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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을성곽과 '장충단' 깔고 앉은 대저택, 그리고 반공·친일<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18) 장충단·박문사·신라호텔·구 타워호텔·자유센터
유영호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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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1.27  14: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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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충단 공원일대 장충동에서 남산입구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장충단 공원일대(장충동 ~ 남산입구 구간)

장충동 성곽 길을 깔고 앉은 대저택들

<광희문>부터 장충체육관까지의 성곽 길에는 성곽이 없다. 거의 모두 땅 속에 묻혀있거나 그 일부가 주택의 담장으로 쓰이고 있는 현실이다. 장충동은 성북동, 평창동, 한남동 등과 더불어 정치인과 기업인이 모여 살던 대표적인 부촌 가운데 하나였다. 한때는 삼성그룹의 창업주였던 고 이병철회장도 이곳에 살았다. 하지만 이러한 부자들도 1980년대 후반부터 강남으로 상당수 떠나면서 지난날의 위세는 점차 잃어가고 있다.

   
▲ 삼성그룹의 창업주 고 이병철회장의 자택. [사진-유영호]

한편, 장충동1가와 신당동의 경계는 한양성곽을 기준으로 나뉘게 되는데 지도를 펼쳐보면 이 경계선이 장충동 대저택의 정원을 가로지르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곧 그 주택이 서울성곽 위에 올라서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기주택의 전망을 위해 성곽을 타고 앉은 꼴이다. 앞서 혜화문 옆 전 서울시장공관과 같은 셈이다. 주택의 전망을 위해 이처럼 성곽을 타고 앉은 주택이 앞서는 공공기관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부잣집 대저택이었다. 그것도 두 개 법정동에 걸쳐 하나의 주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신당동'은 본래 '귀신 신(神)'자를 쓴 '신당(神堂)을 모신 동네'라는 뜻에서 유래한 동명이다. 이것이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발음이 같은 신당(新堂)으로 바뀐 것인데, '귀신 신(神)'자가 '새 신(新)'자로 바뀌어서 그런지 귀신이 이처럼 성곽을 깔고 앉은 집주인을 못 건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상상을 해본다.

<장충단(奬忠壇)> 파괴의 역사 : 일제에 의한 파괴

장충동 주택가를 지나 장충제육관 뒤로 또 다시 성곽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성곽 안쪽이 <장충단>의 옛터이다. 장충단은 본래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은 홍계훈, 이경직 등을 추모하기 위해 1900년에 만든 애국열사 추모공간이다. 이후 을미사변에 국한되지 않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왕실 수호를 위해 희생당한 군인들의 충절을 기려 제사를 지내게 함으로써 조선 최초의 국립묘지 같은 역할을 하였다.

현재의 장충단은 제각 등 각종 부속건물은 전혀 복원되지 않은 채 비석 하나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장충단이 파괴되기 전에는 현재 장충단 비석이 있는 곳부터 국립극장까지 이 일대 모두를 아우르는 엄청난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어떻게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는지 알아보자.

   
▲ 현 장충단공원 일대 모두를 아우르며 조국을 위해 싸우다 숨진 사람들을 기리던 공간이 지금은 그저 공원 입구에 위치한 그 비석들만 존재하여 지난 날 그들의 숨진 그 뜻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있다. [사진-유영호]

일본은 이곳 <장충단>을 위락공간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또 이곳에 있는 조선의 정신적 표상들을 없애고 그것을 대신해 일본의 표상들을 심은 것이다. 먼저 1908년 일본군은 이토 히로부미를 초청해 야유회를 열고 여기에 조선의 군부대신 등을 초청했다. 그리고 같은 해 일본은 장충단에서 올리던 제사를 금지토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항일의 상징이요, 극일의 표상'인 이곳 장충단에 이토 히로부미 동상을 세우려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인들의 감정상 이는 취소되고 말았다고 《매천야록》은 전한다.

"서울의 무뢰배들은 이등박문이 공덕이 있으므로 그의 동상을 만들자고 간청하였으나 그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고, 혹은 이 말을 김윤식이 유포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다 결국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피살되자 그의 장례식추도회를 이곳 장충단에서 개최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충단은 국권을 상실한 후 제사가 중지되고, 운동회 등이 개최되는 장소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예 장충단 비석을 뽑아 숲 속에 버렸으며 기타 부속건물들을 폐쇄하기에 이른다. 1919년 장충단은 공원조성대상지로 선정되고 벚나무 수천 그루가 심어졌으며, 광장, 연못, 놀이터 등이 만들어져 결국 1921년 공원으로 개장하였다.

