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 설 명절을 앞둔 지난 17일 박근혜 대통령은 홍용표 청와대 통일비서관을 신임 통일부장관 내정자로 확정, 발표했다.

인사청문회 등을 통해 내정자 꼬리표를 떼게되면, 홍용표 내정자는 지난 1969년 국토통일원이 설립된 이후 38번째 장관이자, 류길재 장관에 이어 박근혜 정부들어 두 번째 통일부장관이 된다.

류 장관이 지난 2013년 3월 11일 장관직에 취임했으니 근 2년이 다 되었으나 '통일 및 남북대화·교류·협력에 관한 정책의 수립, 통일교육, 그밖에 통일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통일부장관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했다는 평가는 좀처럼 듣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장관 교체를 통해 남북대화가 재개되거나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청와대는 홍 내정자를 "통일연구원과 대학 통일정책연구소장을 역임한 교수 출신으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외교국방통일분과 실무위원과 대통령비서실 통일비서관을 거친 통일정책 전문가"이며, "현 정부의 대북정책 철학에 대한 이해가 깊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남북관계 현안을 풀어갈 적임자"라고 소개했다.

반면, 야당은 "통일부장관은 대통령직 인수위원을 지낸 현 청와대 통일비서관 출신"이라며 "한 마디로 측근 인사, 가신 인사에 다름 아니다"라고 혹평하고 "인사청문회를 통해 이들이 적임자인지 자질과 능력을 확실하게 검증해나갈 것"이라고 공언했다.

통일부, '통일업무전담 중앙행정기관'

지난 2008년 이명박 당선자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통일부를 해체하고 외교통일부로 통폐합하겠다고 발표해 파란을 일으킨 바 있었지만, 사실 통일부는 1969년 통일문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열망과 국회의 역할에 힘입어 박정희 정권하에서 만들어진 정부조직이다.

처음부터 통일부는 '통일방안 등 북한문제와 통일문제를 연구하고 정부의 통일정책을 통합적으로 관장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라는 점을 명확히했다.

통일부는 홈페이지 첫머리에 통일부의 창설 배경과 의의에 대해 "통일부는 4.19이후 사회 각계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던 다양한 통일논의를 정부차원에서 수렴하여, 체계적이고 제도화된 통일정책을 수립·추진하기 위해 범국민적 합의를 거쳐 출범하게 되었으며, 분단국 특성을 반영하여 통일업무를 전담하는 중앙행정기관을 창설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가집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통일부는 통일 및 남북대화·교류·협력·인도지원에 관한 정책의 수립, 북한정세 분석, 통일교육·홍보, 그 밖에 통일에 관한 사무를 관장합니다.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간 신뢰를 형성하여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며,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여 「한반도 통일시대」를 열어 나가겠습니다"라고 임무를 명시하고 있다.

이런 통일부(국토통일원)의 설립배경은 초창기 박정희정권의 '선건설 후통일'입장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의 통일열망을 수용하는 태도로 나타났으며, 이후 역대 정권의 대북정책과 이에 따른 통일부의 변천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통일열망따라 높아가는 통일부 위상

▲ 지난 2012년 8월 당시 류우익 통일부장관이 역대 통일부장관을 초청해 정책간담회를 개최했다. 손재식(제10대), 이세기(제11대), 허문도(제13대), 이홍구(제14대, 제20대), 김 덕(제21대), 강인덕(제24대), 임동원(제25대, 제27대), 박재규(제26대), 정세현(제29대, 제30대), 김하중(제34대) 장관 등 10명의 역대 장관이 참석했다. [사진제공-통일부]

1969년 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초대 국토통일원 장관을 지낸 신태환은 임명권자인 박정희가 실질적인 정책집행기능을 부여하지 않고 상징적인 기구로 만들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토통일원은 통일을 지향하는 설립취지대로 남북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에 공헌을 하고 건설부 장관을 지내기도 한 신태환은 서울대 총장을 역임하던 1965년에는 한일회담 참가학생을 징계하라는 정부의 압력을 거부한 뒤 스스로 총장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던 인사였다. 또 1974년부터 이듬해까지 1년 조금 못되는 기간 장관을 지낸 신도성은 영남대 교수와 경상남도지사를 지냈으나 앞서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 활동을 한 인사였다.

