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대 (<디펜스21+> 편집장)
 

1996년 4월 5일 식목일. 휴일에 이양호 국방장관의 하루 일정표를 보자. 아침 9시경 국방부 청사로 출근한 그는 오전 내내 한 통의 연서를 썼다. ‘사랑하는 L에게’로 시작된 편지는 점심 시간이 되어서야 ‘당신의 L’로 끝맺었다. 그리고 오후 2시에 몇일 전부터 판문점에 북한군이 난입하여 무력시위를 한데 대해 비상대책회의를 주재하면서 대북 정보감시태세(워치콘)을 격상하도록 지시한다. 오후 3시 반에는 청와대 긴급 안보관계 장관회의에 참석한다. 연서를 쓰면서 긴급 비상대책회의가 공존한 이상한 하루였다. 한반도는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공포에 휩싸인다. 3일 후인 4월 8일 밤. 청와대 유종하 외교안보수석이 합참에 전화를 하여 “여당(신한국당) 여론이 15% 이상 좋아졌다. 이제 언론 브리핑은 그만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합참 상황실의 장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친다. 그 다음날 이양호 장관은 “이제 판문점 상황은 그만 보고하라”고 지시한다.

양치기 소년의 비극은 함부로 경고를 남발하면 정작 다가오는 진짜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양호 장관이 바로 양치기였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딜레마가 이것이다. 실제로 늑대의 위협이 있기 때문에 양치기 소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양치기 소년이 가끔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속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양치기 소년은 단지 주인으로부터 양을 지키라는 명령을 수행하는 ‘대리인(agent)’이 아니다. 늑대의 위협에 대한 판단을 독점하는 하나의 ‘권력(power)’이 된다. 양치기 소년이 되기에 용이한 것은 대중이 갖고 있는 늑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즉 양치기 권력은 공포 위에 세워진 권력이다. 그 자체로 양치기라는 신성함, 즉 권위까지 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두려움에 떠는 게 아니라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시민의 가장 소중한 권리”라고 말한 바 있다. ‘만들어진 공포’의 불안에 떠는 시민처럼 독재자가 통치하기에 좋은 대상도 없다.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에 익숙해지는 시민은 무기력을 학습하게 된다. 마틴 샐리그만 교수는 실험을 통해 무기력은 학습(Learned Helplessness)된다고 말한다. 공포에 저항할 수도 없고,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인식이 서서히 학습되는 것이다. 여기서 권력은 체념적인 시민에게서 복종을 이끌어 낸다. 대중은 외부의 위협이 있는 한 정부에 순응하는 게 안전하고 편안한 길이라고 믿게 된다.

북한의 위협 같지도 않은 무인기로 공포를 조장하는 사이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정작 위험은 권력자가 만들어낸 공포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북한의 4차 핵실험 가능성으로 호들갑 떠는 것도 어쩐지 석연치 않다. 역시 가짜 경고, 즉 “늑대가 나타났다”는 가짜 공포다. 그러는 동안 정작 국민의 안전은 다른 데서 허물어지고 있고, 우리가 믿었던 양치기는 진짜 위험 앞에서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능했다. 관료집단을 주축으로 한 정치권력은 사실 진짜 위협 앞에서는 속절없이 붕괴된다. 바로 안전을 보장하는 과업을 시민과 함께 이루지 않고 자신이 독점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정치권력과 관료집단이 무능한지 이유를 살펴보자. 만일 긴급 상황에서 소방차가 출동하다가 민간인 차를 부수는 피해를 입혔다고 하자. 그 배상 책임은 누구에게 돌아갈까? 우리 법령에 의하면 소방차를 몬 소방관 개인에게 배상 책임을 물린다. 경찰, 해경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긴급 구난 체계를 보면 현장에 출동하는 요원에게는 많은 책임을 부과하면서 권한은 적게 준다. 반면 국장, 청장, 장관, 총리, 대통령은 책임을 지지 않고 권한만 행사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권한과 책임의 불균등한 배분은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스타인부르너(Steinbrner)라는 학자에 의하면, 관료조직은 업무의 성과를 최대화(maximize)하는 ‘결과의 논리’로 선택을 하지 않고 ‘적당한(satisficing=satisfy+suffice) 선택’을 선호한다. 여기서 ‘적당의 논리’라는 것은 과업이 완료되고 난 이후 책임질 일이 가장 적은 그런 선택을 말하는 것이다. 소방관이 자신이 책임질 배상을 감수하면서까지 소방차를 빨리 출동시킬 수 있겠는가? 그보다는 책임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차를 몰아야 한다. 시민이 보기에 관료조직이 답답해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적당주의는 지금 세월호 구조 현장에 수도 없이 널려 있다. 그런데도 그런 관료집단은 민간의 창의력과 위기극복의 자발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독점하려 한다. 여기서 안전이 붕괴된다.

울리히 벡은 1986년에 발표한 <위험사회>라는 저서에서 이 문제를 성찰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위험’이다.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부는 소수에게 편중되는 반면에 그로 인해 초래되는 위험은 공동체 구성원에게 평등하게 배분된다. 예컨대 공장주는 돈을 벌지만 그가 배출한 스모그의 피해는 전 구성원에게 민주적으로 배분된다. 그런대 현대 사회의 위험은 직관적으로 어디에 어떤 요인이 위험한지 식별이 되지 않으며, 그 피해범위도 측정이 곤란하다. 이 때문에 평소 위험에 대한 책임은 은폐되거나 면책된다.

예컨대 현재 수도권이나 지방의 공업단지에는 염소, 불산과 같은 위험물질 저장소가 있지만 그 인근 주민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그런데 염소 가스는 공기보다 무겁기 때문에 유출되었을 경우 아파트 고층에 머무르면 안전하다. 사람은 직관적으로 내려와 대피하게 되어 있는데, 이 과정에서 피해가 커진다. 그러나 공기보다 가벼운 불산은 반대다. 빨리 내려와 낮은 곳으로 대피해야 한다. 그러면 공장주는 이런 위험의 특성을 평소에 인근 주민에게 제대로 알려주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고가 나면 그 때서야 경보를 발령하지만 대피요령을 모르는 주민에게는 때가 늦는다. 위험에 대한 각종 기술정보가 평소에 공유되거나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염소가 저장된 공장 인근 주민들은 그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다. 즉 무능한 관료집단과 자본가만 그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울리히 벡은 과학과 지식이 과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전 구성원이 공유하고 활용하는 열린 과학, 열린 지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험에 대한 알 권리, 책임 소재의 투명화, 이것이 바로 ‘새로운 근대성’이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 정부는 뭘 모르는 국민들이 유언비어 퍼뜨린다고 불평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예 “유언비어 엄단”을 거친 톤으로 말한다. 음모론이 확산된다며 펄쩍 뛴다. 그러면서 새누리당 일부 의원들이 “종북 좌파가 실종자 가족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진짜 괴담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이런 정부 태도의 배경에는 “정부를 비판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내장되어 있다, 양치기 소년의 권위를 훼손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눈과 귀가 닫힌 폐쇄정부, 이런 닫힌 근대성을 어떻게 열린 근대성으로 전환할 것인가. 이것이 시대의 과제가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단지 정부의 무능과 자본의 부패 때문만이 아니다. 그런 적당주의 권력에 우리의 무기력이 학습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세월호를 통해 우리가 사유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변화이다. 학습된 무기력을 넘어서는 깨어있는 시민이 되는 것이다.


 
14~16대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 보좌관

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국방전문위원

전 청와대 국방보좌관실 행정관

전 국무총리실 산하 비상기획위원회 혁신기획관

<디펜스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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