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헌 /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그 모진 병마 훌훌 털어 내시고 활짝 웃으시며 오시길 기다렸지만 끝내 슬픈 부음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찾아뵙지 못해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마침내 선생님의 육신은 원래 오셨던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맏아드님이 복받치며 아버님을 추도한 말씀처럼 선생님께서 뿌리신 수많은 통일의 씨앗들은 반드시 우후죽순이 되어 선생님께서 못 다 이룬 평생의 염원을 이뤄내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남은 사람들 가슴속에 언제나 살아계실 것입니다.

▲ 3월7일 거행된 '통일애국열사 송석 이종린 선생 민족통일장'에서 고인의 장남 원구 씨가 유족을 대표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선생님의 결코 짧지 않은 온 생애는 조국광복과 자주통일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그 치열했던 투쟁에는 식민지조선의 지배수단이었던 치안유지법과 이 식민잔재를 그대로 이어받은 반통일 악법인 국가보안법과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일제시기를 비롯해 치안유지법으로 다섯 번을 예비검속되거나 구속당하셨고 해방된 땅이면서 또 다른 외세강점기에는 국가보안법으로 열네 번을 강제연행과 구속·기소당하는 싸움이었습니다.

그 많은 국가보안법 공안탄압 가운데 2004년을 기억나게 합니다. 2003년 12월, 당시 민경우 사무처장과 함께 선생님께서는 국가보안법상 그 무슨 회합통신이니 찬양·고무니 하는 부당한 혐의로 강제연행당하셨고 검찰은 일방적으로 불구속기소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 9월 6일 서초동 법원 앞에서는 ‘이종린 선생 국가보안법 불인정 재판거부 기자회견’이 열렸었지요. 선생님께서는 국가보안법을 인정하지 않으셨고 이 반통일 악법으로는 재판을 받지 않으시겠다는 결심이셨습니다.

2004년 겨울, 그 세찬 한파 속에서도 ‘국가보안법 폐지 끝장 단식농성’이 여의도 국회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이셨던 선생님께서는 82살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동지들 못지않게 단식농성과 함께 여의도 윤중제를 행진하며 국가보안법 철폐를 매일같이 외치셨습니다.

그런데 법원은 11월 22일 강제구인장을 발부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 12월 20일, 여의도 농성장에서는 수백 명 농성자들과 함께 ‘국가보안법에 의한 재판, 강제구인 거부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이종린 선생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규탄발언도 있었지만 선생님의 그 단호한 국가보안법 불인정 자세는 강직,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검찰의 야만적인 강제구인까지 거부하기엔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저들은 선생님을 파쇼법정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재판거부발언이 있었습니다. “민족사적으로 이제는 우리 조국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통일세상을 이뤄내야 한다. 이러하기에 본인은 위헌성과 모순성이 내재한 국가보안법을 가지고 이 사람을 법정에 세워 심판하겠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재판거부·진술거부를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선생님께서는 불의와는 단호히 맞서 싸우셨습니다. 그 불의의 범주에는 외세와 반통일 수구냉전세력이 있었고 통일운동 과정의 분열주의와 종파성도 있었습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특히 동지들에게는 따뜻하고 친절하셨으며 자애로우셨지만 민족의 존엄과 이익에 반하는 그리고 부당한 권력과 부당하게 얻은 가진 자들의 오만과 독선에는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준엄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23년 2월 11일 전북 전주 송천동(현재)에서 유복한 집안의 3남 6녀 중 여섯째로 태어나셨습니다. 500여 평의 정원이 있는 저택에서 집안에 서당을 차려 학문을 닦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집안은 갑자기 기울어졌습니다. 일제의 수탈과 민족말살행패가 선생님 가정에도 닥쳤던 것입니다. 일제는 선생님의 아버님을 반일운동혐의로 연행하기도 했습니다.

전북도청에 다니시던 선생님은 머리를 짧게 깎지 않는다는 이유로 끝내 강제징용에 끌려가 일본 대판(오사까)의 구축함건조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의식 있는 일본인을 만나 그의 집에서 기거하며 사회과학서적을 맘껏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비로소 항일의식 뿐만 아니라 사회진보의식을 갖게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새로 익힌 지식과 세계관, 전쟁정세 등을 편지로 써서 고국의 지인들에게 보내게 된 것이 검열에 걸려 헌병대에 끌려가 가혹한 조사를 받고 끝내 구속당하는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마침내 8.15광복을 맞아 선생님께서는 일제감옥에서 풀려나 해방된 조국으로 오셨고 징용에 끌려가기 전 결혼을 하셨던 선생님은 어린 아드님을 안으시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 만큼은 남의 나라 예속 하에 살게 하지 않겠다. 내가 당한 이 민족적 쓰라림을 결코 안겨주지 않겠다”고. 그러나 언젠가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자식들에게 어버이 구실을 제대로 못했고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약속을 이루지 못했습니다’고.

