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권 /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

                                                           1.

국무총리로 내정된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이, 한 교회강연에서 ‘조선민족의 상징은 게으름’이라며, ‘조선이 5백년을 허송세월 보냈으니, 일제식민 지배를 통한 하느님의 시련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발언을 하여 파문이 일고 있다. 조선인은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는 게 DNA로 남아 있는데, 기독교가 게으른 민족을 근면하도록 깨우쳤다는 주장이다. 19세기 후반에 기독교가 들어와 미개한 조선사회를 문명화시켰다는 기독교문명론의 역사관이다. 조선인의 게으름과 불로소득관념을 강조하는 문 후보자의 발언을 접하고, 문득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떠올랐다. 박 전 대통령의 역사관이야말로 문창극 총리 내정자 주장의 원조라 할 만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역사관은 최고회의의장 시절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의 반만년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퇴행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였다.”라고 하였다(245쪽). 고조선시대, 한 무제의 침략을 받아 한사군이 설치된 때부터 시작하여, 일본의 침략으로 대한제국이 종막을 고할 때까지 이 나라의 역사는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이 외세의 강압과 정복의 반복 밑에 겨우 생활 아닌 생활을 연장하여 왔다는 주장이다. 이어 “이 모든 악의 창고 같은 우리의 역사는 차라리 불살라버려야 옳은 것이다.”라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하였다(위의 책, 249쪽). 박 전 대통령은 자기 민족의 역사를 지극히 혐오하는 ‘자학사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반만년 역사 가운데, 박 전 대통령이 특히 경멸하고 증오심을 보인 것은 조선시대 역사였다.

“우리는 이조사를 사색당쟁·사대주의·양반의 안일한 무사주의적 생활태도 등을 들어 후대에 따른 악영향을 끼친 민족적 죄악사라고 생각한다.”(박정희, 《우리민족의 나갈길》, 96쪽)

조선은 사색당쟁, 사대주의, 무사안일 등의 ‘악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주어, 우리민족이 결국 일본식민지로 전락하도록 만드는 원죄를 저질렀다는 주장이다. 그는 “이조는 결국, 이 당파싸움에서 날이 새고 지다가 망국의 비운을 맛보게 된 것”이라며 ‘당쟁망국론’을 주장하였고, “스스로를 약자시하고 남을 강대시하는 비겁한 사대주의 사상, 이 고질, 이 악 유산을 거부하고 발본하지 않고서는 자주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며 사대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리고는 “사색당쟁과 사대주의는 민족사의 ‘악 유전’이므로, 정신적으로 주체의식을 확립하고 국가 재건을 위해 인간개조 즉 국민개혁 혁명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자학사관을 자신의 5.16군사쿠데타를 정당화 하는 논리적 근거로 동원한 것이다.

                                                           2.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직후, 일제는 한국병합의 목적이 “오랫동안 곤궁한 경지에 빠져 있던 반도 민중을 구제하여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문명국인 대열에 속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교양훈련을 쌓고, 경제의 진보와 문화의 향상을 기대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병합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 의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민족의 행복과 번영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조선의 일본화’라는 동화주의를 내걸고, 실제로는 헌병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무단통치를 하였다. 초대총독 테라우치가 “조선인은 우리 법규에 복종하든지 아니면 죽음을 각오하든지 그 어느 것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협박한 데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에 비해 도덕적·학문적 우위를 지녔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조선인들은 1919년 3·1운동이라는 전 국민적인 저항을 통해, 일본이 무력으로 물리적인 지배는 했으나 정신적 지배는 하지 못했음을 극명히 보여주었다. 이는 일본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방식이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한국역사에 대한 왜곡을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일제는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여 한국사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왜곡하였는데, 식민통치의 바로 앞 시기인 조선사에 대한 왜곡이 특히 심했다. 조선인에게 공포심을 조성하는 무단통치가 실패하였음이 확인되자, 방침을 바꾸어 조선의 역사를 왜곡함으로써, 조선인 스스로 자신을 모멸하여 노예의식이 내면화하도록 한 것이다.

일제는 식민지배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강대국을 섬기는 사대주의, 파벌싸움만 일삼는 당쟁, 관념적이며 비생산적인 유교이념 등이 조선역사의 본질이라며, 조선 문화의 독창성과 자주성을 철저히 부정하였다. 조선이 자주성 결여와 분열을 특징으로 하는 민족성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으로 일제 식민지배의 당위성과 필연성으로 귀결되는 주장이다. 이처럼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역사를 식민사학, 그로 인해 형성된 역사인식을 식민사관이라고 한다.

