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설국열차 배급사 CJ E&M 제공 스틸 컷]

욕망의 통제를 배우는 시간, 빙하기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 2004년작 영화 <투모로우>에서는 지구 온난화로 급격하게 녹기 시작한 빙산이 해류에 영향을 주고, 냉각된 해류가 순식간에 지구를 얼려 버린다. 영화 <설국열차>에서는 지구 온난화가 심각해지자 부작용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기의 온도를 낮추기 위해 지구 대기권에 특수 물질을 살포하는데,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한 지구가 삽시간에 얼어붙어 버린다. 결국 인류가 맞닥뜨린 지구 온난화의 미래는 이대로 찜통 같은 지구에서 쪄 죽거나 아니면 기상 이변으로 빙하기가 도래해 얼어 죽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될 듯하다. 영화 <설국열차>의 배경은 기록적인 무더위를 겪으며 지구 온난화의 파국을 어렴풋이 체감하는 올여름에 딱 어울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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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예기치 못한 빙하기 도래 이후 17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시점에서 출발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궤멸시키는 빙하기의 도래는 공룡처럼 덩치를 부풀린 지구의 탐욕스런 포식자 인간에게 내리는 지구의 형벌이라 할 것이다. 아울러 지구가 스스로 정화되어 새롭게 생명의 별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파괴자 인간을 어떤 식으로든 폭력적으로 지구 생태계에서 분리시킬 수밖에 없다.

살아남은 소수의 인간들은 노아의 방주 같은 열차에 몸을 싣고 지구의 어떤 것과도 절연된 채 고립된 생태계를 끌어안고 지구의 궤도를 돌게 된다. 이들은 열차의 자급자족적 환경을 관리하면서 생태계 보호의 지혜를 배우지 않으면 살아서 지구의 시스템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들의 17년 간의 기적 같은 생존은 아무 때나 초밥을 먹고 싶은 욕망을 통제하며 조심스럽게 생태계를 관리할 줄 알도록 인류를 학습시키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 그러나 이들이 자연의 지배자 지위를 내려놓으면서도 끝까지 배우지 못한 것은 계급 사회라는 지배 구조 역시 지속 가능한 인류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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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칸과 꼬리칸을 지키는 두 지도자, 윌포드와 길리엄

17년 전 자신들이 지상에서 누렸던 모든 것들을 열차에서도 그대로 누릴 수 있는 앞칸의 탑승자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가까스로 열차에 무임 승차해 간신히 목숨을 구하게 된 꼬리칸 탑승자들. 한쪽이 신선한 채소와 과일, 생선, 그리고 야들야들한 스테이크를 먹을 때, 한쪽은 바퀴벌레를 갈아 만든 단백질 블록으로 연명하는 것만큼이나 이들의 처지는 극과 극으로 대비된다. 곤충 연구 전문가에 따르면, 바퀴벌레의 주요 성분은 단백질 40%, 탄수화물 20%, 지방 10%, 그 외 비타민, 키토산, 각종 무기질 등으로 구성되어, 깨끗한 환경에서 키워 정결하게 가공한다면 완전 식품으로 손색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꼬리칸 탑승자들이 바퀴벌레 가공 식품을 섭취하며 연명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유지되는 생존이란 벌레만도 못한 삶이 아니겠는가.

▲ [사진-설국열차 배급사 CJ E&M 제공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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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저한 계급 사회에서 가진 자 계급이 탑승한 앞칸은 넉넉하고 여유로운 다양한 편의시설로 구성된, 결코 접근할 수 없는 부의 구역이다. 못 가진 자가 머무는 꼬리칸 슬럼가는 실업과 빈곤, 냉대와 차별로 구획지어진 비좁고 밀폐된 칸이다. 그리고 양 구역 사이에는 열차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이 머무는 구역이 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구조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들, 소수를 지키고 부양하는 중간층, 협력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1 대 99의 극심한 양극화 구도는 다수의 불만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으로 안고 살기도 하지만, 이들을 무력감과 패배 의식으로 잘 길들이기만 하면 꼬리칸을 탈출하고 싶어 안달이 난 99%는 값싸고 쓸모있는 인력풀이 될 수 있다. 요리사도 예술가도, 심지어 아동 노동 인력까지 필요한 모든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다. 일단 꼬리칸을 떠나 고용되기만 하면 그들은 딴 사람이 되어 과거를 잊고 윌포드의 세계를 떠받치는 충직한 부품으로 재탄생한다. 이른바 ‘영혼이 없는 공무원’같이 되는 것이다.

▲ [사진-설국열차 배급사 CJ E&M 제공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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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세계의 질서를 창조하고 운영, 관리하는 자가 바로 윌포드이다. 그는 선견지명을 갖고 열차를 만들어 미래의 사태에 대비했으며, 대중 조작에 능하고, 공포를 활용할 줄 알며, 적절한 선에서 반란을 이용하고 통제하기도 하는 교활한 자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꼬리칸 지도자인 길리엄이다. 그는 굶주린 꼬리칸 탑승자들이 아귀(餓鬼)가 되었을 때 자신의 팔을 내주어 그들에게 인간의 눈을 틔워 준 성자이며, 17년을 한결같이 꼬리칸의 비참한 사람들 곁에서 헌신하며 살아왔다.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반전은 이 두 지도자 사이에서 일어난다. 베일에 싸인 절대 권력자 윌포드가 평범한 옆집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반란군 지도자 커티스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며 협조를 구할 때, 커티스가 느끼는 당혹감은 우리 자신의 것이다. 어느 선량한 내부 고발자가 반란을 돕고 있으리라는 예상이 빗나갔을 때의 충격은 배신감을 넘어 소름끼치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더욱 가공할 일은 윌포드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길리엄의 이중성이다. 두 사람의 모습은 이란성 쌍둥이 같아 혼란에 빠진 커티스와 함께 관객도 멘붕에 빠진다. 나는 이 두 사람의 관계가 남궁민수와 커티스의 입장 차이보다 더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고 본다.

