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한국화의 치명적 단점은 보편적 철학의 결핍과 채색의 부재이다.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미학과 창작의 조형원리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에 의한 침탈과 해방, 분단, 한국전쟁 따위를 겪는 질곡의 역사를 달려온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철학이 성립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다.
지배계층인 선비가 없어졌기에 이들에 의해 주도된 철학도 그 역할이 끝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유학은 단번에 없어지지 않는다.
또한 유학이 추구하는 완성된 인격체, 즉 군자(君子)와 실천 덕목인 인의예지신염치(仁義禮智信廉恥)는 특정한 철학이라기보다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가깝다. 사회주의 중국이나 서구화된 일본에도 여전히 유학적 가치는 당대의 철학과 결합하면서 발전한다.
인본주의, 민주주의, 시장경제라고 하는 서구 철학을 수용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서구 철학을 수용한다고 황인종이 백인종이 되는 것도 아니고, 검은머리가 노랑머리로 바뀌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 철학과 서구철학의 유기적인 결합이다.
이러한 서구적 가치를 유학적 가치에 제대로 녹여내지 못한 것은 화가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실제 한국화 작가들은 수묵화운동과 같은 여러 미술운동을 통해 서양미술과 우리그림을 결합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이러한 미술운동을 통해 수묵화가 발전하고 세계적인 화가를 배출하기도 하지만 큰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매체, 즉 재료와 기법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먹과 붓, 한지라는 미술재료를 버리면 한국화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또한 수묵화라는 단색화는 천연색의 서양화와 차별하면서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전통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미술에서 채색이 없는 그림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가장 큰 의문은 조선의 천재적인 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궁중회화를 발견하고 수용하지 않았는가하는 것이다. 궁중회화는 진채화이다. 규모도 크고 화면도 웅장하다.
궁중회화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조직적으로 은폐된 것은 맞지만 궁중회화 작품이 궁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박물관에도 있고 기업이나 개인이 소장한 경우도 많았다.
만약 한국화가 진하고 선명한 궁중회화의 채색기법과 보편적 가치인 ‘생명력이 풍부한 세계’를 수용해서 발전시켰다면 우리 미술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궁중회화, 한국화, 민화가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발전했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 도화서 화원이 되는 것이 최대의 꿈이었다. 궁중화원이 된다는 것은 단지 직위를 얻어 출세를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궁중화원은 수많은 전통적인 명작을 통해 배우고 경험하며, 국가에서 무료로 지급하는 채색물감과 같은 고급미술재료를 사용함으로써 표현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또한 중요한 국가 행사에 참여하여 역사를 기록하는 역할을 하였다.
안으로는 후학을 길러내고 돈 많은 양반집에 불려 다니면서 그림을 그려주고 재물을 얻었다. 또한 장롱이나 의복, 장신구 따위를 만드는 장인(匠人)에게 도안화된 그림을 그려주고 지전이나 표구사에 소속된 화공들에게 채색법을 가르치거나 복제할 원본그림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런 미술활동을 통해 화가는 그림으로 존재의 가치를 높일 수 있었고 짧은 인생을 완성해 나갔다.

▲ 궁중회화, 수묵화, 민화는 모두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우리그림이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버린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간교한 계략에 의해서이다. 이것이 유구한 철학적 전통과 탁월한 감성과 놀라운 손재주를 가진 우리민족이 미술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그림의 통합은 민족의 통일과 더불어 반드시 실현해야할 민족적 과제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궁중회화의 바탕에는 이런 화가들의 작품세계가 있었다.
화가들의 작품 중에서 완성된 형상이나 기법은 궁중회화에 녹아들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정선의 금강산도, 김홍도의 신선도, 심사정의 화접도 따위는 십장생도, 화조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화원은 종신직이 아니었다. 매번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고, 유명한 화가라도 관직에 나가거나, 나이가 들면 도화서를 퇴직했다.
실제 같은 십장생도나 오봉도라도 그림의 화풍이 조금씩 다르고 실력의 차이도 있다. 이것은 도화서를 주도하는 화가의 능력이나 화풍에 따라 궁중회화가 변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궁중회화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해 온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전문미술교육을 받은 화가들이 있었다.
반대로 궁중회화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천재적 능력을 가진 화가들에 의해 완성된 그림이기 때문에 미술교과서의 역할을 한다. 화가는 궁중회화를 통해 전통을 배우고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잡았다. 궁중회화를 시대의 흐름에 맞게 혹은 개인의 정서나 능력에 맞게 녹여내는 과정에서 새롭고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 나갔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의 한국화가 위기를 극복하고 더 나은 발전을 해 나가는데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수묵화의 장점을 살려나가면서 궁중회화의 진채기법과 보편적 생명사상을 수용해야 한다. 앞으로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주도하는 태평양의 시대가 펼쳐질 것이다. 또한 궁중회화는 단지 우리나라만의 국한된 내용과 형식의 그림이 아니다. 중국, 일본, 북한을 비롯한 유학적 가치를 수용하는 모든 나라들의 정서와 형식이 총합되어 있다.