더욱이 일제에 의한 장충단 파괴는 그저 '항일의 표상'을 '위락의 공간'으로 변경시키데 멈추지 않았다. 1929년부터 짓기 시작한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 <박문사>가 1932년에 완공되며, 같은 해 일본의 중국침략 만주사변에서 죽은 일본군 병사 <육탄3용사>의 동상을 이곳에 세움으로써 조선 항일의 상징을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장충단에 심어진 일본제국주의의 표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선의 상징을 파괴했으며, 또 어떻게 허위의 가면을 쓰고 있었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조선 궁궐의 파괴, <박문사(博文寺)>

앞서 보았듯이 경술국치 이후 총독부는 이토 히로부미의 공적을 기리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의 동상을 세우려 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이토가 죽고 그의 사망 20주기가 되던 1929년 말 동상보다는 이토의 명복을 기원하는 사찰을 건립하자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결국 그 이듬 해 '이토공 기념회'가 조직되고 여기에는 친일파 박영효, 윤덕영 등 6명의 조선 귀족도 참여하였다. 결국 이렇게 하여 이곳 장충단에 1932년 <박문사(博文寺)>라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모사찰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또 이 절의 설계는 일본 국수주의 건축학자 이토쥬타(伊藤忠太)에게 의뢰하는데, 그는 바로 남산의 <조선신궁>을 설계했던 사람이다.

   
▲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해 장충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세운 사찰 박문사(博文寺). 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이다.  사진은 일제가 발행한 당시 박문사를 알리는 엽서. [사진출처-한국콘텐츠진흥원]

이렇게 건설되기 시작한 박문사는 장충단 내의 약 4만 2천 평 부지에 지어졌다. 본당에는 영친왕이 쓴 '춘묘산(春畝山)'이란 편액이 걸렸다. 이 박문사를 지으며 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 건설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궁궐들을 마구 훼손하였다. 본당만 신축일 뿐 나머지 부속건물들은 대부분 조선궁궐의 건물들을 뜯어와 옮겨 놓은 것이다. 쿠리는 경복궁의 <선원전>(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신 곳)이며, 정문은 경희궁의 <흥화문>을 옮겨 온 것이다. 또 정문 옆 돌담은 광화문을 허문 뒤 그 석재를 가져다 사용했으며, 특히 대한제국의 상징인 원구단을 파괴하고 그 부속건물인 <석고각>을 이곳 박문사의 종각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지어진 박문사의 위치는 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이다. 이런 이유로 1988년 경희궁이 복원되기 전까지 경희궁의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 <장충단>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신라호텔>의 정문은 경희궁의 <흥화문>을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모양만 동일할 뿐 흥화문은 광화문의 경희궁으로 옮겨졌다. [사진-유영호]

일본의 <육탄3용사>, 한국의 <육탄10용사> 그리고 거짓말

1932년 2월 24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은 한 해전 있었던 만주사변 당시의 발굴 비화를 다음과 같이 보도 했다.

"폭탄을 몸에 두르고 적의 철조망에 뛰어들어 터뜨림으로써 자신과 함께 그것을 분쇄해, 장렬하게 폭사하고 보병의 돌격로를 연 3명의 용사가 있다."

경쟁지였던 마이니치신문도 같은 날 같은 내용의 보도를 하였고, 이에 육군성은 이들 3용사에 대하여 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신문들은 이들 3용사를 영웅적으로 미화한 소책자를 전국의 소학교에 배포하였다. 또 이 두 신문사는 추모곡까지 공모하기에 이른다. 결국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울의 장충단에는 이들을 형상한 <육탄3용사>의 동상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 후 이 동상은 조선의 황국신민화를 위한 표상으로 이용되다 결국 해방이 되어서야 철거되기에 이른다.

