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일대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미국 기독교의 선교기지, <정동>

19세기 말 정동은 양인촌(洋人村)이라 말할 만큼 우리나라에 와있는 서양인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었던 곳이다. 1883년 미국공사관을 위시하여 서구열강들의 공사관들이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이와 거의 동시에 선교기관들이 들어섰다. 이후 이들이 선교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조선 사람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이곳 정동은 양인촌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기관은 주로 미국선교사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이미 일제의 조선침략이 을사늑약에 앞선 가쓰라-테프트 밀약(1905.7.29)을 통해 미국에 의한 승인 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국의 주도적인 선교활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점이 서구제국주의에 동반한 선교활동과 다르다. 즉 조선에서의 선교는 동양제국주의에 동반된 서양의 선교활동이었다. 하지만 1910년 개최된 애딘버러 세계선교자대회에서 이미 정리되었듯이 기독교는 제국주의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이곳 정동은 미국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 전초기지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리적으로는 정동길을 사이에 두고 남서쪽에 감리교의 배재학당, 이화학당, 정동교회가 위치하였으며, 북동쪽으로 장로교의 언더우드학당(경신고 전신), 정동여학교(정신여고 전신), 정동장로교회(새문안교회 전신)가 위치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북동쪽의 장로교의 학교 및 교회는 모두 정동 밖으로 떠났다. 그 이유는 1897년 대한제국이 건립되고 고종이 경운궁을 정궁으로 삼음으로써 경운궁을 더욱 확장해 나가면서 당시 경운궁 뒤편에 위치해 있던 장로교의 여러 기관들이 이곳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정동장로교회는 현재 광화문 쪽 새문안길로 이전하면서 이름 또한 새문안교회로 바꿨다. 그리고 언더우드학당과 정동여학교는 각각 종로구 혜화동과 연지동으로 옮겼고, 그 후 이름 또한 경신고와 정신여고로 바꾸었다. 한편 정신여고는 그 뒤 1978년 현재의 송파구 잠실동으로 또 다시 이전하였다.

▲1890년대 북장로회의 정동선교기지 [자료-유영호]

반면 감리교의 경우 배재고만 1984년 강동구 명일동으로 이전하였을 뿐 나머지는 모두 19세기 말의 위치를 유지하였다. 한편 이화여고는 도성 안에 위치해 있지만,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의 경우 도성 밖까지 확장한 경우이며, 도성 밖 이 자리는 경인선 최초의 한강 이북 서울 내 정거장인 <서대문정거장>(의주로1가 44-2)이 있던 곳이다.

1899년 인천 제물포에서 노량진까지 조선에 최초의 철도가 개설되었지만 1900년 한강철교가 개통되면서 이곳 서대문정거장까지 오게 되면서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경인선이 완성된 것이다. 이로써 서양인들의 서울 정동으로의 접근이 더욱 용이해졌다.

한편 설립 년도가 1885년인 배재학당과 1886년인 이화학당은 국내 최초의 남녀 신식학교로 처음 시작할 때는 각각 2명과 1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7년 2월 고종으로부터 각각 배재학당 및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학교 역사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현재 이화여자대학교의 영문표기이다. 현재의 공식적인 영문표기는 'Ehwa Women's University'가 아니라 'Ehwa Womans University'를 쓰고 있다. 즉 Women's가 아닌 Womans로 쓴다. 단수도 복수도 아닌 새로운 고유명사를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이화여대의 뿌리인 이화학당이 한 명의 여학생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유관순>의 신화와 현실

현재 이화여고에 <유관순기념관>은 물론 옛 우물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 지난날 유관순이 빨래했다고 하여 일명 <유관순빨래터>라고 기념하고 있다. 이만큼 유관순을 이화여고 제일의 상징적 인물로 꼽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일제강점기 민족주의세력 내에서 유관순만큼 유명한 항일여성운동가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재학시절 3.1운동의 여파로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으로 내려가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었고,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사망한 독립운동가가운데 한 명이다.

