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열 (중국 칭화대학교 초빙교수, The 4th Media 책임주필)


다음은 7.27정전협정 60주년에 즈음해 열린 7.27 60주년 평화협정 체결 촉구 남북해외 국제평화대회에 참가한 정기열 중국 칭화대학교 초빙교수가 작성한 참가기다. 이 참가기는 다음과 같이 3부로 나누어 소개될 것이다.

I부.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II부. “코리아에서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보는 것 같다!”
III부. 후기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서울대회 “간접참가기”: “비온 뒤 땅이 굳다”

▲ 지난 7월27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정전60년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실현 시민문화제’에 쵸스도프스키 교수, 중국의 시옹레이 교수, 후이난 <4월망> 총편집인 등이 국제평화대회 참가단으로 참가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서울대회 참가기는 일종의 간접참가기다. 주요 참가자들 가운데 쵸스도프스키 교수, 중국의 시옹레이 교수, 후이난 <4월망>(중문) 총편집인과의 대화를 글로 엮은 것이다. 1부에서 남북해외 7.27 참가기를 “집단이 함께 쓰는 7.27회고록”이라 부른 이유다.

서울대회에는 쵸스도프스키 외에도 중국의 대표적 진보인사로 잘 알려진 신화통신사 1세대 기자 시절 “전설적 명성”을 떨친 청화대 시옹 교수, “조선전쟁사” 전문가이자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저명한 진보논객 저우쥔, 반제자주사상에 투철한 <4월망> 청년 총편집인 후가 참가했다.

이들 외에도 코리아전문가로 오래 잘 알려진 미국의 그레고리 엘리히, 팀 쇼락도 참가했다. 일본 전 중의원 핫토리를 비롯 약 2-30명 이상 일본의 귀한 벗들도 대거 참가했다. 북미주, 아시아, 유럽 등 지구촌 곳곳에서 7.27대회 목적, 취지에 찬동하는 모두 약 50명의 외국벗들이 참가한 것이다.

반제자주 기치 아래 서울을 찾은 외국의 귀한 벗들은 국제대회를 조직한 통합진보당, 진보연대, “반전평화국민행동” 등 남녘의 모든 7.27 60주년 대회조직 주체들과 함께 반전평화자주통일운동사에 또 하나의 큰 획을 그은 새로운 역사적 이정표를 세운 것 같다. 특히 이번 서울국제대회가 작년 총선/대선을 거치며 어쩌면 남녘 진보운동 역사상 가장 큰 위기 가운데 하나였을 감당키 어려웠던 모진 시련을 모두 다 온전히 극복하는 계기로 기능한 것 같기 때문이다.

7.27 대회가 통합진보당을 중심으로 당시 살아남은 진보진영의 모든 자주통일역량이 상상키 어려웠던 모진 고난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흩어진 당과 진보운동의 전열을 새롭게 가다듬어 앞으로 큰 한걸음을 크게 내딛게 만들었던 과정이 되었다는 안팎의 평가도 있다. 7.27 서울국제대회가 자신이 본래 목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기대치 이상의 훌륭한 자기 몫과 역할을 결국 감당하게 되었던 것은 아닌가 조심스레 해석하는 이유다.

제주 강정마을에서 출발 한라산, 지리산을 거쳐 판문점까지 계속된 “평화협정 체결촉구 국제평화대행진” 투쟁과 함께 7.27 60주년 국제평화심포지엄을 조직하고 진행했던 전 기간 한편에선 조중동 같은 대표적 매문지들의 전방위 지원과 지어는 소위 “진보진영” 일부의 내부지원사격까지 받으며 작년 한해 내내 벌인 소위 “종북세력” 척결 소동은 결국 새누리당 지도부와 오늘 “해체설”까지 나도는 “국정원”의 공동작품이었음이 만천하에 폭로되기에 이르렀다.

진보당을 중심으로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은 전체 진보진영은 7.27 60주년 대회를 거치며 결과적으로 작년 총선/대선 전후 “청와대, 새누리당, 검찰, 경찰청, 중앙선관위”까지 총동원된 모든 권력(시녀)기관들의 “진보당 죽이기 파괴음해공작”을 결국 온몸으로 적극적으로 맞받아 싸워 극복한 것이다. 하여 오늘 진보당과 진보진영 모습은 “비온 뒤 땅 굳는다”는 경우처럼 보인다. “쭉정이는 사라지고 알곡만 남은” 경우 같기 때문이다.