   
▲ 일제 강점기 장충단공원에 세워진 <육탄3용사>

하지만 2007년 7월 13일자 아사히신문은 ''황국영웅' 조작 보도에 반성'이라는 기사를 싣고 75년 전의 보도에 대해 사과했다. 기사를 쓴 특파원은 현장에 가지도 않았으며, 전선에서 돌아온 어느 장교의 이야기만으로 꾸며낸 미담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건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내무성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3용사로 알려진 사람은 애초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여 철조망에 내던지고 재빨리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도중 한 명이 쓰러져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그냥 돌아왔다. 그러자 상관은 '천황과 국가를 위해 가라'며 노발대발했다. 되돌아간 세 명이 철조망에 도착했을 즈음 폭탄이 터졌다."

즉 일본 군부는 단순한 사고사를 대대적인 선전전에 활용했던 것입니다. 결국 임무수행도 하지 못한 병사를 영웅으로 만들고 상징화하였던 것이다.

   
▲ 2007년 7월 13일자 아사히신문은 "'황국영웅' 조작 보도에 반성"이라는 기사를 싣고 75년전의 보도에 대해 사과했다. [사진출처-한겨레신문]

나는 이 조작된 이야기를 보면 아직도 매년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우리의 송악산 <육탄10용사>가 떠오른다. 이것은 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5월 송악산전투에서 국군 10명의 용사가 박격포탄을 안고 적 기관총 진지에 몸을 던져 장렬하게 산화하였다'는 것이 골자이다. 하지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펴낸 <6.25전쟁 참전자 증언록 1권>(2003)에 의하면 이것 역시 <육탄3용사>처럼 완전한 조작에 불과하다.

   
▲ 파주 통일공원에 세워진 6.25전쟁 직전 송악산전투의 <육탄10용사>[사진제공-이재석]

증언자는 당시 1사단 13연대장 김익렬이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송악산에서 격전중인 일선부대에 박격포탄을 보급하기 위하여 공병 소대장 박 모로 하여금 10명을 공동 지휘하여 박격포탄을 짊어지고 송악산으로 출발시켰다. 그러나 박 소위는 지형을 숙지하지 못하여 이동도중 적과 불의에 조우하게 되자 부하들을 수습지휘하지 못하고 혼자서 탈출하였다. 대원 10명은 박격포탄을 진채 모조리 적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사단장은 박 소위를 총살하라고 노발대발했다. 이때 박 소위와 친했던 제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이 거짓말을 한다. "사실은 대원 10명이 모조리 포탄을 안고 적진에서 자폭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 보고를 들은 사단장은 그 자리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일본군에는 육탄 3용사가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육탄 10용사가 나왔다고 하면서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김익렬 연대장은 훗날 전쟁 중 "평양에 입성했을 때 육탄10용사가 꽃다발을 받고 있는 사진을 보고 놀랐다고 하면서 이는 순전히 최경록 중장의 조작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는 말을 한다.

   
▲ 육탄10용사에 대한 조작을 입증하는 1사단 13연대장 김익렬의 증언록 [출처-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이처럼 일본의 <육탄3용사>나 대한민국의 <육탄10용사>나 모두가 허위로 조작된 것이다. 일본의 현재는 어떠한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소한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육탄10용사 대한 추모행사는 매년 5월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현실에 그저 난감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정신병동 속에서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장충단> 파괴의 역사 : 대한민국에 의한 파괴

사실 엄격히 따지면 <장충단>의 파괴는 일제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현재의 모습은 거의 대부분 해방 이후 우리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육탄3용사>는 철거되었고, <박문사>는 같은 해 11월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런데 1946년 국군이 창설되면서 북과의 국지적 교전 및 4.3항생과 여순항쟁 등 내전이 벌어지면서 전사한 병사들을 서울 장충사(奬忠祠)에 안치했다. 결국 이렇게 되어 장충단일대는 1956년 동작동 국군묘지가 생기기 전까지 국립묘지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이후 동작동 국군묘지가 생김으로써 이제 서울 장충사는 그 기능을 잃게 되는데 이때가 장충단을 복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오히려 1957년 현 장충제육관 자리에 <육군체육관>을 짓도록 지시했다. 또 1959년에는 장충단이 있었던 박문사 본당 터에 장충단을 짓게 한 것이 아니라 국빈접대를 위한 <영빈관>건설을 지시하였다. 이승만에게 장충단보다 체육관과 영빈관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문제는 다음 정권으로 들어선 박정희정권 하에서의 파괴가 훨씬 컸다. 약 21만평의 장충단이 약 9만평으로 줄어들었다. 공원 부지를 이리저리 불하해 이곳에 중앙공무원교육원, 자유센터, 타워호텔, 재향군인회관, 국립극장 등이 들어선 것이다. 또 이승만 정권에서 시작된 영빈관이 완공되었다.

