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환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길을 잘못 들어서봤던 사람은 잘 안다.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바른 길로 가려면 허비한 시간만큼 허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런 이치를 남북관계에 적용해보면 이런 얘기도 가능할까?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7년을 화해.협력이라는 바른 길로 가다가, 2008년 이후 6년 째 대결 일변도를 걸었으니 이제 얼추 제자리를 찾을 때가 됐다는 얘기 말이다.

남북고위급접촉이 이루어지고 이산가족 상봉이 재개됐던 2월까지만 해도 남북관계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3월 들어 핵잠수함까지 동원한 한.미합동군사연습이 본격화되면서 한반도에 다시 먹구름이 끼더니 기어이 서해에서 남북이 포탄을 주고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구상’ 발표 이후에는 온갖 험구를 동원하며 말싸움도 벌였다. 무인정찰기 소동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남북관계 정상화 전망이 무색해졌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요 며칠 박근혜 정부에서 흘러나온 말들이 예사롭지 않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4월 8일 워싱턴 특파원 간담회에서 그동안 한.미.일이 북한에 6자회담 재개 조건으로 요구해왔던 ‘북한의 사전 비핵화 조치’에 대해 유연성을 갖고 논의해볼 수 있다는 입장을 처음 밝혔다. 10일에는 6자회담 재개 가능성이 이전보다 높아졌다는 외교부 고위 당국자의 발언이 이어졌다. 같은 날 통일부 당국자 역시 6자회담 재개 분위기 조성에 동참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13기 1차 회의(9일) 결과를 평가하면서 “장성택 숙청에 따른 후속조치가 어느 정도 진행된 만큼, 핵심 엘리트 내 권력 구도는 안정화에 접어든 것으로 예상한다”, “6자회담 재개 등 대외관계 개선에 역량을 집중할 가능성도 있다”고 발언한 것이다.

남북관계에서 전기를 마련하려는 박근혜 대통령이 6자회담 재개 ‘문턱’을 낮출 수도 있다는 전망은 이미 올해 초부터 나오고 있었다. 북핵문제 진전 없이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크기 때문에, 6자회담 재개를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북핵문제와 남북관계 ‘분리’ 추진은 한.미관계, 북.미관계, 국내 정치적 기반 등을 고려할 때 박 대통령으로서는 선택하기 힘든 옵션이라는 분석도 더해졌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3월 23일 헤이그 한.중정상회담에서 북한의 사전 비핵화 조치를 전제하지 않은 채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을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이 있고 북핵 능력 고도화 차단이 보장된다면 대화 재개와 관련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고 말했다. 6자회담 재개 조건을 바꾸거나 낮출 수 있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외교부, 통일부 당국자들의 최근 발언들 역시 같은 맥락 안에 있다.

일단 이러한 박근혜 정부의 움직임은 ‘조건 없는’ 6자회담 재개를 주장해 온 북한 입장에서 볼 때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좋은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는 있다. 다만 북한이 이 정도 신호만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남북관계 개선 제의에 응할지는 의문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여전히 6자회담 재개 문턱을 낮추지 않고 있고, 이러한 오바마 행정부를 대하는 박근혜 정부의 진의도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드레스덴 구상’에 대해 아직까지 북한의 정부 기구가 ‘공식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다. 북한은 여전히 박 대통령을 지켜보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에 다시 따뜻한 봄바람이 불지 말지는 4월 말을 지나봐야 알 것 같다. 4월 말에는 오바마 대통령 방한이 예정돼 있다. 비록 1박2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이 기간 동안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의 언행이 향후 남북관계, 북.미관계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악화된 북.미관계가 남북관계 진전의 발목을 잡았던 2002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을 남북화해.협력의 상징적 현장인 도라산역으로 이끌었다. 부시 대통령은 그곳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기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어느 곳을 함께 방문할까? ‘드레스덴 구상’(DMZ세계평화공원 조성, 유라시아철도 연결 등)이 박 대통령의 진심이라면 역시 도라산역이 적지다.
 

 
동국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밖에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경실련 통일협회,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같은 통일 관련 단체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평화와 통일의 사건사』(2014, 공저), 『동북아시아 열국지 2: 팍스 아메리카나의 뒤안길』(2013), 『동북아시아 열국지 1: 북·미 핵공방의 기원과 전개』(2012), 『구술사로 읽는 한국전쟁』(2011, 공저), 『북한위기론: 신화와 냉소를 넘어』(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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