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고위급 방문으로 기록될 북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일행의 방문은 전격성과 이례성으로 인해 숱한 화제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남북 고위급 오찬회담을 통한 제2차 남북 고위급 접촉에 합의한 점이 가장 큰 성과로 남았고, 황병서 일행의 청와대 예방이 성사되지 못한 점이 가장 논란거리로 남았다.

하루 전인 3일 오전에야 북측이 의사를 표명했고 오후에 남측이 수용의사를 전달함으로써 아시안게임 폐막일이자 10.4선언 발표 7주년인 4일, 이들의 전격적인 방문이 성사됐다.

◯ 김정은 제1위원장의 고도한 ‘언론 플레이’

▲ 황병서 총정치국장(가운데)과 최룡해 비서(오른쪽), 김양건 비서가 4일 전격 방남했다. [사진 - 인터넷 사진공동취재단]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최룡해 노동당 비서, 김양건 노동당 비서의 전격 방남을 예측한 전문가나 관료들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즉, 남측에서는 이들의 방남은 뜻밖의 ‘사건’이었다.

북측의 전격적인 제의는 3일 오전 아시안게임 북측 임원진에 포함된 인사를 통해 남측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17일 북측 선수단 본진과 함께 내려온 리충복 민족화해협의회 부회장이 메신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어쨌든 북에서 이같은 최고위급의 인사들을 남으로 내려 보낼 결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뿐이다. 최근 공식 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어 건강이상설까지 나돈 김정은 제1위원장이 간접적으로 건재를 과시한 셈이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5일 ‘KBS 일요진단’ 프로그램에 출연 “여러 사람이 같이 모여서 한 회동에서는 (얘기가) 없었고, 제가 김양건 비서와 차로 이동하면서 북에서 (김정은이) 불편하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건강이 어떠시냐고 했더니 김 비서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얘기했다”고 밝혔다.

또한, 아시안게임 폐막과 10.4선언 기념일에 전격적인 최고위급 간부들의 파견이라는 절묘한 카드를 통해 남북관계의 경색국면을 일거에 돌파하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결단력을 과시했다. 이른바 '김정은 식 리더십'의 진면목을 십분 발휘한 것.

재일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등 최고위급 대표단의 남한 방문은 ‘최고 영도자의 결단’에 따른 것이다. 북한은 남한의 ‘상응한 결단’을 기대한다”고 전했다.

◯ ‘황병서 군복’의 또 다른 의미

▲ 황병서 총정치국장은 군복 차림으로 방문했다. 양측 뒷편 검은 선글라스를 낀 이들은 북측 경호원. [사진 - 인터넷 사진공동취재단]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최룡해 당 비서는 북측 최고위급 인사로서 처음으로 남쪽을 방문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특히 황 국장은 군복 차림으로 등장했으며, 4일 북측 <조선중앙통신>은 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며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인 조선인민군 차수 황병서 동지”라고 호칭했다. 한 마디로 북측 군 책임자다.

언론에서는 그가 군복을 착용한 것을 두고 대북 전단 살포 문제 등 상호 비방.중상 금지와 한.미 군사훈련을 부각시킨 것이라는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분석을 쏟아냈다. 2000년 조명록 당시 총정치국장이 미국을 방문할 당시에도 군복을 입은 것과 동일 선상에서 빗댄 보도들도 나왔다.

그러나 ‘평화의 숨결, 아시아의 미래’를 캐치프레이즈로 한 체육행사에 국가체육위원장인 최룡해 비서뿐만 아니라 그보다 서열이 더 높은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군복차림으로 등장한 것은 북 군부까지 모두 평화의 제전에 함께하고 남북관계 개선을 바라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에서 남측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춘 북측 대표단. 김기남 비서의 현충원 참배 모습과 오버랩 된다. [SBS 캡쳐사진 - 통일뉴스]
2005년 김기남 노동당 비서가 8.15공동행사 참가차 방남해 국립현충원을 참배해 화해의 메시지를 전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북측 대표단은 폐막식에서 남측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일제히 일어나 예의를 표했다.

당시 김기남 비서가 당국 대표단 단장으로 오게 된 배경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선전.선동 분야, 즉 사상을 담당하는 비서로서 가장 대남 강경입장을 고수하고 있던 김 비서에게 직접 남측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전언은 곱씹을 만하다.

한 당국자는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오찬회담에서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몇 마디로도 좌중의 분위기를 아우를 수 있는 무게감이 있었다고 평하고, 황병서와 김양건은 전형적인 관료 스타일로 보였지만 최룡해는 다소 다른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연합뉴스>는 5일 북측 대표단을 면담한 여야 정치인들의 발언을 인용, "참석자들은 이번에 방문한 북측 인사 가운데 황병서 군총정치국장이 확실한 2인자의 자리를 굳힌 것 같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고 보도했다.