이후 국토통일원은 1990년 북방외교정책을 통해 남북통일문제에 대해 공세를 폈던 노태우정부에 이르러 통일원으로 개칭되고, 제16대 최호중 장관부터 부총리급으로 격상됐다. 이 무렵 통일원에는 통일정책에 관한 각 부처 간의 이견을 조정, 통합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기도 했다.

이같은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 체제는 1993년 2월 취임해 그해 12월 이임한 한완상 장관부터 1995년 12월부터 1998년 3월까지 2년 2개월을 재임한 권오기 장관까지 김영삼정부 5년간 계속 유지됐다.

김영삼정부에서는 1988년 2월부터 1990년 3월까지 전임 노태우정부의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을 지낸 이홍구가 1994년 8개월간 다시 그 자리에 앉았다가 송영대 차관이 6일간 장관직무대행을 맡았던 이채로운 기록이 남아 있다.

1998년 출범한 김대중정부는 정부조직개편을 단행해 통일원을 통일부로 바꿨으며, 통일부장관이 '통일관계 장관회의'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해 통일부의 실질적 위상을 강화했다.

이 시기 1999년 12월부터 2001년 3월까지 1년 3개월동안 재임한 박재규 장관은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해 역대 통일부장관 중 가장 화려한 재임기를 보냈으며, 임동원 장관은 1999년 5월부터 12월까지, 그리고 2001년 3월부터 그해 9월까지 두차례에 걸쳐 통일부장관직을 수행했다.

정세현 장관은 2002년 1월부터 2003년 2월까지 김대중정부의 마지막 통일부장관에 이어 2003년 2월부터 2004년 6월까지 1년 4개월간 노무현정부의 첫 번째 통일부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노무현정부에서는 정 장관에 이어 정동영, 이종석, 이재정 장관이 짧게는 10개월에서 길게는 1년 6개월까지 고르게 장관직을 수행했다.

이후 정권인수위원회 시절 통일부 해체를 공언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이명박정부 들어서는 집권 5년동안 김하중, 현인택, 류우익 등 3명의 장관이 통일부를 거쳐갔다.

민족의 장래를 그 열망만큼의 무게로...

통일부 설립 이후 46년의 세월동안 37명의 장관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남북관계를 조율해 왔다. 정권의 성격에 따라 동요하고 변질되기도 했으나 우리 사회가 통일을 향한 도도한 흐름을 잃지 않고 그나마 줄곧 견지한 데에는 통일부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1964년생인 홍 내정자는 지난 2004년 노무현정부의 두 번째 통일부장관에 임명된 정동영 장관(1953년생)과 같은 51살에 장관에 오르게 된다. 1급에서 차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장관으로 직행하는 파격인사로도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최연소 장관 취임기록은 지난 1986년 8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전두환정권에서 마지막 국토통일원장관을 지낸 허문도 씨(1940년생, 46살 취임)가 갖고 있다.

이보다 앞서 1982년 국토통일원 장관이 된 손재식 장관(1934년생)과 2006년 전임 정동영 장관에 이어 통일부를 맡았던 이종석 장관(1958년생)이 임명 당시 48살이었다. 손 장관의 후임으로 1985년 장관이 된 이세기(1936년생) 씨는 당시 49세였다.

비교적 젊은 장관이었던 이들 중에는 한때 차지했던 영화의 무게를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끝내 역사의 뒤안길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인사들도 있다. 홍 내정자가 민족의 장래문제를 다루게되는 통일부장관이라는 자리를 그 열망의 무게에 걸맞는 잣대로 잘 챙겨보길 바란다.

<역대 통일부장관>

▲ [자료-통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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