해방이후 친일파 청산에 실패하면서 식민사관 역시 극복되지 않은 채 오히려 확대, 증폭되었다. 앞서 언급한 문창극 총리후보자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주장 역시 식민사관을 철저히 내면화한 데서 나온 발언들이다.

                                                          3.

우리는 조선이 문화적, 정신적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문치주의를 최고의 통치방식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치란 무력이 아닌 도덕적 힘을 바탕으로 통치하는 것으로, 권세가 배제, 공론(公論)을 통한 소통, 소수의견 존중, 높은 수준의 교육의 힘에 의존하는 정치방식을 의미한다. 문치를 숭상하는 조선은 문화의 선진국이었던 명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이는 문화대국을 섬긴다는 ‘사대’로 이어졌다. 사대란 본래 대국을 섬긴다는 뜻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중국과의 외교관계에서 나타난 인식이다. 당시 국제질서는 ‘문명이란 모든 이가 배우고 모든 이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라는 문화적 보편주의에 입각해 있었다. 이는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고, 나라는 작은 나라를 돌보아 준다.’라는 사대자소 원리 하에 작동되고 있었다. 조선이 대국인 중국에 조공은 바치되 지배는 받지 않는 자주독립국이라는 게 당시 국제질서였다.

반면 ‘사대주의’란 ‘사대’에 ‘주의’(主義, principle)를 합성한 단어로 ‘사대를 이념 또는 신념으로 삼는다.’라는 말로, 일본인들이 조선민족을 비하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만들어낸 용어이다. 만일 사대주의가 한국인의 민족성이라면 조선은 명나라가 멸망한 17세기 중엽 이후 새로운 강대국인 청나라에 사대의 예의를 바쳐야 했다. 그러나 조선은 청나라의 무력 앞에 굴복하였을망정 청나라에 사대의 예의는 바치지는 않았다. 명은 한족이 건립한 문화적 정통성을 지닌 문명국가로 여겼던 반면, 청은 유목민족의 국가로 물리력을 바탕으로 중화를 지배한 정복왕조였기에, 조선이 본받아야할 선진국이라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이 병자호란에서 패하여 삼전도에서 성하지맹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항복을 정신적으로는 인정치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조선인들은 청의 승리는 일시적인 혼란 현상일 뿐이고 명이 다시 문명의 질서 즉 중화질서를 회복할 것이라 믿었다. 명 멸망 이후 조선에서 나온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도 문명대국인 명의 복수를 조선이 대신해야 한다는 인식의 발로였다. 그러나 100여 년이 지나도 중화질서의 회복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조선은 스스로 문화 중심국임을 자처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18세기 이후로 만연되는 소중화사상이다. 이후 청나라에 가서 청의 발전된 문물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이들 역시 청의 문화를 인정하기보다는 발전된 청의 문화를 배워 청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4.

일본은 사무라이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무가(武家)’사회라는 점에서 ‘문치(文治)’사회인 조선과는 다르다. 1185년 가마쿠라(鎌倉) 막부를 시작으로, 도쿄에 있는 천황이 아닌 쇼군이 실권을 장악하는 막부체제가 성립되어 1868년 명치유신 이전까지 700년간 무가사회가 지속됨으로써, 무(武)의 문화는 일본 사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막부체제는 쇼군을 정점으로 철저한 지배·복종관계로 구축되는데, 그 관계는 “쇼군-다이묘(영주)-사무라이”로 이루어져있다. 이러한 주종관계는 토지를 매개로 형성된다. 이처럼 700년간 지속된 막부체제는 일본의 역사가 우리나라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이다. 조선건국 당시 일본은 막부체제가 성립 된지 약 200년이 지난 후인 무로마치(室町) 막부시대였으며, 17세기 초반인 광해군대에는 에도(江戶) 막부로 바뀌었다.

일본에서 무가(武家)사회가 성립하여 발전을 거듭하는 동안 조선은 일관되게 문치(文治)사회를 유지하였다. 문민통치를 이상으로 하는 조선은 정치적·사회적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수준 높은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는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유산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유네스코가 선정한 인류의 보편적이고 뛰어난 가치를 지닌 세계유산에 한국의 문화유산이 10건 등재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절반(종묘, 창덕궁, 화성, 조선왕릉, 하회와 양동)이 조선왕조의 문화유산이다.

