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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담론 활성화에 일익 담당하겠다" 제16회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한 정세현 원광대 총장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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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6.26  19:5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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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일 정세현 원광대 총장(왼족)이 임동원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제 16회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고 있다.  [사진제공 - 한겨레신문]
“이제 한겨레통일문화상도 받았으니까 진짜 민간인 신분으로 통일운동을 좀더 적극적으로 해서 상값을 해야 하지 않겠나.”

26일 제 16회 한겨레통일문화상을 수상한 정세현(69) 원광대 총장은 오는 12월 총장직을 물러나면 민간 통일운동에 보다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정세현 총장은 25일 낮 서울 신촌 이화여대 앞 한 커피숍에서 <통일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27년간의 공직생활과 10년간의 민간활동을 되돌아보며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나는 인터뷰나 대담 이런 것을 통해서 통일담론을 계속 이끌어가고 활성화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 편하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각각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이례적인 경력은 물론, 이명박 정부 때까지 열린 606회의 남북대화 중 99회의 회담에 관여했고, 총 226건의 남북합의서 중 67건에 참여한 특별한 기록을 보유한 정 총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는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을 추진한 일과 대북 쌀.비료 지원시 ‘대한민국’을 표기한 포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협상한 일을 꼽았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인터뷰 본문 참조)

정 총장은 주로 정부에서 통일관련 업무를 담당하다 퇴직 후 민화협 상임대표의장 등을 맡은데 대해 “'갑'의 위치에 있던 시간이 훨씬 길고, '을'의 위치에 있던 기간이 6월 30일이 딱 10년이다”며 “참 어렵더라”고 말했다.

“민간차원에서 일을 하면서 법대로만 하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했지만 이명박 정부 이후 실제로는 정부의 ‘불허’ 장벽에 가로막혀 “너무 힘들었다는 기억만 가지고 있다”는 것.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하면 떠오르는 ‘정세토크’도 이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정 총장은 “글보다는 말로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정세토크’를 시작했던 것”이라며 “다시 세월이 좋아지면 어느 것이 길인지, 어느 것이 길이 아닌지 전달하려면 그렇게 기록으로 남겨둬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정세현의 정세토크』출간 기념으로 2010년 11월  <통일뉴스>와 인터뷰한 정세현 전 장관. [자료사진 - 통일뉴스]
통상 정세 관련 인터뷰에 익숙한 정 총장은 이날 수상 기념 인터뷰에서도 “(정부) 안에 있을 때는 별로 몰랐는데 밖에 나와서 보니까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와 관련해서도 너무 미국 눈치를 보는 거다”라며 “오바마 정부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2012년 11월 ‘아시아로의 귀환’을 차기 정부의 아시아 정책 방향으로” 정한데 주목하고 “중국의 세력이 커지고 미국이 그걸 견제해야 되는 상황이 되면서 북핵문제를 풀면 안 되겠다고 계산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북핵문제와 6자회담 재개를 두고 미국 등이 ‘중국 역할론’을 부각시키는 점에 대해서도 “책임을 자꾸 떠넘기는 중국 책임론”이라며 “세계평화를 어지럽히는 북한에 대해서 중국이 가장 영향력을 많이 행사할 수 있는데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되고 있다고 책임을 넘기면서 사실상 6자회담이 열리지 않기를 바라는 쪽으로 입장을 정했다고 본다”고 해석했다.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도 “북쪽이 리더십 교체가 있고 그러니까 곧 망할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복잡하게 반대급부를 줘가면서 회담 같은 것을 할 필요 없이 나중에 한방에 엎어치기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잘못된 계산을 하고 있는 것 같다”며 “그것이 통일대박론이고 또 통일대박론과 한짝을 이루는 북한붕괴론”이라고 짚었다.

정 총장은 미리 배포한 수상소감에서도 박 대통령이 “길을 두고 산으로 갔다”며 “만약 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6.15와 10.4정신을 존중하면서 한반도신뢰프로세스를 발표 당시 원안대로 추진해 나가면 임기 중에 통일 관련해서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겨레통일문화상 심사위원회가 “정 총장이 남북관계는 물론 북미, 한미, 한중, 일중 관계 등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 대한 명확한 진단과 창조적 대안제시를 통해 정부의 정책생산과 국민의 이해를 돕는데 앞장서 와음을 높이 평가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듯이 앞으로의 그의 활약이 기대된다.