오늘 진보당 모습이 과거 요란했던 무슨 “계파간 대립, 갈등, 분열” 같은 일체의 부끄러운 모습에서 거의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012년 총선/대선을 거치며 한때 거의 궤멸상태로까지 몰려가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쌓였던 모든 앙금, 찌꺼기들을 이번 7.27 대회를 거치며 결국 모두 훌훌 벗어 버린 것은 아닌가 싶어서다. 7.27 60주년 대회의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고 강조하게 되는 이유다.

“어려울 때일수록 오히려 머리를 높이 들고 더욱 용기백배해 앞으로 전진해나가야 한다!”는 역사의 귀한 가르침을 새삼 다시 각인케 된 대회가 아니었나 싶다. 실은 위에서 언급한 서울대회에 대한 평가는 남녘에서 7.27 대회를 조직한 주최측의 평가가 아니다. 국제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온 우리와 말과 글이 다르고, 피부, 민족, 역사, 문화, 종교가 서로 다른 세상 각지에서 참가한 세계반제자주투쟁의 길을 함께 걷는 외국의 귀한 벗들, 동지들의 집단평가에 기초한 해석적 분석이고 평가다.

“코리아에서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보는 것 같다!”

▲ '전쟁반대 평화실현 공동행동'은 7월27일 오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 '정전 60년,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국제평화대회'를 개최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서울대회를 참가하고 동경에서 만난 쵸스도프스키의 첫 일성이다: “코리아의 미래는 물론 인류의 미래에 대해 새롭게 다시 전망해볼 수 있었던 감동적 대회였다. 깊은 감명(inspiration)을 받았다. 많은 힘과 격려를 받았다. 대회를 주최한 진보당과 진보진영은 작년 한해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고 들었는데 이번 대회를 통해 만난 그들 모두는 이미 모든 시련을 거뜬히 다 이긴 사람들 모습이었다. 오히려 더욱 깊어지고 단단해진 인상을 받았다. 코리아에서 인류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꿈을 갖게된 이유다.”

2005년에 이어 8년 만에 서울을 다시 방문한 뒤 “인류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꿈과 희망을 다시 갖게 됐다”고까지 고백한 쵸스도프스키의 발언은 I부에서 소개한 북녘대회에 참가했던 클라크 발언과 근본에서 서로 같다. 세상 수많은 나라들에 끝없이 초청 받고 또 지구촌 곳곳을 찾으며 억눌린 자들의 반제자주투쟁에 진심을 다해 함께 연대하는 하여 세상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인류의 양심들이 이구동성으로 “코리아에서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보는 것 같다”고 고백한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 그들 발언을 접하며 먼저 카터 대통령 일화가 하나 생각났다. 북핵위기가 전쟁직전까지 밀려갔던 1994년 6월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만나고 돌아온 카터 대통령 기자회견 갖고 “대한민국 대표 매문지” 조선일보가 카터 대통령을 당시 “친북”이라 매도했던 일화다. 그래서다. 그들이 오늘 클라크, 쵸스도프스키 발언을 접할 경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한 이유다. 카터의 “친북” 딱지 정도가 아닐 것 같아서다. 진보당과 이정희 대표가 툭하면 듣는 “종북” 딱지가 그들에게도 영락없이 붙을 것 같아서다.

인류의 대표양심들이라는 그들은 본인 말들처럼 “이미 오래 산” 노익장들(참고로 클라크는 1927년생)이다. 그들 고백을 소개하는 이유는 그러나 달리 있다. 그들 고백이 그 무슨 외교적 발언 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학적 수사는 물론 아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누구의 사주를 받아 사는 사람들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이유는 인류사를 꿰뚫어보는 그들의 혜안 속에 꿈, 희망과 함께 그들의 혼, 진심이 담겨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진심이 담긴 그들 고백을 소개하는 이유다.