장충단은 비록 일제 강점기 많이 훼손되었다고 하지만 분명 해방 후 충분히 복원하여 식민청산의 상징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친일파들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은 이승만정권이나 일본군장교 출신의 다까키 마사오(박정희)정권에게 그것을 바라기는 쉽지 않았다. 두 정권 때 장충단 비석을 없애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

<신라호텔>에서 상상하는 미완의 친일청산

<장충단>은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기 시작하여 이후 박문사, 영빈관을 거쳐 현재의 신라호텔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그저 그곳에 위치한 건축물의 현상적 변화이기도 하지만 이 변화의 내면을 알아보면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형상하고 있다. 앞서 장충단이 일제에 의해 박문사로 변경되며 우리의 민족정기가 깨져 나갔다면 이후 영빈관, 신라호텔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이승만 정권 말기 시작된 영빈관건설은 결국 4월혁명과 장면내각의 등장으로 잠시 중단되지만 이후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에 의해 다시 시작되어 결국 1967년 준공된다. 하지만 그 후 몇 해 지나지 않아 박정희의 지시로 영빈관은 삼성그룹 계열사인 임페리얼에 헐값으로 매각되고 만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어떠한 정경유착의 비리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임페리얼이 영빈관 불하 후 바로 없어진 것으로 보아 이는 삼성그룹의 페이퍼컴퍼니일 가능성이 높다.

뿐만 아니라 1973년 기공식을 한 신라호텔은 그 설계를 일본의 다이세이건설에 맡겼다. 일제에 의해 유린된 장충단 터에 위락시설인 호텔을 짓고 그 설계를 일본에게 맡긴 것이다. 그런데 더 웃긴 것은 이 다이세이건설이 바로 장충단을 허물고 박문사를 지은 회사라는데 있다. 박문사 건설사는 당시 오쿠라쿠미토목이었지만 2차대전 후 다이세이건설로 이름을 바꿨을 뿐 동일한 회사이다.

게다가 호텔을 지으며 자금이 부족하자 이번에는 해외자본을 끌어들인다는 명분으로 다이세이건설을 포함한 7개 일본기업의 자본금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호텔신라에 다이세이건설이 자본가로 참여함으로써 어쩌면 지금은 그 형태가 호텔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이 땅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는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2011년 신라호텔은 내부규정상'한복은 위험한 옷'이라며 출입을 금지한 사건에 대하여 보도하는 서울방송 뉴스장면.

현재 신라호텔의 주 고객은 일본인이며, 2004년 일본의 자위대 창설 50주년 행사를 개최한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2011년 어느 여성이 한복을 입고 신라호텔 레스토랑을 찾았다가 미리 예약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한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출입이 거부되어 논란이 일었던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런 황당한 사건도 신라호텔의 건설의 역사를 보면 이해될 지도 모른다는 슬픈 생각을 갖게 된다.

국내 최고건축가 김수근의 성곽파괴, <반공연맹>과 <타워호텔>

장충체육관 뒤로부터 나름 잘 보존된 장충동 성곽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 끝 지점인 옛 <남산타워호텔>(현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부근부터 그 남측에 있던 성곽은 사라지고 없다. 이후 남산기슭으로 올라가야 다시 성곽을 볼 수 있다. 성곽 길로 안내되는 곳을 따라 걸으면 곧 이 호텔을 지나 국립극장이 차도 맞은편에 보이고 이 호텔 옆으로는 <자유센터>가 위치해 있다. 타워호텔과 자유센터 두 건물은 모두 성곽을 끼고 도성 안쪽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무심코 지나 칠 수 있는 곳이지만 우리는 이 두 건물을 통해 분단시대의 반북이데올로기와 그것을 자신의 설계도에 인입시킨 유명 건축가를 떠올려야 한다. 이 두 곳을 설계한 사람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최고의 건축가라 불리는 김수근이다.

