으로 흩어져 갖고 온 도시락을 먹기 시작하고 우린 닭장차로 돌아와 배송해온 밥을 먹었는데, 간혹 고참이 내게 이런 심부름을 시켰다.

“야, 아줌마들한테 가서 사제 김치 좀 얻어와.”

난 밥을 먹다 말고 식사하시는 아줌마들에게 가서 김치 구걸을 했다.

“아줌마, 김치 좀 주세요. 군대 김치는 영 맛이 없어서…. 사제 김치가 맛있고 또 군대 오면 사제 음식이 먹고 싶잖아요. 김치 좀 주세요.”

“그럼. 주고 말고. 어이 여기 전경이 김치 먹고 싶대. 좀 덜어서 주자고.”

아줌마들은 김치를 모아서 내게 안겨 주었고 우린 그 김치를 맛나게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김치를 서로 나누는 화기애애함이 언제 있었냐는 듯 또 다시 대치를 했다. 아줌마들은 점심 먹은 힘으로 ‘철거 반대’를 외쳤고 우리는 사제 김치의 맛을 되새기며 방패를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해가 저물 무렵 아줌마들 사이에서 이 말이 나오면 아줌마들은 ‘철거 반대’라는 구호 외치기를 중단하고 각자 가지고 온 빈 도시락 가방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가서 밥해야지.”

남에서 ‘철거’라는 말은 재개발관 관련된 집과 건물의 철거 그리고 고가도로 철거, 계단 철거 등과 같은 노후한 각종 시설을 중장비를 이용하여 무너뜨리거나 없애는 의미로만 쓰인다. 북쪽도 마찬가지로 이런 의미로 ‘철거’를 쓰고 있다. 그런데 북쪽 용례를 확인해 보면 이 의미와 맞지 않는 ‘철거’의 쓰임을 찾을 수 있다.

⁃ 동학 상층이 상소운동을 벌리려고 서울에 올라오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서울에 들어온 하층 군중은 1893년 2월 13일 밤 미국, 프랑스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 기여든 구미침략자들의 공사관과 교회당, 살림집 담벽들에 놈들의 범죄적인 침략 책동을 폭로하며 즉시 {철거를} 요구하는 격문을 써 붙이면서 강력한 반침략투쟁을 벌리였다.《원종규: 조선인민의 반침략투쟁사》
⁃ 놈들은 외국군대의 {철거} 문제와 군사분계선확정문제를 의정에 넣는것을 집요하게 반대하였으나 우리의 요구에 굴복하여 그것을 의정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리을설: 만고의 령장》
⁃ 상부의 통보와 적후 정찰 보고에 의하여 적들의 대진공을 예견한 대대장은 남쪽 무명고지를 방어하고 있는 중대를 {철거시키고} 거기에 적들을 끌어들인 다음 련대의 기동 력량으로 불의의 타격을 주자는 새로운 결심을 내놓았다.《김한윤: 고성처녀》

위의 북쪽 용례들에 쓰인 ‘철거’에는 건물이나 시설을 무너뜨리거나 부순다는 의미가 전혀 없다. 오히려 ‘철거’ 대신에 ‘철수’를 쓰면 그 의미가 잘 통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말대사전》에서는 ‘철거’와 ‘철수’를 같은말로 처리하지 않았다. 즉, 북에서 ‘철거’와 ‘철수’는 의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조선말대사전》의 ‘철거’와 ‘철수’ 풀이는 아래와 같다.

철거 (撤去) [명]
① (자리잡고 있던 곳에서) 거두어가지고 돌아가는 것.
② (집, 시설 같은 것을) 거두어 치우는 것.

철수 (撤收) [명]
① 거두어들이거나 걷어치우는 것.
② 있던 데서 장비나 시설을 거두어가지고 물러가는 것.

‘철거’의 ①번 풀이와 ‘철수’의 ②번 풀이가 서로 같아 보인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풀이의 끝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무언가를 ‘거두어가지고’까지는 같지만 ‘돌아가는 것’과 ‘물러가는 것’으로 구분을 짓고 있는 것이다.

‘돌아가다’는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가다’라는 의미가 있고, ‘물러가다’는 ‘있던 자리에서 옮겨가다’는 의미가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다’라는 말은 써도 ‘고향으로 물러가다’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말대사전》에서는 ‘철거’와 ‘철수’를 같은말로 보지 않은 것이고 위에서 든 북측 용례에 ‘철거’ 대신에 ‘철수’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즉 북에서 ‘일본군은 철거하라’라는 말은 ‘일본군은 자기네 나라인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인 것이고, ‘일본군은 철수하라’는 ‘일본군은 지금 있는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라’는 뜻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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