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우리에게 만들어진,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를, 앞으로 우리를 위한 역사를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길을 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2005년 9월 19일, 2년여의 6자회담을 거쳐 역사적인 9.19공동성명을 채택한 직후 한국측 수석대표인 송민순 당시 외교부 차관보가 기자들 앞에서 밝힌 소감의 일성이다.

실제로 최초의 근대적 국제조약이랄 수 있는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국제조약은 어김없이 불평등 조약이었고, 현재의 한반도 분단상황을 규정하고 있는 1953년 정전협정에 대한민국은 아예 당사자로 참여하지도 못했다.

9.19공동성명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4대 강국과 나란히 명기되고, 협상을 통해 조율된 합의사항을 공동성명으로 발표한 것 자체가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셈.

특히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과 맺은 숱한 협정들은 이른바 철저한 ‘갑을 관계’에 입각한 불평등 조약의 전형이었다. ‘한미SOFA(주둔군지위협정)’를 비롯해 최근 협상이 끝났던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SMA)’, 현재 개정협상이 진행 중인 ‘한미원자력협정’ 등이 바로 그러하다.

그런데 한미원자력협정 개정협상 소규모 협의를 마친 직후 외교부 관계자는 31일 기자들에게 “전면적인 개조, 리모델링이 아니고 다 부수고 쌓는 재건축 형식”이라며 “협정문이 나오면 아마 여러분이 새로운 협정문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키웠다.

사실 지금 적용되고 있는 1974년에 체결된 한미원자력협정은 미국이 핵원료를 제공하고 한국은 재처리나 변형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한 일방적 협정으로,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의 우라늄 농축.재처리 권한을 금지하는데 목적이 있다.

당시는 우리가 단 한 기의 원자로도 가동하지 않던 40년 전이고, 지금은 가동 중인 원전만도 23기에 이르고 원자력발전소를 해외에 수출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40년 전의 한미원자력협정은 당연히 리모델링 수준이 아니라 재건축 수준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당국자는 재협상에서 ‘농축.재처리 권한’ 문제를 묻는 질문에 “미국산 핵연료와 장비, 부품, 기술을 근거로 해서 그걸 이용할 때 어떻게 협력하느냐, 상대편 동의를 어떻게 좀 수월하게 받느냐 하는 방식”문제라며 “우리가 권리가 상실돼 있는데 회복한다는 차원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농축.재처리는 그런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의 일부인데 거기에 너무 포커스를 맞추는 것은 협정 전체 의미나 방향과 관련해서 조금 너무 과도한 의미부여가 아닌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원자력협정의 핵심이랄 수 있는 농축.재처리 권한은 미국이 허용할 리 없기 때문에 미국산 핵원료를 들여와 이용할 때 편리함을 보장받는 데 협상의 초점을 두고 있다고 스스로 실토한 것이다.

앞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이던 지난해 1월 “안정적 에너지 공급과 핵폐기물 처리 문제가 절실한 만큼 미국은 국제사회가 신뢰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을 제시해주기 바란다”고 말하는 등 여러 차례 농축.재처리 권한 확보에 의욕을 내비쳐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강경한 미국의 입장을 잘 알고 있는 윤병세 외교장관은 재처리 권한 문제를 ‘파이로 프로세싱’이라는 미래 신기술 문제로 슬쩍 우회하며 방향을 틀기 시작했고, 결국 원자력협정 개정협상은 농축.재처리 ‘권한’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양국 간 ‘협력 방식’ 문제로 바꿔 버린 것이다.

박근혜 당선인의 말만 믿고 ‘감히’ 미국에 맞서 핵주권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한때나마 착각했다면 냉엄한 현실정치를 전혀 모르는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놀림받기 딱 알맞은 상황에 처했다.

주권국가의 상징인 군지휘권 중 전시작전지휘권을 미국이 더 오랫동안 맡아달라며 재차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는 한국의 보수 정권이 불평등한 한미원자력협정을 바로잡을 것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조차 후보시기 “반미주의면 또 어떠냐”고까지 말했지만 임기 중에 결국 이라크 파병이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 등에서 미국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믿을 것은 국민 밖에 없다. 일본과의 군사정보보호협정이 야당과 언론, 국민의 여론에 밀려 국회비준의 문턱을 넘지 못했듯이 미국과의 불평등한 협정들 역시 깨어있는 국민의 힘으로만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불평등한 국제조약, 특히 미국과의 뿌리깊은 ‘갑을 관계’에 근거한 불평등 협정들을 바로잡지 못한 채 어떻게 주권국가로서 당당히 남북통일을 주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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