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제는 과거사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며 사법 정의 및 배상이 이뤄지지 않는 한 이 여성들에 대한 인권 침해는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문제이다."

최근 나비 필레이 유엔 인권최고대표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를 향해 일침을 놨다.

일본 정부 관료들의 망언과 모르쇠에도 불구하고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 해결의 방법은 단순한 사죄가 아니라 전쟁범죄를 해결하는 방식인 법적 배상과 교과서 기록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2차대전 당시 대표적인 전쟁범죄인 일본군'위안부' 문제. 피해자의 목소리로 출발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20여 년의 역사를 살펴보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로 시작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자료사진-통일뉴스]

우선, 일본군'위안부'란 용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90년 초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됐을 때, '정신대(挺身隊)'라는 용어가 사용됐다. '정신대'는 '일본 국가 혹은 천황을 위해 솔선해서 몸을 바치는 부대'라는 뜻으로 일제가 노동력 동원을 위해 만든 용어였다.

하지만 정신대에는 근로와 위안부라는 의미가 혼합된 것으로 '군 위안부'란 용어로 사용됐으며, 일본에서 '종군 위안부'라는 말로 사용됐다. 그러나 '종군'은 군을 자발적으로 따라다녔다는 의미로, 강제성을 내포하지 않고 있다. '위안부'는 군인의 몸과 마음을 위로한다는 의미이다.

이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시민사회는 '일본군'이라는 가해자를 명확히 하고 역사적 용어인 '위안부'를 결합해 일본군'위안부'라는 용어로 사용하기로 했다.

국제사회에서는 '위안부'를 'comfort women'으로 표기했지만, 일본군'위안부' 제도가 강제동원과 강압에 의한 제도였음을 명확하기 하기 위해 '일본군'성노예'(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고 사용한다.

하지만 '성노예'라는 지칭은 피해자들에게 이중의 고통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국제용어로는 성노예라고 표현하되, 국내에서는 일본군'위안부'로 칭하고 있다.

▲1991년 처음 공개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 국민기금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제공-정대협]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 운동의 시작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1990년 1월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가 한 일간지에 취재기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어 본격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운동단체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같은 해 11월 발족했다.

그리고 해방 64년 만인 1991년 8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가 첫 공개증언을 했다. "당한 것만 해도 치가 떨리는데 일본사람들이 정신대란 사실 자체가 없었다고 발뺌하는 것이 너무 기가 막혀 증언하게 됐다"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은 한국 사회에 파장을 불러왔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이 여성들을 끌고 갔다는 이야기만 전해졌을 뿐, 잊혔던 역사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같은 해 9월 '정대협'에서 '정신대 신고전화'를 개통,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에 힘을 입은 피해 여성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어 1992년 당시 외무부(현재 외교부) 내에 '정신대실무대책반'을 조직, 전국 시.군.구를 통해 피해자 신고를 접수받았다.

지금까지 정부에 공식 등록된 일본군'위안부'피해자는 총 237명. 이 중 2014년 8월 현재 54명이 생존해 있다.

▲1992년 1월 첫 수요시위. [사진제공-정대협]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시작된 문제 해결 운동의 목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다. 그리고 그 해결방법은 1992년 1월 시작된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수요시위)에 명시된 내용으로, 지금까지도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첫 수요시위에서 제시된 문제해결 방법은 △일본정부는 조선인여성들을 위안부로 강제연행한 사실을 인정하라, △그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라, △만행의 전모를 스스로 밝혀라, △희생자들을 위하여 추모비를 세워라, △생존자와 유족들에게 배상하라, △이러한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역사교육 속에서 이 사실을 가르쳐라 등이다.

이는 문제해결 운동과정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범죄인정, △진상규명, △국회결의 사죄, △법적배상, △역사교과서 기록,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 등으로 보다 구체화됐다.

▲1992년 12월 일본에서 열린 '전후 보상 국제공청회. 여기서 남측 김학순 할머니(오른쪽)와 북측 김영실 할머니(왼쪽)가 만났다. 두 할머니는 같은 위안소에 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김학순 할머니는 김영실 할머니를 만나 "위안소에 같이 있었잖아"라고 말했다.  [사진제공-정대협]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국내, 국제, 남북 연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로 출발한 문제해결 운동은 국내와 국제, 남북 등 다양한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정대협이 문제해결운동의 중심에 서 있다.

1991년 시작된 수요시위는 매주 수요일 낮 12시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에서 열리고 있으며, 현재 1138차를 앞두고 있다.

국내적으로 피해자들과 정대협은 한국정부를 상대로 문제해결을 강하게 촉구하고 있다. 과거사 문제는 '조용한 외교'로 일관한 정부였지만 2011년 헌법재판소 판결은 전환점을 가져왔다.