다음은 정세현 총장 시상식을 하루 앞두고 나눈 인터뷰 내용이다.

“민간 통일운동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

   
▲ 제16회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을 앞둔 25일,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정세현 원광대 총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제16회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먼저 소감 한말씀 해달라.

■ 정세현 총장 : 원래 한겨레통일문화상은 민간부문에서 통일문제에 관련한 활동을 하거나 담론을 이끌어가는 분들에게 드리던 상인데, 나한테 준다고 해서 좀 의아했다. 나는 정부에서 나온 지는 10년이 돼 가지만 기본적으로 국록을 받으면서 통일문제를 직업적으로 했던 사람이다.

다만, 상을 주는 이유는 앞으로 민간인 자격으로 통일운동을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받는다.

□ 현재는 원불교 재단인 원광대 총장으로 재직 중인데, 활동하던 지역도 바뀌고 분야도 바뀌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 원래 지역적으로는 내가 전북 출신이기 때문에 연고는 있다. 그리고 우리 집안의 어른들이 독실한 원불교 교도들이고, 나도 원불교 입교 자체는 40년이 넘었다. 열심히 안 나갔다 뿐이지 집안은 그렇다.

내가 원광대학교 총장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다. 아마도 학교 측에서 행정부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공무원 경력을 좀 활용할 필요가 있어서 가게 되지 않았나 싶다. 통일문제와는 다르지만 행정은 어떻게 보면 통하니까.

그리고 나는 기본적으로 공무원은 싫고 교수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교수 되려고 공무원을 하면서도 77년부터 계속 대학에 출강했다. 교수의 꿈을 접은 86년까지 한 10년 동안 열심히 대학에 출강했다. 그때는 1년에 최소한 두 편의 논문을 학술지에 써야 하는데, 그런 조건을 갖춰 놓았다. 그런데 안 되더라. 두 번 정도는 거의 다 되는 걸로 알았다.

□ 결과적으로 국가를 위해서 오히려 잘 된 것 아닌가?

■ 잘 된 게 아니라, 팔자에 없는 것 같다.(웃음)  대학 총장 제의를 받은 것도 세 번째다. 정부에서 나오고 난 직후에 두 군데서 총장 제의를 받았었는데, 서울 시내와 수도권에 있는 대학인데 그때는 안 갔다. 멀리 떨어진 여기로 오게 된 것은 팔자에 있기 때문에, 한 번은 군대 때우는 식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가게 됐다.

□ 총장으로서 행정업무 등에 어려움은 없었나?

■ 처음에 가서는 좀 어려웠다. 왜냐하면 우선 같은 행정은 통한다고 하지만 교육행정과 정부행정은 좀 다르고, 또 하나는 자기 학교 교수 출신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상당히 저항이 있었다.

그런데다가 그동안에 교육부에서 대학교들을 평가하는 지표들이 있는데, 이전에 지표관리가 소홀히 됐다. 그래서 가서 업무도 파악되기 전에, 한학기 만에 ‘정부 재정지원 제한 대학’이 되고 ‘학자금 대출 제한 대학’이 됐다. 별로 성적이 좋지 않은 대학이 받는 패널티 두 개를 다 받은 거다.

그것을 회복하는데 1년 동안 동분서주, 불철주야로 교수들을 계속 독려했다. 결국 졸업생들을 취업시키는 문제다. 그 다음에 지방대학의 어려운 점이 학생들이 중간에 서울로 가버리는 것이다. 재학생의 중도탈락률을 낮추기 위해서 교수들을 독려하다 보니까 내가 인심은 잃었지만 학교의 평가는 올라갔다.

□ 어디 가나 일복은 많은 것 같다.

■ 일복이 많다. 그전에 통일부에서 남북대화 사무국으로 발령이 나서 갔는데, 바로 ‘판문점에서 접촉을 하자’는 전통문을 보내 온 거다. 오랫동안 막혀있던 남북관계가 다시 시작되는 일이 있었다. 또 98년 통일부 차관으로 발령 받은 후에 바로 비료회담이 시작되기도 했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 “가장 큰 보람”

   
▲ 지난해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문재인 통합민주당 후보와 함께 도라산역을 찾은 역대 통일부 장관들. 정세현 전 장관은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을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았다. 오른쪽부터 정세현, 임동원, 문재인, 정동영, 이재정, 이종석. [자료사진 - 통일뉴스]
□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자 선정 이유에 수많은 남북회담과 합의서 작성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회담이나 합의서는?