한국화 작가들은 미술대학에서 전문미술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기본기량이 튼튼하고 열정이 넘치는 젊은 한국화 작가들이 궁중회화를 교과서 삼아 전통을 익히고 시대적 흐름과 개인의 정서를 결합시킨다면 세계적인 화가로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궁중회화는 우리그림의 교과서이다. 전문교육을 받은 한국화가들은 궁중회화를 통해 전통과 기법을 배우고 익히며 나아가 당대의 철학을 반영한 새롭고 다양한 작품을 창작해 나가야 한다. 더불어 민화는 대중 속에 파고들어가 미술품의 유통과 판매, 홍보를 유연하게 담당하여 우리그림의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 이것이 모두가 공생공영하는 유일한 길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민화는 흔히 속화(俗畵)라고 불리던 대중미술이다.
민화의 용어가 일본인 문예가의 의해 즉흥적으로 만들어져 사용되다보니 ‘민중그림, 민족그림’ 따위의 혼란이 생겼다. 이 용어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경우도 많은데, 간단하게는 그냥 ‘풍속화’라고 하면 될 일이다.
어쨌든 민화는 궁중회화와 화가들의 수묵담채화가 녹아내리면서 만들어진 대중그림이다. 민화가 독립적으로 존재한 역사도 없거니와 근거도 없다.
화가는 민화의 상징이나 내용을 만들어 주었다. 또한 궁중회화를 대중의 입맛에 맞게 변주하였다.
민화의 장점은 원초적 욕망의 구현이라는 내용, 직관적인 형상, 화려한 색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단점은 못 그린 그림, 잘못 그린 그림이 많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본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그림인 것이다.
민화의 핵심은 융합이다.
융합은 완성된 것과 완성된 것을 결합하거나 완성된 가치에다 당대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결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완성된 형식이 없으면 융합은 불가능하다.
완성된 밥이 있기 때문에 비빔밥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채소를 넣든, 혹은 고기를 넣고 치즈를 넣어도 비빔밥이 된다. 비빔밥의 원리에 의해 다시 김밥으로 발전한다. 김밥이 있다면 다양한 고기와 채소를 넣어 변주시킨다. 안으로 말든, 밖으로 말든 간에 밥이라고 하는 완성된 음식이 다른 음식과 융합이라는 과정을 통해 대중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민화는 한국화와의 결합이나 궁중회화의 연결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자칫 민화의 존재가 부정될까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민화는 수묵화나 궁중회화와의 연결이 끊어지면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 역사와 전통을 가지지 못한 그림은 짧게 유행하고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민화이론가들은 민화를 고구려 고분벽화에 연결하여 독자성을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논리로는 민화의 독자성을 획득하기 어려울 뿐더러 오히려 우리 전통미술 전체를 부정하는 결과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 다시 말해, 수묵화나 궁중회화와 전면전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
민화가 궁중회화나 수묵화에 뿌리를 연결하는 일은 민화의 발전에 더없이 좋은 일이다.
궁중회화는 창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민화와 충돌할 일이 없다. 또한 수묵화와 민화는 내용적인 부분에서 겹쳐지지 않는다. 한국화는 유학이라는 미학적 가치를 추구한다. 만약 한국화가 부귀영화나 불로장생이라는 내용을 추구하면 곧바로 민화가 된다. 잘 그린 민화작품이 되는 것이다.
특히 현대는 대중의 시대이다.
대중그림인 민화는 대중성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민화는 미학이나 조형성 같은 그림그리기 자체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대중의 정서와 흐름을 바탕으로 대중적 소통을 이끌어내는데 주력해야 한다. 대중적 소통이란 대량제작을 통한 판매와 판매조직, 해외 판매, 관광상품 판매, 관혼상제와 결합한 선물 판매, 유통조직의 확대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어린이를 위한 미술교육, 노인의 치매방지 미술, 외국인의 민화체험 따위와 결합한 대중적 미술교육과도 연계할 수 있다.

궁중회화, 수묵화, 민화는 모두 소중한 우리의 미술문화유산이다.
또한 우리에게 이렇게 다양한 미술문화가 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완성된 궁중회화가 튼튼한 뿌리를 가지고 자리잡고 있으면, 한국화는 당대의 철학을 반영한 다양한 실험과 질 높은 작품을 창작하고 민화는 이러한 자양분을 대중적으로 녹여내어 소통하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민족이 통일되어 세계의 중심으로 웅비할 날을 고대하는 것처럼 궁중회화, 한국화, 민화가 하나로 통일되어 우리미술의 아름다움을 세계만방에 알려나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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