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출처-Daum영화]

영화는 그 설정부터 기괴하고 도발적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범죄 집단이 아이를 키우는데, 나름 유사 가족의 형태를 구성하고 아이한테 애착도 느낀다. 아이 역시 자신이 놓인 이 이상한 환경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반항하지도 않고 ‘아빠’라고 불리는 존재들을 따르며 착한 아들로 살아간다. 여느 집 엄마들처럼 밖에서 돌아온 아이를 토닥이고 아이의 옷을 뜨개질하며 행복해하는 엄마는 사실은 납치 감금되어 도망치려다 발가락까지 잘린 여자이다.

그 집단의 이름이 ‘낮도깨비’인 것은 그들이 백주 대낮에도 거리낌 없이 극악한 범죄를 일삼을 정도로 인면수심의 후안무치한 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겉보기에 그들은 시골 구석에 처박혀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원예 농장을 경영하며 살아가는 건실한 귀농 청년들 같아 보인다. 자재 창고에서 온갖 무기를 개발하고 별장 같은 이층집 지하실에서 사람을 죽이며 아름드리나무 울창한 농원에서 살상 연습을 하리라고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5명의 범죄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영화 광고 문구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의문은 바로 이것이다. 어떻게 이런 자들이 ‘아버지’일 수 있는가. 어떻게 화이와 그 아버지들 사이에 ‘부자 관계’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는가. 영화 광고에 쓰인 화이의 물음으로 바꾼다면, “아버지, 왜 절 키우신 거예요?”

▲ [사진출처-Daum영화]

다섯 명의 범죄자 중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기태가 처음에 아이를 죽이지 말자고 했다. 하지만 그가 이 어린 생명에게 느낀 애처로움이란 길에 버려진 강아지한테도 느꼈을 법한 것인데, 어쨌든 그는 자기가 돌보게 된 화이에게 진실로 마음을 주며 화이에게 아빠라 불리는 친구가 된다. 범수나 동범의 경우는 석태의 결정에 따른 데 불과하지만,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습득하는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재미로 화이를 집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가장 합리적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인물인 진성은 화이가 성장할수록 이 잘못된 결정에 불안을 느끼는데, 그것은 그의 이성의 작동이기도 하지만 화이에게 양부와 같은 애정을 갖게 된 때문이기도 하다. 화이의 장래를 걱정하고 화이의 심리적 충격을 염려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그래도 아버지로서의 면모가 느껴진다. 그래서 가장 먼저, 손쉽게 화이의 표적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화이에게 감히 대들 수 없는 권위로 군림하는 ‘아버지’, 석태는 어떤가. 그답지 않게 아이의 목숨을 살려주기로 결정한 것은 하필 그 아이를 유괴한 동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가 괴물이 되게 된 결정적 동기, 결정적 사건은 모두 화이의 친부 형택과 관련되어 있다. 형택은 석태에게 선망과 증오의 양가적 감정의 존재였으므로 석태는 그의 아이를 유괴했고, 또한 그 아이를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와 전혀 다른 존재인 줄 알았던 이 아이에게서 자기와의 유사점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유사점을 확인하면 할수록 그는 화이가 마치 자신의 DNA를 지닌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애정을 느낀다. 아니, 애착을 느낀다.

모든 것을 잃으면서까지 화이를 얻으려 한 그의 집착은 결국 양아버지로서 느끼는 기른 정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지배해 온 결핍감에 대한 심리적 보상에 불과하다. 그가 자신을 닮은 아이 화이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을 때, 괴물이 된 그의 삶은 정당화되고, 그가 평생 의식해 온 형택이란 존재의 심리적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사진출처-Daum영화]

화이는 유괴되었다. 범죄자가 범죄로 취득한 장물에 애착을 가질 때 이것을 ‘아낀다’고 표현하지 않듯이, 유괴자들에 의해 길러진 화이와 그 유괴자들과의 심리적 애착 관계에 ‘부성애’라는 표현을 쓸 수는 없다. 그러므로 충격적인 영화의 설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읽어내는 것은 자칫 관계의 본질을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한 접근법이다. 마찬가지로 화이의 양모가 화이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 역시 ‘모성애’의 범주는 아니다. 그가 비록 범죄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고, 그 역시 피해자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오랜 시간 폭력에 노출되어 길들여진 그의 무력감을 감안하더라도, 그는 진실을 감춘 공모자로 살아왔다. 화이에 대한 그의 애착은 피해자로서의 동류 의식이자, 마음 기댈 데 없는 그녀의 유일한 위안처를 잃고 싶지 않은 방어 의식의 발로이다.

▲ [사진출처-Daum영화]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들은 이토록 잔인하고 흉악한 범죄자가 되었는가. 이것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이지만, 영화는 답을 구하는 데 필요한 힌트를 제공하는 데 매우 인색해 보인다.

유일한, 그러나 결정적인 열쇠는 그들이 모두 같은 보육원 출신들이란 점이다. 그들이 끌고 온 여자까지 포함하여 그들은 모두 같은 보육원에서 성장한 인연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그리고 거기 형택도 있었다.

대체 이 ‘성지보육원’이란 곳은 범죄자 양성소인가. 아니면 보육원 출신들이란 원래 그렇게 질이 안 좋게 마련인가. 그럴 리는 없다. 고아란 조건은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도 자신을 보호해 줄 울타리도 갖지 못한 채 짐승 같은 세상에 던져진 자가 직면한 삶의 불안과 공포를 상징하는 것이다. 석태는 괴물이 되기 이전, 보육원 원장의 엄친아 아들 형택에 대한 선망과 질투로 괴로워하면서 한편으론 끊임없이 괴물의 환영에 시달리는 심약한 소년이었다.