■ 계산해보니까 이명박 정부 끝날 때까지 606회의 남북대화 있었는데 99회 회담에 내가 관여했다. 7분의 1이 조금 넘는다. 그리고 1971년 적십자회담이 시작된 뒤부터 그동안 남북 간에 합의서가 226건이 만들어졌고, 그 중에 67건에 관여했다. 내가 통일부 장관으로 있을 때는 총 95회의 회담을 하고 나왔다. 물론 그전에도 차관 시절이나 대화사무국 시절, 청와대에 있을 때도 회담에 참여했다.

그런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회담 보다는 남북 철도.도로를 연결한 일이다. 2000년 9월 18일 철도 연결식을 했다. 그런데 그해 초겨울이 되면서 북쪽 공사가 중단됐다. 2001년 들어와서 ‘역시 남북 간에는 합의해 봐야 소용 없다’는 비판적 여론이 많이 일어나고 ‘북한과는 무슨 약속도 소용없다’는 식의 반북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나는 2001년 5월에 갑자기 국정원장 특보로 발령이 났다. 나한테 주어진 역할은 통일정책 홍보를 적극적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청와대에 보고서를 썼다. ‘북쪽 구간의 공사가 중단된 것은 그 사람들이 합의를 이행할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공사를 계속할 자재가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주고 해야 한다. 주지 않으면 안 될 거다’라고 썼다.

당시 비서실장에게 보고서를 보냈는데 대통령한테까지 보고가 안 됐는지 반응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2002년 연초에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을 앞두고 각계 전문가들을 대통령이 먼저 만나 본 다음에 말씀할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이 있었다. 거기에 내가 불려갔는데, 그때 내가 대통령 면전에서 직접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분은 원래 마음에 안 드는 이야기를 해도 표정이 포커페이스고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해도 마찬가지다. 정치 9단이니까. 물끄러미 쳐다만 보시더라. 그래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나는 “전문가들이나 언론에서 이 걸 주고라도 해야 된다는 식의 여론이 일어날 때가지 기다리지 말고 정부가 직접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 국민한테 물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1월초에 그런 미팅이 있은 다음에, 1월말에 내가 통일부 장관 발령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그때 ‘네가 직접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뜻이 거기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취임하고 나서 상공회의소 초청 조찬간담회에서 그 얘기를 터트렸다.

그때는 동해선 이야기는 없고 경의선만 있을 때고, 철도연결만 했지 도로까지는 이야기가 안 나올 때다. 철도연결 하는데 북측 구간을 개성에서부터 시작해서 MDL(군사분계선)까지 오는데 계산해 보니까 비료 20만톤 주는 정도 밖에 돈이 안 든다. 그래서 그걸 주고라도 해야 한다고 했다. 그게 기사화가 됐는데도 반론이 안 나오더라.

그렇게 해서 비료를 준다고 하고 임동원 장관이 특사로 3월말에 북에 간다. 그때 저쪽에서 “도로도 연결하자. 동해선도 만들자”고 해서 결국 곱하기 4가 된 거다. 그걸 주니까 2002년 9월 18일 공사가 재착공된다.

나는 그렇게 주고라도 연결해 놨던 것이, 내가 1977년 통일원 들어와서 명색이 통일문제를 직업적으로 연구하고 현장에서 일했던 사람으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대한민국’ 쌀포대, “북한 주민들 한 사람에 두 개씩”

   
▲ 2009년 11월 일본 NPO 삼천리철도 방한단과 함께 판문점을 방문해 평화의집 2층 회담장을 찾은 정세현, 임동원,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이곳에서 회담을 참 많이 했다”고 각자의 경험들을 꺼내놓으며 회담테이블에 앉아보는 등 감회에 젖기도 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다른 이야기거리도 많을 것 같다.

■ 회담 관련된 이야기인데, 쌀을 줄 때 처음에는 제공자 표시를 영어로 밖에 못했다. 2001년까지 ‘Republc of Korea’라고만 돼 있었다. 그런데 2002년 8월말에 서울에서 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가 열렸다. 경추위 우리측 수석대표는 장관급 회담 차석대표인 재경부 차관이 맡는다. 그때 대표가 아마 윤진식 재경부 차관일 거다.