“인류사 유례가 드문 위대한 사회변혁운동”인 남녘의 자주민주평화통일운동, “인류사 전무한 극단의 비대칭전쟁사”인 북미대결전을 오늘 이미 승리로 결속한 채 당당하게 “세계반제자주화”라는 새로운 인류사를 쓰고 있는 북녘동포들, 그리고 지구촌 곳곳에서 분단조국의 자주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수백 만 해외동포들 모두가 머지 않아 함께 이룩해낼 “통일코리아의 인류사적 의의”와 어떻게 맞닿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통일코리아”의 인류사적 의의 그리고 인류의 새로운 미래

▲ 국제평화대회 참가자들이 녹사평역에서부터 전쟁기념관까지 행진을 하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코리아에서 본다”는 클라크와 쵸스도프스키의 혼과 진심이 담긴 고백은 우리민족의 1세기에 걸친 위대한 반제자주민족해방투쟁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에서 비롯된 존경, 감사 동시에 일종의 “사죄”의 념(念)이 표현된 고백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 머지않은 장래에 기필코 이루어질 통일코리아에 대한 확신이 더욱 깊어진 것은 물론 인류의 미래에 대한 꿈, 희망 또한 새롭게 다시 갖게 되었다는 진심이 담긴 그들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꿈과 염원, 소망이 근본에서 우리민족의 반세기에 걸친 꿈과 염원, 소망과 서로 맞닿아 있다고 해석하고 정의하는 이유다. 그들의 고백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함께 좀 더 깊이 해석하는 이유다. 그들의 고백이 우리민족 누구누구의 고백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해서 더욱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클라크는 북에서 쵸스도프스키는 남에서 그러나 둘은 근본에서 서로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고백은 I부에서 소개했듯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평양대회에 참가한 벡커, 마라 역시 근본에서 같은 고백을 했다. 서울-평양대회에 각각 참가하고 동경에 돌아와 만난 일본의 수십 명 귀한 벗들 또한 그들과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았다. 평양에서 만난 일본친구들이 대회 내내 클라크에게 보인 존경, 감사, 연대의 눈빛은 가짜가 아니었다. 외교도 아니었다. 형식도 아니었다. 그들과 평양대회 내내 나누었던 따뜻한 눈길, 악수, 포옹에서 경험된 그들 마음 또한 진심을 담고 있었다.

평생을 사회주의반제자주투쟁으로 산 시옹(熊)도, 마오주의자인 저우(周)도, 어려서 비록 미국, 캐나다에서 교육 받았으나 오히려 더욱 철저한 반제자주투사가 되어 돌아온 후(胡) 또한 모두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고백했다. 도대체 외국의 귀한 벗들 모두는 남과 북에서 무엇을 어떻게 경험 했길래 모두 하나같이 거의 같은/비슷한 고백을 할까?

그들은 평생 반제자주문제를 붙들고 자신들의 조국에서 그리고 지구촌 곳곳을 쫒아 다니며 투쟁을 멈추지 않는 자타가 공인하는 지구촌의 양심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는 물론 그 어디에서도 오늘의 암울한 인류 현실을 타개할 하여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결정적인 돌파구를 어쩌면 아직 보지 못했었는지 모른다. 오히려 보이는 것이라곤 거꾸로 수백 년에 걸친 미국주도의 서구세력에 의한 끝없는 침략만행, 약탈이 반복되는 것만을 보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한편 어딘가에서 지치고 실망한 채 일상을 영위했을지 모른다.

그러다 또 다시 인연이 닿아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 코리아를 찾은 것이다. 이미 오래 전 사문화되고 폐기처분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여 코리아와 동북아 나아가 지구촌에 반제자주와 정의, 평화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보겠다는 남북해외 코리안들의 꿈과 희망, 신념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안은 채 노구를 이끌고 지구를 반 바퀴 돌아 혹은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의 남과 북을 찾은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뜻밖의, 전연 뜻밖의 새로운 꿈, 희망, 전망을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희망찬 새 전망을 어쩌면 바로 그곳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 코리아의 남과 북에서 전연 뜻밖에 경험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들의 고백이 혼과 진심, 꿈과 희망이 담긴 고백이었다고 해석한 이유다. 바로 그 진한 감동과 기쁨이 그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남북해외의 대회주최자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연발했던 이유였을지 모른다. 후이난과 일본친구들처럼 “최고!”를 외치며 힘이 넘쳐 마치 분출하는 모습을 보였던 이유였을지 모른다. 세계석학 쵸스도프스키가 난데없이 그것도 서울광장 수만 명 시민들 앞에서 생전 처음 “양키 고 홈”이란 정치선전선동구호를 외치게 되었던 이유였을지 모른다.

분출하는 기운과 진한 감동 그리고 “양키 고 홈”(Yankee Go Home!)