그를 집어삼키려 달려드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란 가진 것도 없고 잘난 것도 없는 이 고아 소년 석태가 느끼는 현실에 대한 공포였을 것이다.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열망이 큰 자존심 강한 소년일수록 현실의 비참함은 눈덩이처럼 커져 그를 짓눌렀을 것이고, 그가 순수하고 예민할수록 탐내서는 안 될 것들을 탐낸다는 죄의식으로 그의 내면은 갈가리 찢겼을 것이다. 소년의 욕망은 죄악인가. 결코 그 아픔에 자신을 대입해 볼 수 없는 원장의 아들 형택은 그것을 죄악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그를 구원하기 위해 눈물로 기도했다, 오로지 선의에 의해서!

▲ [사진출처-Daum영화]

하지만 석태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구원했다. 현실이란 진창에서 죄 짓지 않는 마음으로 살기 위해 조심하며 괴로워하는 대신, 그냥 더럽혀지기로 한 것이다. 처음 한 번이 어려울 뿐, 이미 더럽혀진 후에는 진창에 뒹구는 것 따윈 더 이상 두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영혼을 괴물의 먹이로 내주었다. 괴물이 되니 괴물은 사라졌다. 그리고 형택의 맑은 영혼을 물려받은 화이에게 말한다. “아빠들이 다 괴물인데, 너도 괴물이 되어야지.”

그렇게 또 다른 석태들도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자신을 지키고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악의 전시장이 되었다. 무지한 악 기태, 치기어린 악 범수, 무절제한 악 동범, 계획적인 악 진성, 그리고 소심한 소년에서 잔혹한 범죄 집단의 리더로 변신한 자기 극복적 악 석태. 게다가 피해자였으나 결국 경찰을 살해하며 악의 구렁텅이로 끌려들어가 무기력한 악이 되어버리는 영주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석태들만의 비극이 아니다. 석태에게 형택은 괴물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자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석태의 죄악을 형택이 용서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악연의 고리는 일찍 끊어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형택의 아버지가 차라리 악덕 기업주였거나 보육원생들을 학대하는 괴물이었다면 석태들은 괴물이 되는 대신 현실의 괴물과 맞서는 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눈앞의 가시적 폭력은 괴물의 환영처럼 실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비가시적 폭력보다 상대하기 쉬운 법이다. 괴물과 맞서기 위해서는 용기만 있으면 되지만, 발톱을 감춘 현실의 보이지 않는 장막 속에 숨어 있는 삶의 공포와 맞서려면 통찰력까지 요구된다.

그러므로 누군가 석태들에게 괴물은 환영이 아니라 실재이며 네가 공포에 떠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가르쳐줬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독실한 신앙에 바탕을 둔 형택의 고결한 영혼 앞에 석태의 설 자리는 없었으므로 석태는 늘 형택의 주변을 맴돌며 자기 존재의 보잘것없음을 더 큰 악으로 갚아야 했다. 누군가에게는 신의 은총을 구현하는 성지(聖地)가 누군가에게는 괴물 앞에 속수무책인 공포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형택의 선함은 석태를 괴물이 되게 내몰았을 뿐 아니라, 형택 자신의 인생도 망가뜨려 버렸다.

그래서, 살해된 형택이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 원한 관계는 아닐 것이라는 경찰의 말에 기업 해서 돈 벌었는데 원한 산 일 없을 리가 있냐고 일갈하는 창호(박용우 분)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개인적으로는 선량하고 성실한 기업인이었을 형택과 그의 아버지는 자신들이 본의 아니게 야수 같은 폭력적 현실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음을 몰랐던 것이다. 이는 조세희의 <뫼비우스의 띠>에 나오는 굴뚝 청소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두 사람이 더러운 굴뚝에 같이 들어갔는데, 한 사람의 얼굴만 더러워질 수는 없다. 이것을 영화는 석태의 입을 빌어 이렇게 묻는다. “넌 다르다고? 넌 깨끗하다고?”

▲ [사진출처-Daum영화]

이제 영화의 결론으로 들어가 보자. 형택의 선한 품성을 물려받았지만 석태로 인하여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석태처럼 괴물을 보게 된 아이 화이가 있다. 석태는 괴물의 실체를 몰랐기에 괴물의 입속으로 뛰어들었지만, 화이는 진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을 괴롭히던 괴물이 석태에 의해 훼손당한 유년 시절이 남긴 트라우마임을 깨닫는다. 괴물이 길러낸 아이는 더 이상 도망가지 않고 괴물을 응시한다. 그 장면, 폐쇄된 옛 성지보육원 터에서 엄청난 덩치로 위압하며 포효하는 괴물과 마주선 화이의 모습은 상징적이다. 영화는 말한다. 통찰하라, 그리고 직시하라. 네가 직면한 현실을 두려워 말고 괴물의 실체를 직시하라.

괴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누구나 자기만의 괴물 한 마리쯤은 가지고 있다. 외부의 폭력적 현실을 향해 겨누어야 할 칼끝이 방향을 찾지 못할 때, 비가시적 폭력을 가시적 폭력으로 갚아나가는 수많은 석태들이 양산될 것이다. 섣부른 용서 대신 괴물을 삼키고 스스로 괴물과 맞서는 삶을 택한 화이 역시 친부와 양부를 살해하고 나서야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는 잔혹한 운명을 걸머진, 또 하나의 괴물일 수밖에 없다. 영화는 터질 듯한 문제 의식을 장전하고 있고, 배우들의 폭발하는 연기력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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