나는 평양에 가도 장관급회담을 하면 잠을 안 잔다. 밤새 그들의 동태를 수시로 보고받고 필요하면 대책회의를 수시로 한다. 판문점에서 열리는 회담도 잠을 안자고 CP(Command Post, 지휘소)에서 쭉 동향을 체크해서 결정할 것 결정하고 대책회의 하고 하는데, 경추위지만 회담장인 그랜드 힐튼 호텔에다 CP를 차려놓고 진두지휘했다.

그런데 쌀을 30만톤에서 40만톤으로 올려 달라는 거다. 그래서 “10만톤 올려 준다고 해라. 그 대신 제공자 표시를 포대에 영어로 ‘Republc of Korea’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박는 조건으로 준다고 해라”그랬더니 그건 못 받겠다는 거다. “그러면 30만톤이다”.

내가 협상을 하면서 “그 대신 ‘대한민국’을 받으면 전년도까지는 태국산 쌀을 사서줬는데, 금년에 40만톤 주면서 국산쌀로 준다. 그래도 못 받겠는가? 결정하라”. 그랬더니 밤새 움직인 모양이더라. 새벽에 아마 평양에서 오케이가 떨어진 것 같았다. “진짜 줄 거냐? 남쪽에서 생산한 쌀로”. “준다. 제공자 표시를 대한민국이라는 한글로만 박는다면. 지금 월드컵 때문에 전 세계에 '대한민국' 함성을 울렸는데, 내가 책임지고 한나라당을 설득해서 준다”.

□ 당시 우리 국산 재고미가 40만톤이나 있었나?

■ 국산 재고미는 많다. 농수산부에서는 50만톤이 아니라 100만톤씩 덜어내 달라 한다. 그렇게 못 주는 이유는 도시빈민들이 쌀을 사먹어야 하는데 "우리는 안 주고 왜 저쪽만 공짜로 주느냐"는 일종의 국내의 갈등 때문에 40,50만톤까지 밖에 못 준다. 농수산부로서는 추곡 수매가를 높이기 위해서 재고를 자꾸 덜어 버려야 된다. 2,3년 지나면 사료나 비료로 쓴다. 그거 미리 덜어내자는 거다.

그래서 그때 제공자를 대한민국으로 표시한 것이 참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시작해서 2004년까지는 내가 결정해놓고 나갔다. 3년간 120만톤이 갔다. 정동영 장관 때 김정일 위원장 만나고 와서 10만톤 더 올려줘서 50만톤이 돼 모두 170만톤이 갔고, 이종석 장관 때는 사실 못 갔다.

170만톤이 가려면 40kg 짜리 쌀포대가 4,250만개가 가야 된다. 그리고 만약에 터지는 걸 대처해줘야 하니까 여벌로 포대가 간다. 잘 찢어지지도 않지만 자꾸 더 달라고 한다. 가볍고 질겨서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4,300만개 내지 4,400만개가 갔다고 치면, 거의 물건 들고 다닐 수 있는 기력을 가지고 있는 북한 주민들이 한 사람에 두 개씩 들고 있을 수 있는 분량이다.

쌀 제공자 표시가 대한민국으로 박혀 가면서 나는 남북 간에 민심이 연결되는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모니터링 때문에 몇 군데 가서 녹음도 하고 녹화도 해왔지만, “태풍이 와서 비가 몰아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포가 아니면, 남쪽이 아니면 우리에게 누가 이렇게 쌀을 주겠느냐. 우리 고맙게 알고 먹고 있다”고 했다.

또 비료 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전에는 적십자 마크만 찍어서 제공자 표시 없이 갔다. 그것도 올려 달라 했다. “20만톤에서 30만톤으로 올려주겠다. 그 대신 포대를 만드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있는 포대에다 주마”. 이미 쌀포대에 제공자 표시가 ‘대한민국’으로 나갔는데 그거 못 받을 거 뭐 있겠나.