▲ 7.27 대회 참가차 서울에 온 시옹 레이 청화대 교수(오른쪽)가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왼쪽은 저우 쥔 중국 시사평론가. [통일뉴스 자료사진]

말, 글, 민족, 피부, 문화, 역사 배경이 다른 그들 모두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이구동성으로 미래에 대한 꿈, 희망을 이야기하고 모두 흥분해 들뜬 모습처럼 비칠 정도로 힘이 분출하여 춤을 덩실덩실 추었는지 모른다. 역사적인 동경 국제평화심포지엄을 성황리에 마치고 백여 명 넘게 모인 축하만찬장에서 보았던 모습이다. 평소 말수가 적고 조용한 일본친구들이 연단에 올라 흥분해 목소리가 쉬도록 연설하고 술잔을 들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모습이 신기해보였을 정도다.

축하만찬에 참가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다. 재일동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코 자리를 돌며 끝없이 축배의 잔들을 나눴다. 서양의 귀한 벗들도 흥분해 기운이 분출하는 모습을 보였다. 쵸스도프스키가 특히 그랬다. 금강산 가극단 아리따운 처녀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아름다운 조선옷에 반하고 거의 원어수준으로 프랑스어 노래를 부르는데 반하고 노래솜씨에 반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도 연단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곤 난데없이 독일어 원어로 그녀가 부른 노래를 불렀다. 기쁘고 희망에 넘쳐 무엇인가 마치 폭발할 듯 기운이 분출하던 축하만찬이었다.

클라크는 처음으로 양해를 구하고 방에 먼저 올라갔다. 강행군이었던 평양대회 일정을 끝까지 소화한 그가 동경대회 공식일정까지 모두 마치고서야 비로소 처음 양해를 구한 것이다. 깊은 존경심, 감동이 콧등을 시리게 했다. 80 후반으로 접어든 그는 어깨, 등이 굽고 걸을 때마다 발을 절룩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초청해준 사람들에 대한 예의, 도리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평양대회 내내 그랬듯 아무 말 없이 그를 꼭 안았다. 목이 메어 말을 이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80을 넘기셨으나 마치 3-40대 청년처럼 언제나 앞장서 걸으시고 지칠 줄 모르시며 오늘도 붉은포도주를 즐기시는 그는 조국통일운동의 한길에서 평생 걸음을 멈추지 않으시는 재일동포사회의 “유명한 여성혁명가 안병옥” 어머니시다. 만찬장 연단에서 대회 실행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청년처럼 뜨겁게 연설하시던 모습에서도 기운이 분출했다. 대회를 끝내고 동포실행위원회가 따로 만나 서로 노고를 치하했던 저녁만찬에서도 그러셨다. 그날도 분출하는 기운이 넘쳐나는 어머님 모습은 바로 청년의 모습이었다.

쵸스도프스키, 시옹, 저우, 후는 7월 26일 국제평화심포지엄, 27일 오전 판문점 방문 모두 귀한 경험이었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용산미군기지 앞에서의 반미투쟁과 비가 쏟아져 내리는 저녁나절의 서울광장 기억은 오래오래 잊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광장을 가득채운 수만 명 시민의 떠나갈 듯 했던 함성소리를 들으며 쵸스도프스키가 국제인사들을 대표해 수만 명 서울시민 앞에 섰다.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던 그의 입에서 터진 첫마디는 평생 학자로 살아온 그에게 어울리지 않을 “양키 고 홈!” 구호였다.
아마도 수만 명 서울시민의 뜨거운 열기가 냉철한 세계석학의 심장을 순간 뜨거운 선전선동가로 바꾸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동경에서 만나자마자 털어놓은 그의 첫 마치 승전보 같은 보고였다. 그날 그 구호가 자기를 살렸다며 너무 좋아했다. 양키 고 홈 구호를 수만 명 시민이 따라 했을 때는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20년 가까운 인연의 쵸스도프스키는 때로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아이 같을 때가 있다. “세계석학”이란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런 모습은 그가 참으로 맑고 깨끗한 사람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계산은 잘못한다. 대신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가 그의 유일한 기준이다.

그는 동경대회를 마치기 전 이미 서울대회 경험을 글로 옮겨 2백만 고정 독자를 가진 지구촌 최대 진보독립언론매체 글로벌리서치(Global Research)에 올렸다. 대회에 함께 참가한 GR 영상책임자 제임스 또한 대회를 다큐로 제작해서 올렸다. 그들의 글, 다큐영상은 세상 많은 독립매체들을 통해 지구촌 곳곳으로 퍼졌다. 동경대회 뒤 벌써 3개의 글, 5개의 동영상프로그램이 소개됐다. 서울-평양-동경 대회에 참가한 동료들의 연설, 발표를 모두 소개한 것이다. 힘이 분출한다는 말은 그들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동경의 안병옥 어머니를 포함 오늘 그들 모두는 그 모습이다.

