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9일은 북한의 주요 기념일 중 하나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일' 66주년이 되는 날이다. 흔히 1948년 9월 9일에 창건했다고 해서 '9.9절'이라고 하고 줄여서 '공화국 창건일'이라고도 한다.

북한의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말이 처음 사용된 날인 9.9절이 되면 북한은 매년 행사를 치른다. 올해는 66주년인 만큼 5년, 10년단위 정주년 기념과는 달리 차분하게 보낼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제대로 알려면 일단 북한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9.9절'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본적인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각 단어에는 역사적 의미와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선'은 '고조선'이래 한민족의 유서깊은 나라 명칭으로 '아침의 햇빛이 아름답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표현은 김일성 주석이 1945년 10월 3일 평양노농정치학교 강의에서 '진보적 민주주의'에서 현실적인 특징을 제기한 이래 줄곧 지향한 사회발전의 방향을 담고 있다.

'인민'은 노동자, 농민, 지식인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포함시켰고, '공화국'은 국가권력을 대의제기관에 집중시킨 국가형태를 규정한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조선민주주의민공화국'은 '아침의 햇살이 아름다운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 농민, 지식인이 주인인 대의제국가'로 풀이된다. 물론, 여기에는 북한을 바라보는 이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지만, 일단 그런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있다.

북한, 공화국 창건의 과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로 시작된 항일혁명과 남북분단의 과정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는 내용이 너무 방대하기에 생략하고 북한의 정권 수립 과정에 대해서만 다루기로 한다.

1945년 해방이후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은 국가건설을 최대 목표로 삼았다. 여운형과 조만식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공식 조직되고, 8월 말까지 남북한 전역에 145개 지부가 결성.설치됐다. 그리고 9월 6일 정부수립을 위한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개최됐다.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 그해 11월 도.시.군 지방선거를 통해 1947년 2월 임시가 아닌 공식적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탄생했다. 이는 한반도 통일독립국가 건설의 한 단계로 통일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임시적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에는 김일성, 부위원장에는 김책과 홍명희가 각각 선출됐으며, 내각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과 소련은 자국의 이익에 부합되도록 한반도를 관리했고, 1947년 10월 마지막으로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남북 통합을 위해 남북이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은 남한 나름대로, 북한은 북한 나름대로 정부를 수립하는 단계를 밟았다. 1947년 11월 북조선인민회의 3차회의는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조직, '조선임시헌법초안'을 마련했다.

▲ 김일성 수상이 1948년 9월 10일 북한 정권 수립 선포 이후 정부 정강을 발표하는 모습. [사진출처-우리민족끼리]

1948년 4월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통과된 '헌법초안'은 총 10항으로 △근본원칙, △공민의 기본적 권리 및 의무, △최고주권기관, △국가중앙집행기관, △지방주권기관, △재판소 및 검찰소, △국가예산, △민족보위, △국장 국기 및 수부, △헌법수정의 절차 등을 담았다.

여기서 1장에는 '우리나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 '주권의 대표기관은 리인민위원회로부터 최고인민회의에 이르기까지 인민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선거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또한 통일독립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 중 하나로 평가된다. 남한에서도 1946년 입법의원 선거를 통해 1947년 '남조선과도정부'가 수립됐다. 여기서 '임시헌법'도 발표됐는데, 7장 58조로 구성된 '임시헌법'에는 '조선은 민주공화정체이다', '조선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한다'라고 명시됐다.

즉, 남북은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각자 임시 정부조직과 임시헌법을 만들고 이를 통합하려 했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가 열렸지만 통일독립국가 수립이라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단독선거가 치러졌다. 국회가 구성되고 헌법을 심의.제정하고 정부수립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북한도 같은 해 7월 인민회의를 소집 헌법 실시문제에 대해 심의했다.

그리고 남한 만의 단독선거의 영향으로 최고인민회의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8월 25일에 실시, 572명 중 528명의 대의원이 참여한 가운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가 9월 2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렸다. 당시는 이미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정식 선포된 이후였다.

당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북쪽은 물론 남쪽에서 '지하선거' 형식으로 치러졌다. 그래서 북한은 자신들이 남북을 대표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함께 북한은 뒤이어 발표될 내각 구성 비율로 남북 각각 10명씩 균형을 맞춰, 남북 좌우 계층을 대표하는 통일전선에 입각한 정권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은 5일 헌법 초안을 약간 수정한 뒤 전문을 통과시켰고,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공식 선포했다. 같은 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선거를 통해 위원장 김두봉과 부위원장 홍남표, 홍기주 등을 선출했다.

이어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으로 부터 '정권이양에 관한 성명' 진술이 있은 뒤, 이양 접수에 관한 결정서를 채택했다.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구성에 관한 의제를 상정하고 내각 수상으로 김일성이 선임됐다.

결국, 김일성 수상을 중심으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절차를 거쳐 9일 공식 선포됐다.