◯ 남북 간 ‘썸씽’ 있었나, 없었나?

▲ 오크우드 호텔에서 티타임을 갖고 있는 북측 대표단. 남측은 통일부와 국정원 관계자들이 손님을 맞았으며, 김관진 실장은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 - 인터넷 사진공동취재단]
북측 대표단은 오전 10시 인천공항에 내려 김남식 통일부 차관의 영접을 받았다. 숙소인 인천 오크우드 호텔에서는 류길재 통일부 장관 일행이 이들을 맞아 11시 20분경부터 티타임을 가졌다.

티타임이 시작된 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 뒤늦게 호텔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술렁였다. 기자들은 김관진 실장과 황병서 총국장이 티타임에서 대면한 것으로 관측했다. 그러나 김 실장은 12시 35분경 호텔을 나서 먼저 오찬 장소인 영빈관으로 향했다.

확인 결과, 남북 대표단 간의 티타임은 20여 분정도에 불과했고, 김관진 실장은 북측 대표단은 만나지 않은 채 남측 대표단만 점검하고 첫 공식 대면 장소인 오찬장으로 간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김 실장이 오찬장으로 떠난지 1시간 정도가 지나도록 북측 대표단과 류길재 장관 등 나머지 남측 대표단이 호텔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

구구한 억측이 나돌았지만 북측 실무관계자는 기자에게 “숙소 시설이 준비되지 않아서”라고 확인해줬고, 남측 당국자도 갑자기 호텔을 예약하는 바람에 북측 대표단이 묵을 객실이 ‘체크 아웃’이 안 됐기 때문이라고 말해 의문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시간 정도의 공백을 둘러싼 의혹의 눈초리는 완전히 걷히지 않았고, 최소한 한기범 국가정보원 1차장과 맹경일 통일전선부 부부장 정도의 실무대표급 접촉에서 청와대 예방 문제 등이 다뤄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확인 된 것은 없다.

한편, 오찬회담을 마친 북측 대표단이 3시 50분경 선수촌에 도착 북측 선수단 격려에 나서자, 조만간 남측 대표단이 모여 있는 오크우드 호텔로 돌아올 것으로 보고 2차 남북 대표단 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한때 점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북측 대표단은 호텔로 돌아오지 않고 선수촌에서 곧장 폐막식이 열릴 주경기장으로 향했고, 류길재 장관에 이어 김관진 실장도 오후 5시 38분경 호텔을 나서 주경기장으로 떠났다.  

◯ 청와대 예방, ‘용의’와 ‘요청’ 사이

▲ 한식당 영빈관에서 처음으로 공식 대면한 남북 대표단. 제2차 남북 고위급 접촉에 합의했다. [사진 - 인터넷 사진공동취재단]
가장 관심을 끌었던 사안은 북측 대표단의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 휴대 여부와 청와대 예방 여부였다.

황병서 총정치국장은 오찬회담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따뜻한 인사를 전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찬회담 이후 오후 4시 20분경 호텔로 돌아온 고위당국자는 “북측 대표단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를 가져왔느냐”는 질문에 “친서는 없었지만 메시지는 분명히 가지고 왔다”고 확인했다.

한 전문가는 “북한 최고 실세들의 방문 자체가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인 셈”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한편, 북측 대표단이 호텔에서 오찬회담장인 영빈관으로 향할 때인 오후 1시 35분경 북측 인사는 “오늘 청와대를 예방하느냐”는 질문에 “지켜봐야 한다”고 말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통일부는 오후 5시 33분경 보도자료를 통해 “대통령께서는 북측 고위급 대표단을 만나실 용의가 있으셨으나, 북측이 이번에는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을 위해 왔기 때문에 시간 관계상 청와대 방문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밝혔다.

통일부의 확인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일정을 하루 연장해 5일 오전 청와대를 예방한 뒤 돌아갈 수도 있다는 기대섞인 전망이 끈질길게 나돌았다.

그러나 북측 대표단은 예상외로 선수촌에 오래 머문 뒤 곧바로 폐막식이 열리는 주경기장으로 향했고, 정홍원 총리와의 면담에 이어 여야 정치인들과의 면담을 가진 뒤 폐막식을 지켜보고 공항으로 향했다.

결국 북측 대표단의 청와대 예방은 이뤄지지 못했고, 남측이 의지가 없었는지 북측이 의지가 없었는지를 두고 숱한 추측성 분석이 나오고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청와대 예방) 제의라기 보다도 그럴 의사가 있는 지 물어본 것”이라고 말했고, 다른 당국자는 “우리가 굳이 권할 입장까지는 아니지만 북측이 제안한다면 수용할 의사는 있었다”면서 “북측도 강하게 제기하지는 않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황병서 국장은 폐막식을 앞두고 여야 정치인 면담 과정에서 "이번에는 아시안게임을 위해서 왔으니 (박 대통령을) 다음 번에 뵙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