진보당 이정희 대표의 열렬한 팬이 되어 돌아온 쵸스도프스키 교수

▲ 지난 7월27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정전60년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실현 시민문화제’에는 국제평화대회 참가단을 대표해 미셀 쵸스도프스키 교수(왼쪽)와 수지 킴 ASCK 운영위원이 무대에 올랐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시옹 교수는 2009년 12월 그리고 2011년 10월 ‘동북아평화국제학술회의’ 대표단으로 서울,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반제자주 성향의 중국의 저명한 언론인, 학자, 전문가들 십여 명을 조직해 함께 방문했을 때다. 시옹은 이번에도 선뜻 서울방문을 수락했다. 사회주의반제자주 원칙 관련 자신의 조국인 중국의 미래를 때로 염려하던 그가 북경에 돌아오자마자 한 말이다: “서울방문 의의가 크다. 용기와 격려를 받았다. 코리아의 미래를 낙관하게 됐다. 중국과 동북아 미래에 대해서도 새로운 꿈을 갖게 됐다.”

동경대회를 끝내고 8월 7일 북경에 돌아와 만난 후는 얼굴 표현부터 바뀌어진 것 같았다. 서울 가기 전과 달라 보였다. 사람 대하는 자세도 달라진 것 같았다. 표현, 행동에서 적극적인 후가 아무래도 받은 감동이 큰 것 같았다. 서울대회 이야기를 할 때 그는 행복해보이기까지 했다. 30을 막 넘긴 진보적 성향의 후는 인류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 반제자주적 원칙에서 그는 조국 중국이 씨름하고 있는 제반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까지 갖춘 드문 배경의 청년언론인이다.

13억 인구 가운데 2008년 북경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 중 한명으로 선정될 정도로 그는 여러 면에서 대단히 출중하다. 어려서 부모 따라 지구촌 곳곳을 다녔다. 미국, 캐나다에서 공부하게 된 배경이다. 언론분야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영문 당기관지 <China Daily> 편집인도 5년 거쳤다. 원자바오 총리 해외출장에 수행기자로 자주 따라갔다. 하여 젊지만 세상경험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는 출세, 배경, 지위를 모두 뒤로 한 채 오늘 가난한 진보독립매체를 붙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가 서울 다녀온 뒤 얼굴이 상기되어 평소 보이지 않던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에게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가 “최고다!”를 연발했다. 얼굴이 상기된 채 서울대회 경험을 털어놓았을 때 모습이다. 서울대회에 참가하게 된 기회를 그리도 기뻐하고 고마워할 수가 없었다. “언제든 다시 찾아가고 싶다!” “이전에 일찍이 경험치 못하고 상상치 못했던 감동의 연속이었다.” 동경에서 돌아와 만난 그의 얼굴에서 무엇인가 다른 것을 보았던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쵸스도프스키가 동경에서 만나자마자 서울이야기를 털어놨다. 반가운 이름들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익히 아는 오종렬 총회의장을 반갑게 만났다. 언어차이로 대화를 직접 나누지 못했지만 몹시 반가웠다. 반가움, 기쁨,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힘들었다.” 순식간에 쏟아낸 말들이다. 그런데 한충목 진보연대 공동대표가 좋은 방법을 하나 가르쳐준 것 같다. 몸으로 하는 대화다. 대회를 거치며 그리도 고마울 수가 없던 쵸스도프스키를 한 대표가 “형님”이라 부르기 시작하며 그를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껴안았다고 한다. 참고로 필자도 올해 70이 된 그를 형님이라 부른지 한 10년 된다. 한 대표와 동경에서 다시 만난 쵸스도프스키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진심을 다해 껴안았다.

쵸스도프스키가 이정희 대표에 대해 불쑥 물었다: “이정희란 이름이 맞는가? 대회 내내 여러 차례 만났다. 대화도 몇 차례 나누었다. 남녘정치상황, 정세에 대한 이해가 명확했다. 논리가 정연했다. 작년에 대단히 어려운 과정을 거친 것 같은데 단단해보였다. 흐트러짐이 없었다. 통합진보당 미래에 긍정적 기대를 더 갖게 된 이유다. 서울에 꼭 다시 가고 싶다.” 역시 순식간에 쏟아낸 말들이다. 그는 이미 진보당 이정희 대표의 “열렬한 팬”이 되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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