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포대교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불안과 공포보다 먼저 움직이는 것은 동물적 감각으로 시청률을 올려줄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언론이다. 썩은 고기에 모여드는 하이에나 떼처럼 배를 불릴 수 있는 소재라면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언론이 이 자극적인 소재를 놓칠 리 없고, 거기 기생하며 부와 명예를 탐하는 언론인은 이를 자신의 입지 구축의 호기(好期)로 여긴다. 경찰 수뇌부는 행여 공권력의 권위에 흠집이라도 날까 목청을 높이고, 테러 진압반은 실력 발휘의 절호의 기회를 맞아 퇴근 시간 안에 모든 일을 끝내겠다고 큰소리친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에 인질과 테러범이 있다. 고립된 인질들은 생사의 기로에 서서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고, 테러 외에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없었던 테러범은 여전히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주장을 되풀이하느라 지쳐 간다.

'마포대교에 테러 발생’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이렇듯 ‘테러의 생중계’라는 영화적 상황을 통해 ‘테러의 생중계를 둘러싼 상황’을 관객에게 생중계한다.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뉴스의 현장 중계 방송을 보듯이 이 모든 상황을 관망하게 되는 관객이 떠올리는 첫 번째 질문은 당연히 누가, 왜 테러를 저질렀는가, 그의 요구는 무엇인가일 것이다.



테러범은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상과 사과를 원한다. 억울하게 죽은 인물의 주변 인물로 추정되는 테러범은 시청률을 보장할 테러의 생중계권을 제공하는 대가로 거액을 요구하고, 이 돈으로 응당 정부에서 받아야 할 보상금을 갈음한다. 남은 요구는 대통령의 사과. 정부로서는 돈 한 푼 안 들이고 말 한 마디로 수많은 인명을 구하고 상황을 종결시킬 수 있게 된 셈이다. 물론 대통령의 사과는 일반인의 말 한 마디와는 그 무게가 다르므로 선뜻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테러의 원인이 된 사건의 책임 소재가 정부에 있는 것이 명백한 이상 사과의 명분은 충분하다. 이제 사과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은 정부가 실책을 인정하고 억울한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를 표함으로써 귀중한 인명을 구하는 결단이 될 것이다.
하지만 테러범의 요구는 묵살된다. 주장의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테러범의 요구를 수용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편에서는 테러범을 자극해서 상황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은밀하고 주도면밀한 진압 작전을 준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서슬 퍼런 공권력에 도전하는 행위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강경론이 대두된다. 어느 쪽이든 테러범의 주장은 안중에 없다.

영화를 보면서 인질들의 안전을 걱정하면서도 테러범의 안타까운 사정 역시 외면할 수 없게 된 관객이 마주하게 되는 상황은 테러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처가 아니라, 테러가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소비되는가 하는 현실이다. 오로지 깔끔한 상황 종료만이 목적인 이들, 공권력의 위세를 증명해 보이는 계기로 삼으려는 이들, 이 자극적인 소재에 흥분하여 시청률 올리기에 급급한 이들, 이 와중에 저 나름의 잇속을 차리고자 하는 이들, 이런 권력과 언론의 행태가 씨실과 날실처럼 상황의 이면을 직조해 간다. 테러범은 악에 받쳐 자신의 주장을 하소연하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포대교 위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인질들의 목숨 역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테러 진압의 명분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상황은 좀더 나빠지는 것이 좋다. 아니, 나빠져야 한다.
결국 ‘테러의 생중계라는 상황의 생중계’를 통해 관객이 직면하게 되는 진짜 질문은 누가 진정으로 이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든지 무고한 인명의 희생을 피하고 싶어 하는 테러범과 어떻게든지 목숨을 구하고 싶은 인질들의 절박함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막다른 상황으로 내몰린다. 정부는 인질의 안전을 외면하고 그 책임을 테러범에게 떠넘긴다. 애꿎은 희생양이 되는 것은 인질들이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보상이든 사과든 테러범이 정부에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으로 테러범은 교훈을 얻고 테러는 근절될 것인가?

테러의 생중계라는 이 영화의 기발하고 충격적인 상황 설정은 충분히 흥미롭지만, 이런 소재는 자칫 말초적 자극에 그치거나 공연히 사회의 불안감만 증폭시켜 버릴 위험성도 안고 있다. 또한 방송국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단 하루 동안의 일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배경으로 한 편의 영화를 채우는 것이 가능할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는 러닝타임 97분 동안 잠시도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긴장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며 테러의 전말과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객에게 생중계하며 묻는다, 당신은 ‘테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테러’라는 말이 우리 주변을 떠돈 지는 오래되었지만, 남의 나라 일 같던 ‘테러’가 우리에게 실감나게 다가온 것은 미국에서 벌어진 911 테러 사건 때부터가 아닌가 한다. 전세계를 경악시킨 거대 규모의 테러가, 그것도 철통 방위를 자랑하는 우방국 미국의 심장부에서 벌어졌을 때, 아마 우리의 충격은 미국민 못지않았을 듯하다. 이제 테러의 안전 지대는 없다는 불안감이 테러에 대한 공포와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우리의 시각은 테러의 피해자 입장에 서 있다.
하지만 ‘모든 테러는 악이다’라고 규정하기 전에 테러 외의 다른 수단을 갖지 못한 절망적 상황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돌이켜보면 우리가 가해자일 수도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테러’의 사전적 의미는 ‘특정 목적을 가진 개인 또는 단체가 살인, 납치, 유괴, 저격, 약탈 등 다양한 방법의 폭력을 행사하여 사회적 공포 상태를 일으키는 행위’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지배자, 억압자에 저항할 수 있는 피억압자의 마지막 수단’이 오직 평화롭기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일제의 폭압에 맞선 저항의 역사, 오랜 민주화 투쟁의 역사에 대한 부정이요, 우리 역사에 ‘의거’로 기록된 모든 이들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테러는 희생자에게도 비극이지만 테러범이 된 이들에게도 견딜 수 없는 비극이다. 영화는 이 테러에 대한 불편한 진실에 주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모든 테러는 악이다’라는 명제에 동의할 수 있다면, 그것은 테러가 ‘무고한 인명의 희생’을 초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무고한 인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상황을 악화시켜 우리 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궁지에 몰린 테러범을 보며, 마지막 순간까지 현장을 지키며 언론의 사명을 다하려고 했던 여기자의 희생을 보며, 권력과 언론의 결탁과 그들의 비열한 술수를 보며 관객은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진짜 가해자인가. 테러라는 극단적 상황을 통해 한 인부의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는 정권은 수많은 인질의 희생 역시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먹먹하고, 뜨거운 영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