선생님께서는 귀국하시어 도청에 다시 다니셨고 다른 한편 민주청년동맹과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하는 등 본격적인 자주통일운동에 온 몸 바쳐 헌신하셨지만 이는 곧 탄압과 고난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해방된 조국에서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이란 양식 있는 사람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지극히 당연한 애족애국운동이었지만 일제를 대신한 새로운 외세와 침략외세와 결탁된 부당한 권력에게는 애국활동이 탄압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해방공간의 사회적 조건은 선생님의 남은 생애를 투쟁과 탄압이란 악순환으로 운명 지어 주었습니다. 청년동맹과 당활동, 전쟁시기 조직의 요구에 따른 헌신, 4.19 이후의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건설과 활동, 1988년의 민자통 재건, 1991년의 범민련남측본부 결성준비, 1995년의 남측본부 결성과정과 책임적 지위와 역할 등은 철저하게 자주통일을 이루겠다는 집념,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7.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이란 조국통일3대원칙정신이고 이를 토대로 한 남과 북, 해외의 3자연대의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정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같은 자주통일로의 이정표였던 우리민족끼리 자주통일을 재천명한 6.15공동선언 정신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범민련남측본부 의장으로 계시는 동안 범민련의 통일강령도 6.15공동선언에서 천명된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공통점이 있음을 인정, 이 방향으로 지향하기로 한 내용을 원용하게 된 것도 전체 우리민족의 합의를 최고의 강령으로 받아들인 결단인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자주통일의 길에서 곁길을 가거나 분열행위 등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맞서 원칙성을 지켜내셨습니다. 그 어떠한 이유와 그 어떤 유명 인사라 해도 또한 공안 칼날이 노리고 있다 해도 3자연대의 틀을 지켜내셨으며 조직노선에서 그 어떠한 종파성에도 반대하셨습니다.

선생님!

생각해보면 저는 선생님과 단체와 조직은 달랐지만 민족민주운동에서 언제나 연대·연합 현장을 함께 한 시간이 많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에서 공동선언이행 등 자주통일운동 전쟁반대평화실현, 미군없는 평화협정체결투쟁, 평택미군기지건설반대, 이라크파병반대, 비전향장기수 송환운동, 양심수석방, 정치수배해제투쟁, 범민련·한총련 합법화투쟁 등에서부터 쌀수입반대, 쌀값보장, 한미FTA저지투쟁,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저지투쟁, 세입자·노점상 등 강제철거 반대투쟁 등 민중생존권 부문까지 선생님께서는 노구를 이끄시며 젊은이 못지않게 왕성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선생님께서 분주한 활동을 하시는 데는 강한 정신력과 역사적 과제에 대한 책임성과 헌신성이 받침하셨습니다. 또한 그에 못지않게 언제나 철저히 관리하셨던 체력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대한배구협회 총무이사를 맡으실 정도로 배구뿐 아니라 다양한 체력단련을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등산이셨지요. 선생님께서는 전쟁 시기 입산투쟁 과정에서 수많은 동지들이 산화해 간 옛일을 회상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동지들이 산에서 다 죽었는데 죽은 동지의 발자취라도 밟기 위해 동지들을 생각하며 산에 오르기 시작한 게 벌써 50년(2005년 회상)째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 6.15산악회 2007년 10월 도봉산 산행. 만장봉 암벽을 배경으로 한 이종린(오른쪽) 선생과 권오헌 6.15산악회 회장. 당시 이종린 선생은 86세였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그랬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지도를 따라 산행을 한 지도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특히 강북 우이동에서 모여 북한산과 도봉산을 올랐었지요. 1980년대 초 당시 산행에는 선생님과 함께 민자통 조직위원장을 맡으셨던 일제시기에는 유명한 원산부두노동자파업 하셨던 소암 문한영 선생님이 지도하셨습니다. 민자통 선생님들 이른바 인혁당 유족들과 관련자, 남민전 관련자와 구속자들이 대개 함께 했었지요.

이렇게 선생님의 지도로 시작된 산행은 1992년 ‘양심수후원회산악회’로 다시 2007년 ‘6.15한마음통일산악회’로 이어졌습니다. 선생님께서는 2009년 당시 88세로 6.15산악회의 최고령 산악인으로 기록을 남기시고 그 뒤에는 안타깝게도 함께 하시지 못하였습니다.

선생님!

언제나 인자하시면서 사리를 분명히 하셨고 선비정신이 몸에 밴 통일애국지사 모습은 이제 다시 뵈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못다 하신 평생의 염원은 남은 사람들이 반드시 해 낼 것입니다. 외세공조와 동족대결 국제공조하의 변화유도와 급변사태와 흡수통일 망상까지 선생님의 가르침 따라 짓부수고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새 시대를 열어 나가겠습니다.

선생님!

이제는 국가보안법도 양심수도 없는 종북몰이와 공안탄압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잠드시길 빌겠습니다.

2014. 4. 9
민가협양심수후원회 권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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