북한, 공화국 창건 후속조치와 당시 반응

국가 선포와 함께 김일성 수상은 내각을 구성했다. 초대 내각은 수상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 홍명희, 김책,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민족보위상 최용건, 국가검열상 김원봉, 내무상 박일우 등 22명이다.

이어 김일성 수상은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을 발표했다. 정강에는 "통일된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급속히 건설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할 것이며, 국토의 완정과 민족의 통일을 보장하는 가장 절박한 조건으로 되는 양군 동시철거에 대한 소련정부의 제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담겼다.

또한 "우리 민족이 전 세계 자유애호민족들의 대열에서 동등한 성원으로 되며, 또한 우리 민족의 평등적 지위와 자유를 존중하는 여러 자유애호민주국가와 민족들과의 결실한 친선을 맺도록 도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 정권이 수립되자, 12일 평양에서 경축대회가 열렸고, 지방에서도 군중대회가 개최됐다. 평양 경축대회에는 약 38만 5천여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던 당시 남한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당시 남한은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9일 정당조직에 대한 담화를 발표했지만, 북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국회에서도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 반대 삐라사건과 국가와 국기 제정문제만 논의됐을 뿐이다.

▲ 2013년 9월 '9.9절' 65주년 노농적위군 열병식 및 평양시 군중대회 모습. [자료사진-통일뉴스]

하지만 <독립신보>(1948년 9월 12일자)는 당시 북한 정권 수립에 대한 시민여론의 반향을 상세히 보도했다.

여기서 정지용 시인은 "순간에 밀려오는 무슨 압력을 육체적으로 느꼈다. 이것을 역사와 세기의 중력이라고 할지. 우리같은 사람도 이렇거늘 이것이 남조선 전 지역에서 느끼는 진감이 아니겠습니까"라며 "북조선에서 보기 좋게 해낸 일이 조국과 민족과 다시 세계에 향하여 무슨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짓이 됩니까"라고 말했다.

그리고 남로당, 민주독립당, 인민공화국당, 근로인민당, 사회민주당, 근로대중당 등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남로당은 '인공 수립 지지 경축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남로당은 12일 새벽 일제히 전국적으로 북한 국기(인공기)를 게양하는 '인공기게양투쟁'을 11월 말까지 펼쳐, 독립문과 중앙청에도 인공기가 게양됐다. 8개 시.군 304개 기업소 약 5만명이 참가하는 '2시간 총파업'도 전개, 특히 서울에는 낮 1시를 기해 전차 111대가 2시간 정차하고 시내 일부 전신전화가 두절되기도 했다.

北 '9.9절',남북분단 극복의 의미 강조..1988년 김일성, 남북정상회담 제의

1948년은 남북 어느 한쪽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각기 다른 정부를 수립해 분단이 고착되는 길을 선택한 시초라 할 수있다.

그런 의미에서 광복절의 의미와 함께 대한민국이 수립된 8월 15일이 되면 남측에서는 통일의 필요성을 되새긴다. 북쪽에서도 '9.9절'이 되면 남북분단 극복을 강조한다.

북한에서는 5년, 10년단위 정주년이 되면 성대하게 행사를 치른다. '9.9절'도 마찬가지다. 보통의 경우에는 중앙보고대회, 사진전람회, 강연회 등 간략한 행사를 펼친다.

▲ 2013년 '9.9절' 기념 열병식에 참석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자료사진-통일뉴스]

대표적인 '9.9절' 행사는 1988년이다. '9.9절' 40주년이던 당시 김일성 주석은 '연방제 통일 논의'를 전제로 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다.

이는 앞서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의 '남북한 당국최고책임자 상호방문', 평화통일자문회의의 '남북한 최고책임자회담' 제의 등에 대한 최초의 긍정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불러왔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조국을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하여서는 북과 남 사이에 대화와 협상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며 "조국통일을 실현하려는 진정한 의사를 가지고 우리를 만나러 평양에 찾아오는 데 대해서는 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노태우 대통령을 지목하지 않았지만, '북남 최고위급회담'이라고 언급, 남북정상회담 제의로 받아들여졌다.

이밖에도 '9.9절'이 되면 경축사에서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북측의 입장이 발표된 바 있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의 업적을 칭송하기도 하는데 지난 1997년 '9.9절'부터 모든 문서, 출판, 보도물 등에서 '주체'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9.9절' 65주년에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노농적위군 열병식과 함께 지역 군중대회, 음악회 등 행사가 열린 바 있다.

그리고 중앙보고대회에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조국통일 3대헌장을 비롯한 강령적 지침과 6.15통일시대가 개척되어 조국통일의 앞길에 밝은 전망이 펼쳐지게 됐다"고 말했다.

북한은 올해에도 어김없이 '9.9절'행사를 연다. 북한은 각종 매체를 통해 '9.9절'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2차 남북 고위급접촉 제안에 묵묵부답인 북한이 이번 '9.9절'에서 어떤 대남 메시지를 보낼 지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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