<자유센터>는 남북이 치열한 이념대결이 펼쳐지던 1963년 반공이념의 총본산으로 건설된 것이며, 건립 후 '아시아반공연맹'의 본부로도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이례적으로 북향인데, 땅이 없어서 북향으로 지은 것이 아니다. 북을 향해 파도가 치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언제라도 북을 향해 돌진할 듯 한 형상을 설계 속에서 담아낸 김수근의 의도였다.

   
▲ 김수근에 의해 건축된 <자유센터>. 콘크리트 처마 처리가 한국의 건축선과는 하등 관계없는 낯설고 기이한 모양새로 일본 전통건축선에서나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사진-유영호]

그리고 타워호텔은 반공대회를 이유로 수시로 해외인사들이 찾아오는 것에 대비하여 당시 서울에 변변찮은 호텔이 없던 터에 그들의 숙소로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의 층수를 17층으로 설계한 것도 이유가 있다. 6.25참전국 16개국에 한국까지 포함한 총 17개국의 유엔군을 형상한 것이다. 호텔이 완성된 1969년 당시 17층은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하지만 2010년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은 19층으로 증축된 상태이다.

김수근의 설계는 이런 이념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두 건물의 남쪽에 성곽이 지나는 자리인데 그곳 성곽을 헐어내고 이 돌로 두 건물의 북측 담장을 쌓은 것이다. 이는 문화재청의 조사에서 이 축대에 성곽의 각자성돌(글자를 새긴 성돌)이 사용됐다는 사실이 확인됨으로서 밝혀졌다.

   
▲ 옛 <남산타워호텔>로 사진의 좌측 담장 속은 <자유센터>가 있으며. 두 건물의 담장은 뒤편 한양성곽을 파괴하고 그 성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진-유영호]

현재 한국 최고의 건축가로 소개되고 있는 고 김수근의 이러한 이념성과 몰역사성은 이곳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아쉽게도 그의 건축물 곳곳에서 이런 이념성과 몰역사성은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건축가 김수근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갖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건물은 바로 1987년 대학생 박종철 군을 물고문으로 숨지게 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남영동 전철역과 불과 10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공포의 공간이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공개되고 있으니 누구나 찾아갈 수 있다. 여기서 미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일단 현장을 둘러보면 이 건물의 설계는 철저히 고문을 위한 공간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문자와 피고문자의 입장에 서서 고문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세심한 설계자의 배려가 곳곳에 스며져 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의 용도를 사전에 알지 않고는 이렇게 치밀한 공간분할과 배치는 불가능하다.

   
▲ 대학생 박종철 군을 물고문으로 사망시킨 <남영동 대공분실>. 남영역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지만 당시 누구도 이곳이 대공분실임을 몰랐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고문받고 숨졌는지 알 수 없다. [사진-유영호]

김수근은 철저하게 독재정권에 협력하면서 '독재자의 사고와 희망'을 자신의 건축 속에 구현한 사람이다. 88올림픽 주경기장, 초대 주한미군사령관의 이름을 따 지은 워커힐 호텔의 힐탑바, 육군사관학교 교훈탑, 인천상륙작전기념탑, 세운상가, 청계천 3·1고가도로, 주한미군대사관, 주미한국대사관저, 치안본부청사 등 모두 그의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김수근은 광주학살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의 실세 허화평, 허삼수를 1981년 7월 인사동 기생집 '동원'에 데려가 주한 미대사 워커에게 소개시킨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제는 김수근의 몰역사적 설계를 보자. 1967년 그가 설계한 부여박물관은 당시 왜색이 강하다는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지붕 꼭대기가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만나는 지붕선'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이것은 마치 일본의 신사(神社)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남산 자유센터(1963)의 건물 콘크리트 처마 처리도 한국의 건축선과는 하등 관계없는 낯설고 기이한 모양새로 일본 전통건축선에서나 볼 수 있는 모양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설계한 종로의 세운상가(1968)는 조선시대 도성건설에서 궁궐보다 먼저 지어야 할 만큼 중요했던 종묘를 거대한 콘크리트덩어리로 막아 버린 것이다.

   
▲ 김수근 설계의 왜색 논란을 일으켰던 <부여박물관>. 마치 일본 신사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사진제공-마래모해]

이런 그의 건축물을 볼 때 60년대 반공주의의 상징이었던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의 이념적 설계와 성곽파괴가 그에게는 자연스러웠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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