당시 헌재는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 부작위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다. 청구권 협정 3조는 협정의 해석과 실시에 대한 분쟁이 발생할 경우 정부의 외교적 해결 의무와 회부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헌재는 "위안부 문제로 인해 분쟁이 발생했는데도 정부가 양자협의, 중재회부 등의 절차를 진행하지 않고 있다"며 "'소모적인 법적 논쟁으로의 발전 가능성', '외교관계의 불편'이라는 매우 불분명하고 추상적인 사유를 들어 그것이 기본권 침해의 중대한 위험에 직면한 청구인들에 대한 구제를 외면하는 타당한 사유가 된다거나 또는 진지하게 고려돼야 할 국익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에 정부는 지난 2011년 9월과 11월 두 차례 일본정부를 상대로 양자협의를 요청했지만, 일본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또한, 한일 외교부가 세 차례 국장급 협의를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1995년 방한한 라다카 쿠마라스와미 유엔 인권위원회 여성폭력특별보고관.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남북.해외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례를 직접 청취한 유엔의 첫 보고서이다.  [사진제공-정대협]

정부를 상대로 한 압박 외에도 정대협과 피해자들은 국제사회의 연대를 이끌어 내 외교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 연대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유엔 인권위원회 여성폭력특별보고관 보고서(1996, 2003), 게이 맥두걸 '무력분쟁하 조직적 강간과 성노예 문제 등에 대한 유엔 인권소위원회 특별보고관' 보고서(1998) 등이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유엔의 첫 보고서로 남북.해외의 사례를 수집, 일본군'위안부'는 '군사적 성노예'라고 처음 규정했다.

그리고 "위안소 설치.징집.운영은 국제조약 및 국제인도법에 반하며, 인도에 반한 죄에 해당한다"고 지적, 특히, "한일조약에 포함되지 않았고 일본은 국제 인도법상 법적 책임과 도의적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면서 △법적 책임 인정, △행정심판소 설립을 통한 배상, △관련 문서 공개, △성노예 인정 및 서면 사죄, △교과서 기록, △책임자 처벌 등 피해자들의 요구사항을 일본정부에 권고했다.

게이 맥두걸 보고서도 "위안부 여성들의 징집 및 처우는 노예제도를 금지한 국제관습법에 위반되며 전쟁범죄이고 반인도적 범죄"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개별 범죄자뿐 아니라 군 장교 및 정부 관리 등 위안소 설치, 운영에 관여한 상급책임자들도 형사책임을 져야 한다"며 "일본정부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 대해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국제노동기구(ILO) 전문가위원회 보고서(1999), 유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 위원회(CESCR) 보고서(2013), 유엔 고문방지위원회(CAT) 보고서(2013), 유엔 시민적.정치적 권리규약(B규약) 위원회 의견서(2014) 등에서도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고 있다.

유엔 외에도 미국 하원, 네덜란드 의회, 캐나다 의회, 유럽의회 등 5개국 의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 촉구 결의안이 통과됐다. 그리고 국제 시민사회가 연대해 2000년 일본에서 '일본군'성노예 전범 국제법정'을 열고, 히로히토 일왕에게 유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 2007년 서울에서 열린 '8차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 아시아연대회의'. 이날 회의에서 남북이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가 저지른 전쟁범죄로 한국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당시 조선은 물론,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일본군이 주둔한 국가의 여성과 당시 인도네시아에 거주한 네덜란드 여성들도 '위안부' 피해자라는 점에서 피해국 범위가 넓다.

특히, 해방 이후 분단을 겪은 한반도의 경우에도 '위안부' 문제는 남북한이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북 간 연대가 중요하다.

남북은 1991년 5월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에서 처음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여운형 선생의 딸 려원구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서울을 방문했고, 1992년 이효재, 윤정옥 정대협 공동대표가 평양을 방문,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논의했다.

심지어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등 긴장국면에서도 남측 인사들이 평양을 방문하는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 간 연대활동은 활발했다.

남북은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아시아지역 토론회'(2002년 평양), '8차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 아시아연대회의'(2007년 서울) 등 남북을 오가며 다양한 활동을 해왔고, 2007년 당시에는 남북이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지난 3월 중국 선양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해결을 위한 남북.해외 여성토론회'가 열렸다.

▲ 2002년 평양에서 열린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아시아지역 토론회'. [사진제공-정대협]

'위안부' 문제, 언제 해결될 것인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은 당사자인 일본 정부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가 제기되던 199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왜곡하거나 망언으로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

물론,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담화(고노담화) 발표는 일본 정부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고노담화 발표 이후 일본 정부는 법적 배상이라는 해결책이 아니라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국민기금)을 만들어 민간차원의 위로금을 지급하려는 술수를 부려, 피해자들과 피해국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2011년 12월 서울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평화비'.  [자료사진-통일뉴스]

여기에 최근 아베 정권은 '고노담화'를 검증, 외교적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며 폄훼해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하며, 이미 실패한 '국민기금' 카드를 다시 꺼내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완전한 해결은 전쟁범죄 해결 원칙인 공식 사죄, 책임자 처벌 그리고 법적 배상이다.

특히, 법적 배상은 일본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제도 범죄를 공식 인정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모두 해결됐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1965년 당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다뤄지지도 않았으며, 반인도적 불법행위 및 식민지 지배에서 유래하는 '청구권'은 협정 대상이 아니었다.

현재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제도 자체를 부인하고 있지만, 1993년 고노담화 발표를 기점으로 이전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자체가 다뤄지지 않았고,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일본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1965년 청구권 협정 체결 당시 해결됐다는 주장에 맞지 않다.

▲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에 새겨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 [자료사진-통일뉴스]

2011년 헌재 판결 이후, 한국 정부도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 청구권 협정 논의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양자협의를 제안했지만, 일본정부는 외면, 일각에서는 중재위원회를 구성해 회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본 정부의 태도를 볼 때,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그래서 유엔 등 국제사회의 연대와 압박이 필요하다. 또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잊지 않는 여론형성도 중요하다.

그렇기에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잊지 않고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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