그런데 일제 36년의 식민통치기간 수많은 사람들이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싸우다 죽어갔건만 항일영웅으로서의 유관순의 상징성은 유독 크게 포장되어 온 것이 사실이며,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들이 역사적 사실과 달리 왜곡되어 전해져 온 것이다. 사실 해방되던 해까지만 해도 3천만 우리민족가운데 유관순을 아는 사람은 그를 직접적으로 아는 일부 사람들 외에 아무도 없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만 따르더라도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시위과정에서 검거자는 4만 6,948명이며, 사망자만 해도 7,979명이었으니 유관순은 그저 이처럼 수많은 이름없는 영웅들 가운데 한 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최고의 항일영웅으로 떠오르게 된 것일까?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당장 친일파들은 다급해졌다. 친일금광업자 최창학은 김구에게 자기 별장을 내주며 <경교장>으로 쓰게 하고, 친일문학가 이광수는 김구의 항일일기를 윤색하여 《백범일지》로 탄생시켰다. 이러한 친일파들의 신분세탁은 한반도 곳곳에서 벌어진 것이며 이곳 이화학당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 말기 혁혁한 친일행위로 이미 많은 조선 사람들로부터 저주의 대상이었던 이화학당 출신 박인덕은 옥사한 유관순을 자신의 제자라며 당시 교장 신봉조에게 알림으로써 유관순을 항일영웅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박인덕은 실제로 그가 서대문형무소에 유관순과 함께 복역했는지 잘 모르겠으나, 같은 이화학당 출신의 유관순을 발굴하여 자신의 제자로 만들고 자신도 유관순과 함께 독립운동으로 복역했음을 선전하는 도구로 자신의 친일행적을 세탁하고자 했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인물의 신화화가 가져오는 악영향이 단지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 한두 사람 처벌하지 못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대중들에게 뿌리깊게 인식된 '유관순 신화'는 현재에도 그대로 작동하며 우리사회의 극우세력들이 여전히 이용하고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유관순의 역사교과서 수록문제로 이용하고 있는 것 또한 그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유관순에 대한 진실을 알아가려는 노력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다.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의 수형기록표. 수감 중 그녀는 통상 유부녀가 하는 쪽머리를 하고 있었다. [사진출처-국사편찬위원회]

예컨대, 유관순이 토막살인 당했다는 것 등 많은 것이 거짓임이 판명되었고, 3.1운동 검거자 가운데 가장 긴 7년형을 선고받았다는 박인덕의 말은 그 뒤 판결문이 발견되면서 5년형으로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관순은 영친왕 결혼기념으로 다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이처럼 박인덕은 수많은 거짓말을 동원하였고, 사실을 과장하였던 것이다.

더우기 '꽃다운 나 어린 처녀의 죽음'으로 신화화하였지만 아직도 의심스러운 대목이 많다. 예컨대 현재 유관순이 과연 미혼인지 기혼인지조차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관련자료 중 가장 신뢰성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수형기록부가 진실하다면 유관순은 18세에 투옥되어 19세에 사망하였다. 그런데 당시 기록에 의하면 1925년 기준 여성들의 초혼연령은 평균 16.7세였다. 게다가 그 사진 속 유관순의 머리는 처녀의 댕기머리가 아니라 유부녀의 쪽머리가 아닌가? 일제강점기는커녕 21세기 현재에도 미혼의 여성들이 쪽머리를 하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다. 감옥이라고 특별나지는 않았다. 당시 다른 여성들의 수형기록부 사진에 댕기머리는 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박인덕의 노력 덕분에 유관순에 대하여 그가 '꽃다운 처녀'였음을 의심해서는 안 되도록 세뇌되어 있다.

박인덕의 해방 직후의 이런 모든 행위는 추측하건대 아마 자신 같은 근화회 멤버였지만 대중에게 잘 알려진 여성독립운동가 김마리아 같은 사람과 자신이 대비되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친일파척결의 움직임이 두려웠을 것이다.

김마리아의 경우 이화학당 바로 건너 편 정동여학당(정신여고 전신)출신으로 일본유학 중 1919년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고, 이후 바로 귀국하여 국내활동 중 3월 5일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 출소 후에도 3.1운동 직후 최대 규모의 항일 여성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자금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다. 이런 그녀였기에 또다시 옥고를 치르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지만 그곳에서도 <재미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며 계속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그 후 일제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인 1933년 다시 국내로 들어와 원산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고문후유증으로 1944년 숨을 거두었다. 따라서 정신여고는 모교의 상징으로 항상 김마리아가 등장하는 것이다.

▲민족주의 계열의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사진출처-독립기념관]

대한민국에서는 일반인들에게 항일여성운동가에 대하여 말해보라고 하면 아마도 유관순 정도 외에 더 이상의 인물을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김마리아가 여성으로서 민족주의계열의 큰 별임에도 이를 아는 사람만 해도 소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과연 여성들의 항일운동은 이 정도에 그친 것일까? 우리는 그 동안 아무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을 지라도 사회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면 그들은 항상 제외되었다. 그런데 북에서 영웅으로 칭송되는 진짜 나 어린 항일영웅이 있다는 사실이다. 1934년 김금순이라는 만 9세의 어린소녀가 빨치산부대의 사령부가 머물고 있는 유격구의 위치를 일본경찰들에게 끝내 알려주지 않고 공개처형 당한 것이다.

이 일로 당시 코민테른의 잡지는 물론 중국과 심지어 일본 출판물에서조차 이러한 야만적 행위에 대하여 앞 다투어 보도하였으며, 《어린렬녀의 략전》이라는 제목으로 금순이의 뜻 깊은 죽음을 격찬하였던 것이다.

유관순과 김금순 모두가 조국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이 중 한 명은 우리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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