조선왕조의 우수성은 기록문화의 전통에서 더욱 잘 들어난다. 수준 높은 기록 문화는 문치사회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적 가치가 있는 기록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기록유산은 총 11건으로, 이 가운데 7건(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의궤, 동의보감, 일성록, 난중일기)이 조선왕조의 기록유산이다. 특히 조선왕조의 공식적인 연대기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이 등재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조선시대 사관들이 정치적 압력에 맞서 목숨까지 바쳐가며 정론·직필을 지켰기 때문에 얻은 영예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에게는 (1)국왕의 뜻에 순종할 것을 거부하는 ‘순지거부’, (2)직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미련 없이 관직을 떠나는 ‘삼간불청즉거’, (3)목숨을 걸고 정론을 펴는 ‘지부극간’, (4)널리 소외된 백성들의 목소리까지 듣고 기록하는 ‘광개언로’, (5)물타기식 기록으로 본질을 호도하지 않는 ‘양시양비배격’ 등의 다섯 가지 원칙을 준수하도록 요구되었다.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기록 정신이 조선왕조를 오백년 동안 지탱해 준 정신적 힘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5.

18세기 후반 정조대 축조된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에 등록됨으로써 ‘인류의 보편적이고 뛰어난 가치를 지닌’ 문화재로서 그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런데 정조대 축조된 수원화성은 일제 강점기에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다시 한국전쟁 때 시가전으로 처참히 파괴되었다. 장안문 같은 경우는 윗부분인 문루가 반 이상이 날아갔고 포루와 공심돈으로 불리는 성벽 위의 건축물 등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수원화성은 정조 당시에 건축된 모습이 아니라 1975년부터 1979년 사이에 복원한 성곽이다.

수원화성처럼 복원된 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당시 심사관들도 ‘어떻게 감히 이런 복제품을 가지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생각을 했느냐’며 처음에 아주 의아한 얼굴을 했다고 한다. 그때 심사관들에게 제시된 것이 화성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의식 등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였다. 조선왕조는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 일의 전말·경과, 소요된 재용·인원, 의식절차, 행사 후의 논상 등을 기록해 놓은 책인 ‘의궤’를 편찬하였다. 조선은 국가적인 행사를 치르고 나면 반드시 그 일의 전말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1794년 1월부터 1796년 8월까지 30개월에 걸친 화성성곽의 축조는 큰 토목건축 공사로서 많은 경비와 기술이 소요되었다. 이에 정조는 공사 내용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결심하고 성곽 공사가 끝나자마자 의궤 편찬을 명하였다. 1801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도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성성역의궤》를 꼼꼼하게 검토한 유네스코 관계자들은 그제야 수긍하고 수원화성의 세계문화유산등재를 허락했다고 한다. 비록 후대에 복원한 화성이 18세기 축조된 성곽과 다르다 할지라도, 당시에 편찬된 의궤에 따라 복원하였기에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선정 기준 가운데 하나가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사회적· 예술적·과학적·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이다. 정조대 축조된 수원화성이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만약 의궤가 없었더라면 그 문화적·사회적·예술적·과학적·기술적 가치를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수원화성은 조선왕조가 기록을 중시하는 수준 높은 문화국가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인 것이다.

문창극 국무총리 지명자는 ‘조선은 500년 동안 허송생활만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우리는 “민족국가의 위세를 과시한 적도 없고, 특유한 산업과 문화로써 독자적인 자주성을 발양한 바도 없다”고 하였다. 조선은 “언제나 강대국에 밀리고, 맹목적인 외래문화에 동화되거나, 고식, 타태, 안일, 무사주의로 표현되는 소아병적인 봉건사회의 한 축도판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양자는 조선의 봉건성을 강조하여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인식이 판박이다. 조선시대는 망국의 역사요 혼돈의 역사이며 실패의 기록이라는 게 이들의 공통적인 생각이다. 헌법은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제9조)라고 하였다. 문 후보자와 같이 식민사관에 사로잡힌 사람이 국무총리가 된다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족문화가 창달될 수 있을는지 걱정이다. 우리가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났다. 이제는 ‘조선시대는 문치사회의 높은 안정성을 바탕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준 높은 문화유산을 창조하였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알만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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