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활웅 (본사 상임고문, 재미 통일연구가)


이틀 전 박정희의 여식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로 들어가면서 “감회가 새롭고 깊다”고 했다한다. 아비가 총칼로 불법강점하고 18년 동안 희대의 폭군노릇을 자행하다가 마침내 비명횡사하고야 떠났던 바로 그 집에, 그의 딸이 34년 만에 선거라는 민주절차를 거쳐 떳떳하게 새 주인으로 되돌아왔으니 그럴 법도 했을 것이다.

남북관계 발전을 기할 수 없는 취임사 통일관

딸 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좋은 말을 많이 했는데 요점은 과학기술과 IT산업에 역점을 둔 창조경제로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이루되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하는 가운데 복지를 늘려서 국민의 행복과 안정이 보장되고 문화생활이 향상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비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딸의 소원도 어느 정도는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니 나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나 남북문제에 관한 그의 기본인식과 자세가 여전히 경직되고 비현실적이었다는 점은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북한의 핵실험은 민족의 생존과 미래에 대한 도전이며 그 최대 피해자는 바로 북한”이라고 악담하면서 “북한은 핵을 내려놓고 평화와 공동발전의 길로” 나오라고 재촉했다. 그리고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로 한민족 모두가 보다 풍요롭고 자유롭게 생활하며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행복한 통일시대의 기반”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를 밀어 준 보수인사들을 만족시키는 효과는 있었겠지만 평화통일을 이뤄야할 상대방인 북한에게는 씨도 먹힐 수 없는 설익은 소리들이었다.

딸 박 대통령의 대북 자세는 남북관계를 완전박살내고 북으로부터 “역적”으로 지탄받은 MB의 “비핵 개방 3000”주장과 기본적으로 궤를 같이하고 있다. 즉 북한이 먼저 핵을 버리기 전에는 남북관계에 아무 진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아직 대통령 취임 전인 지난 14일 방한 중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일본 중의원 의장을 만난 자리에서도 새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북한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보여줄 때에만 진전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북한이 도발하면 협상하고 보상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는데 긴요하다"며 "북한의 핵 도발은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며, 이를 통해 북한이 얻을 것은 없다는 것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또 취임사에서 “확실한 억제력을 바탕으로 남북 간에 신뢰를 쌓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겠다”고 했는데 그가 말하는 “확실한 억제력”이란 바로 그가 늘 강조하는 “공고한 한미동맹”임을 그 자신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국제사회의 규범을 준수하고 올바른 선택을 해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진전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도 했는데 이 또한 미국의 당국자들이 늘 하는 말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었다. 이렇듯 대미의존을 “확실한 억제력”으로 생각하고 있는 딸 박 대통령이 미국의 상시적 위협을 받고 있는 북한이 핵무기를 “확실한 억제력”으로 믿고 있는 것을 비난하는 것은 억지이다. 그런 상태에서 남북관계의 발전은 기할 수 없는 일이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고 했는데, 한반도의 분단문제는 북한과 미국 간의 전쟁을 공식으로 끝내고 주한미군을 한반도에서 내보내야만 해결이 시작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북한보다 인구나 경제력에서 월등 우세한 남한이 오히려 북한을 두려워하며 미군을 계속 붙들어 두려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그런 상태의 장구화를 위해 휴전 60년이 돼도 평화협정 체결에 불응할 뿐 아니라 부단한 한미합동 군사훈련 등으로 북한과의 긴장상태를 계속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은 왜 한반도 분단현실 지속을 선호하는가

70년이 다 돼도 한반도의 분단이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것은 결코 우리 민족자신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의 주변강국들은 한반도의 분단현상이 그들의 이해관계에 부합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분단의 장기화를 바라고 또 그렇게 되도록 획책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들 스스로가, 특히 지도층 인물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분단연속을 꾀하는 주변열강들의 가락에 맞춰 덩달아 춤추는 어리석음을 계속하고 있으며, 열강들은 이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못난 놈들”이라고 우리를 비웃고 있다. 이것이 한반도 분단의 실상이다.