한글로 된 포대에 그냥 넣어서 주면 사용법이 다 있다. 북한 사람들이 농사짓기 아주 편하다. 내가 물러난 때인데, 2005년쯤 KBS가 체류하면서 취재하는데 만경대협동농장 부지배인이 KBS 마이크 앞에서 “남쪽에서 제때에 비료를 이렇게 보내줘서 우리 농민들이 농사짓는데 아주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2006년 6월 17일 정동영 장관 일행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을 때, 첫 인사는 “남쪽에서 쌀과 비료를 보내줘서 우리 인민들이 고맙게 생각한다는 것을 내가 우리 인민을 대표해서 인사를 드린다. 정확하게 전달해 주시라”. 그때 6자회담에 (북한이) 돌아온다는 것이 톱뉴스가 되면서 실제 김정일 위원장이 맨 처음에 했던 그 이야기는 기사화 되질 않았다.

제공자 표시를 한 것은 생색을 내자는 게 아니라 남쪽이 주는 걸 북쪽 주민들이 알게 되면서 민심이 연결되는 효과가 있는데 지금은 무효가 됐다. 그러나 다시 또 쌀이 갈 수 있게 되면 그때의 기억들이 되살아나면서 남북의 민심들이 연결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북측 파트너, ‘논객 전금철’과 ‘한량 김령성’ 단장

   
▲ 제13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북측 김령성 단장과 건배하고 있는 정세현 전 장관. [자료사진 - 통일뉴스]
□ 많은 북측 파트너들이 있었을 텐데, 기억에 남는 사람이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 회담에서 상대했던 이는 전금철과 김령성이다. 전금철 씨는 김영삼 정부 시기인 95년 쌀회담 때도 만났었고, 비료회담 때는 저쪽 단장이고 나는 우리쪽 수석대표로 만났다. 그는 굉장히 논리가 정연하다. 나보다 12,13년 연상일 거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다. 그와 회담을 하면 합의를 통크게 만들어내기 어렵다.

그런데 김령성 씨는 통전부(통일전선부) 사람이고,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하는 협상대표 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보면 낭만이 있다고 할까. 술 한잔 들어가면 피아노 치고 회담할 때 이론적으로만 하지 않고 가끔 시도 읊어대고 그런다.

□ 김령성 단장은 외모도 남쪽 사람 느낌이 많이 든다.

■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북쪽 대표인줄 알고 그 사람이 남쪽대표인줄 알고 착각하기도 했다.(웃음) 김령성 씨는 멋쟁이 기질이 있지만 회담할 때는 밀고 당기고 철저하게 빈틈없이 한다. 그러나 잠깐 잠깐 참관할 때 얘기하는 것 보면 한량이다.

□ 공직을 나와 민화협 상임대표의장도 맡았고,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을 지금도 맡고 있는데, 정부가 바뀐 것도 있겠지만 밖에서 활동하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 정부가 바뀌니까 정부의 대북정책이 북한의 선행동을 요구하거나 북한의 선양보, 선변화를 전제로 해서 뭘 해주겠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명박 정부 때 ‘비핵.개방.3000’이 대표적이고, 지금 한반도평화프로세스도 말은 좋게 했는데 마찬가지다. 실제로는 북한의 회담대표가 우리하고 무슨 격이 안 맞는다느니 진정성을 보이라느니 하면서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있다.

정부의 정책 방향이 굉장히 중요하다. 정부가 대북지원이라든가 북한방문 승인을 까다롭게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 (정부) 안에 있을 때는 별로 의식을 못했는데 갑의 위치에 있다가 을의 위치로 가니까, “야, 민간부문에서 통일문제를 고민하는 게 이렇게 어렵구나” 생각했다. 한겨레통일문화상은 사실 을의 위치에서 통일운동하던 사람들이 받는 상인데...

   
▲ 2009년 8월 김대중 대통령 서거시 방남한 북측 '특사 조의방문단'을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자격으로 김포공항에서 맞이하고 있는 정세현 전 장관. [자료사진 - 통일뉴스]
□ 퇴직후 민간 통일운동을 하지 않았나?

■ 그래도 갑의 위치에 있던 시간이 훨씬 길고, 을의 위치에 있던 기간이 6월 30일이 딱 10년이다. 참 어렵더라. 특히 민화협 시절인데 노무현 정부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이명박 정부로 바뀌면서 2008년 5월에 북한에 나무심어 주는 프로그램으로 평양을 다녀온 것이 마지막이다. 민화협에서 ‘겨레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니까.

그 뒤로는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조차 북한에 갈 수도 없었고, 2009년에는 그만두라고 그래서 그만 뒀다.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나 민간차원에서 통일운동하는 사람들한테는 굉장히 어려운 조건이 되고 있다.