▲ [사진-설국열차 배급사 CJ E&M 제공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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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리엄은 위선자인가? 아니다. 인육에 굶주린 민중을 깨우치기 위해 자신의 팔을 자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꼬리칸에 남은 길리엄의 진정성은 의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는 독사 같은 윌포드의 교활한 세 치 혀에 농락당한 것인가? 커티스에게 윌포드를 만나면 그의 말을 듣지 말고 죽이라고 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런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 역시 괴롭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려 깊은 지도자가 오랜 세월 상반된 가치관을 가진 자와 친분을 갖고 교감을 유지해 온 사실을 단순히 그의 순진함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는 아마도 이 세계의 붕괴, 이 질서의 파국을 상상할 수 없는, 선한 인품의 지도자였을 것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헌신했지만, 그가 원한 것은 이 가련한 사람들에게 좀더 자비로운 손길이 내려지는 것이었을 뿐, 청원이 아니라 투쟁을, 개혁이 아니라 혁명을 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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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질서의 영속’이라는 목표에 두 지도자가 공감했을 때, 반란은 임계점에 다다른 꼬리칸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일시적 분출구가 되기도 하고, 열차의 인구 조절을 위한 학살의 명분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실패한 반란은 약간의 경제적 혜택을 얻은 데 대한 자족감과, 반란 무용론에 대한 깊은 학습 효과를 각인시킬 것이다. 놀랍게도 현실 속에서, 많은 선량한 봉사자들이 길리엄처럼 이용당한다. 그들은 고결한 삶을 선택하지만, 그들의 노력과 희생이 부조리한 세계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기보다는 개선에 대한 환상을 심어 줌으로써 오히려 체제 온존에 기여하는 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통찰하고 있다. 선함이 이 세계를 구원하기에는 현실은 너무 복잡하고 간교한 것이다.

▲ [사진-설국열차 배급사 CJ E&M 제공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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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은 문제, 커티스와 낭궁민수

자애로운 지도자 길리엄의 뒤를 잇는 것은 밑바닥에서 단련된 커티스이다. 가혹한 압제에 신음하는 꼬리칸 사람들이 아무 설명도 없이 어린 자식을 빼앗길 때,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신발 한 짝을 던지는 것뿐이다. 마치 2008년 이라크를 방문한 부시 대통령에게 날아든 신발처럼 한 짝의 신발은 힘없는 자의 저항을 대변한다. 이제, 인간성이 바닥까지 추락하는 경험 속에서 길리엄이라는 멘토를 만나 각성한 커티스가 신발 대신 앞칸으로 전진한다.

그는 혁명의 문을 열고 또 연다. 피 보기를 두려워하는 길리엄의 걱정을 무릅쓰고 엔진을 향해 나아간다. 엔진은 열차의 동력이고, 엔진을 차지하는 자가 열차의 질서를 지배한다. 곧 엔진은 권력이다. 길리엄이 좀더 많은 분배라는 경제적 요구에 머무르는 반면, 그는 정치 권력의 탈취를 원한다.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자질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그는 투쟁의 과정에서 깊은 책임감을 배우고, 한 팔의 희생을 거쳐 참된 지도자로 성장해 간다.

▲ [사진-설국열차 배급사 CJ E&M 제공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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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옆을 보는 사람이 있다. 한때는 열차의 보안 설계자로서 열차의 질서를 수호하는 데 복무했지만, 지금 그는 열차의 질서를 뒤바꾸는 데 협조하고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열차라는 세상의 질서를 전복시키기를 꿈꾸고 있다. 이 강퍅한 자본주의 사회의 질서에 대한 감독의 대안은 가히 혁명적이다. 너무나 혁명적이어서 내게는 이상주의처럼 보인다. 커티스의 열정은 뜨겁게 심장을 흔들고, 남궁민수의 철학은 오래도록 차가운 사색에 잠기게 한다. 우리의 지향은 커티스와 남궁민수 사이, 그 어디쯤에 있을 것 같다.

▲ [사진-설국열차 배급사 CJ E&M 제공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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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민수를 선택한 감독은 미래를 열어갈 새로운 세대에 시선을 돌린다. 커티스가 닫힌 문을 열고자 할 때, 그 닫힌 문 너머를 내다보는 소녀가 있다. 열차의 탑승객 중 어떤 이들은 구질서로의 복귀를 꿈꿀 것이고, 열차에서 태어난 이들은 자신이 본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지구를 알지 못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열차의 소음에 영향받지 않는 소녀 요나는, 닫힌 세계 너머에 귀기울이며 이 혼란된 세상을 헤쳐 갈 것이다. 글쎄,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열차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열차의 소음에 익숙한 아이들이 미래의 문을 여는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커티스와 남궁민수 사이에서 나는 ‘봉준호 감독은 천재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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