시초에 한반도는 미국과 구소련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단됐지만 1950년대 이후로는 중국과 미국의 이해가 맞물려 그 상태가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 두 강대국 중 어느 쪽이라도 분단한국의 존재가 자국에게 중대한 손실이나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으면, 어떤 방향으로든 그 타개책을 모색하고 강구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매우 불행하게도 중미 양국은 남북이 분단되어 서로 싸우고 있는 현상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 오히려 양국의 이해관계와 합치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한반도의 무기한 분단을 획책하는 미국은 1953년의 휴전협정으로 3개월 내에 정치회담을 열어 미군을 포함한 외국군대의 철수와 남북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 문제를 다루기로 약속해 놓고도, 3개월도 되기 전에 주한미군의 무기한 주둔을 골자로 하는 방위조약을 남한과 체결해 버렸다. 그리고 그 이듬해 제네바에서 열린 정치회담을 결렬시켜버렸다. 미국은 또 휴전협정을 무시하고 남한에 핵무기를 반입했으며 한국군과 더불어 북한을 위협하는 군사훈련을 계속했다. 미국의 이러한 약속위반에 대한 북한의 정치적 군사적 반발은 번번이 미국의 교묘한 심리전술에 의해, 아직도 못 버린 북한의 남침야욕의 노정으로 남한 주민들에게 비춰져, 주한미군의 존재가 미국자신의 이익 때문이 아니라 마치 남한에 대한 미국의 엄청난 시혜인양 순진한 한국국민들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 답답한 현실이다.

그러면 중국은 왜 한반도의 분단현실을 오히려 선호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에 따른 것이다. 즉 주변의 작은 나라들끼리 싸우는 것이 중국의 이익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1950년 말 미군의 북한점령기도는 좌시할 수 없어서 저지했지만 남북분단의 장기화는 중국에게 나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것이 그들의 속셈인 것이다. 또한 긴 역사의 눈으로 볼 때, 고구려와 발해가 망하면서 중국의 영토가 동북방면으로 크게 확장됐으며, 근세에도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먹히는 과정에서 간도지방이 중국영토로 확정된 바 있으니, 미국과 남한에 의한 대북압력의 지속 및 증대는 궁극적으로 중국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계산도 필시 깔려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미국이나 중국이나 하나같이 한반도 분단현실의 지속을 선호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두 나라 모두 한국인들의 과거 행적으로 볼 때, 통일된 한반도가 어떤 체제를 택하든 간에, 미중 양국의 대치상황에서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필시 어느 한쪽에 붙을 것인데, 그것이 자기 쪽이 아닌 다른 쪽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특히 남북의 지도자들은, 중국과 미국 간에는 한반도의 분단 상태는 당분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그들 양국에게 모두 이익이 된다는 공동인식이 있어서 그에 따라서 우리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년에 대한 남북관계 기대를 일찌감치 접어야 하는가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남북이 갈린 지 68년, 동족 간에 전쟁이 벌어진지 63년, 그리고 휴전된 지 60년이 된다. 이제 민족의 몸통이 두 동강 난 격통의 세월이 일제의 노예로 살던 굴욕의 시간의 두 배가 돼간다. 그런데도 해가 갈수록 분단은 굳어만 가고 통일의 전망은 더욱 아득해지고 있으니, 이는 그냥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 참으로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는 새 지도자와 그의 정부에게 주변강국들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그를 토대로 남북관계를 바로잡고 통일의 문을 열어줄 민족 대행진의 대열을 정비하고 앞장서줄 것을 기대해 보지만 늘 실망해 왔다. 이번에도 새로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이 피력한 설익은 민족통일관을 접하며, 적어도 남북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또 허비될 5년에 대한 기대를 일찌감치 접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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