나는 정부에 있다 나와서 민간차원에서 일을 하면서 법대로만 하면 되지 않겠느냐, 교류협력법만 지키면서 하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그런데 가령 저쪽에서 연락이 와서 무슨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 (북한에) 간다든지 제3국에서 만나는 것은 쉽게 할 줄 알았는데 설명없이 자꾸 시간 끌고 그러니까 너무 힘들었다는 기억만 가지고 있다.

‘차라리 이제 글이나 쓸까’ 이런 생각이었고, 글보다는 말로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정세토크’를 시작했던 거다. 기록은 남겨야 되고. 다시 세월이 좋아지면 어느 것이 길인지, 어느 것이 길이 아닌지 전달하려면 그렇게 기록으로 남겨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에 있을 때는 별로 몰랐는데 밖에 나와서 보니까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와 관련해서도 너무 미국 눈치를 보는 거다. 물론 시기적으로 미국이 그때 부시 정부였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개선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여러 가지 문제제기를 하니까 불편해서 그냥 웬만한 건 덮어두자 했지만, 오바마 정부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다.

“오바마, 북핵문제 풀면 안 되겠다고 계산한 것 같다”

   
▲ 2009년 3월 민화협 상임대표의장을 타의에 의해 김덕룡 의장(오른쪽)에게 물려준 정세현 전 장관.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오바마 정부도 대북정책에서 ‘전략적 인내’를 기조로 삼고 있다. 6자회담의 경우도 한국은 조금이라도 문턱을 낮춰볼까 하는데 미국은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 오바마가 민주당 대통령이기는 하지만 시기적으로 대통령이 된 게 2009년인데, 2009년부터 중국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하면서 군사대국화 되고 있고, 외교적으로도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수립 선포 60주년인 2009년 10월 1일 ‘중화부흥’이라는 것을 중국의 국가목표 내지는 외교적 목표로 제시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미국이 아시아에서 쫒겨나는 것 아닌가 위기의식을 느낀 것 같다. 그게 이른바 ‘아시아로의 귀환’(Pivot to Asia) ‘아시아 재균형’(revalancing) 이런 정책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2012년 11월 ‘아시아로의 귀환’을 차기 정부의 아시아 정책 방향으로 정한다. 중국의 세력이 커지고 미국이 그걸 견제해야 되는 상황이 되면서 북핵문제를 풀면 안 되겠다고 계산한 것 같다. 왜냐하면 중국을 옥죄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 역할론도 나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책임을 자꾸 떠넘기는 중국 책임론이다. 세계평화를 어지럽히는 북한에 대해서 중국이 가장 영향력을 많이 행사할 수 있는데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되고 있다고 책임을 넘기면서 사실상 6자회담이 열리지 않기를 바라는 쪽으로 입장을 정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북한의 핵능력이 커지면 우리가 죽을 지경이다”라는 식으로 미국한테 매달려야 하는데 그럴 의지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위기의식이랄까, 위험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북쪽이 리더십 교체가 있고 그러니까 곧 망할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복잡하게 반대급부를 줘가면서 회담 같은 것을 할 필요 없이 나중에 한방에 엎어치기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잘못된 계산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통일대박론이고 또 통일대박론과 한짝을 이루는 북한붕괴론이다.

미국이 클린턴 때는 대가를 주고라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부시도 2기 때는 변해서 그래 보려고 했다. 그런데 중국이 점점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이 되면서 중국의 목소리가 커지고 위상이 높아지니까 미국이 진보정권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견제를 위해서 북핵문제를 오히려 남겨놓는 것이 낫겠다고 내심 결정한 것 아닌가 본다. 말로는 해결할 것처럼 하지만,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외교전략과 실제전략은 차이가 많이 날 수 있다.

□ 총장 임기는 언제까지인가?

■ 금년 12월 22일 끝난다.

□ 이후 계획은?

■ 없다. 나도 좀 본업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제 한겨레통일문화상도 받았으니까 진짜 민간인 신분으로 통일운동을 좀더 적극적으로 해서 상값을 해야 하지 않겠나.(웃음)

□ 민화협 대표상임의장도 지냈는데 어느 곳에서 어떤 활동을 할 계획인가?

■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나는 인터뷰나 대담 이런 것을 통해서 통일담론을 계속 이끌어가고 활성화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 편하다. 무슨 자리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자리는 그만두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원광대 갈 때도 그대로 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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