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수 (통일맞이 정책실장)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되었다. 오바마 재선은 한미관계에서 북한과 중국에 대한 협력과 갈등이라는 새로은 변수를 안겨주었다. 오바마 2기 행정부는 북한에 대해서 기존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정책을 고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략적 인내’가 북한의 핵능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했을 뿐 별다른 생산적인 결과들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바마 2기 행정부의 대북정책에서 변수가 되는 것은 한국 대선의 결과이다. 오마바 정부는 동맹국과 동반자적 관계를 중시 여기기 때문에 대북정책에서 이명박 정부의 의견을 경청하였다. 오바마 정부 출범 초기인 2009년 4월 5일에 북한의 로켓발사는 오바마 정부를 격앙시켰다. 북한은 오바마 정부의 정책의지를 테스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겠지만, 오바마 정부는 북한으로부터 테스트 당한다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여겼다.

이후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은 미국 대외정책에서 우선 순위가 크게 밀렸다. 그런 상태에서 이명박 정부가 오바마 정부에게 자신들의 대북정책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면서 한미FTA 재협상을 비롯한 미국정부의 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으로서는 대외정책의 후순위인 대북정책의 협조요청을 당연히 수용했다는 것이 미국 조야에 널리 퍼진 이야기이다.

‘악마의 방해’를 극복하는 길

한국에서 대북화해협력정책을 펼치는 세력이 집권할 경우 오바마 정부는 ‘전략적 인내’를 수정하고 화해협력정책을 지지할 것이다. 남북경제협력를 비롯한 각종 남북대화와 인적접촉은 남한 정부의 몫이고, 북핵폐기와 평화체제 전환에 대해서 한미간에 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갈 것이다.

물론 북한과 시리아, 이란 등에 대한 핵커넥션을 제시하면서 북한의 핵확산에 대한 미국의 우려가 커질 경우 북핵폐기 논의는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 있다. 이처럼 지체되는 북핵폐기 과정이 남북대화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지만, 기본적으로 남북대화와 북핵문제는 직접적으로 연계되지 않은 채 병행해서 추진될 수 있다.

미국의 민주당 주변에서는 그동안 한미 양국의 정권의 성격이 불일치했던 것을 ‘악마의 방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대중 초기와 클린턴 말기를 제외하고는 김영삼-클린턴, 노무현-부시, 이명박-오바마 등 한미 양국의 정권 성격이 달랐던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한국에서 화해협력 세력이 집권하는 것은 10.26으로 박정희 정권이 붕괴된 이후 최초로 악마의 방해를 극복하는 사건이 된다. 남북관계, 한미관계, 북미관계의 삼각발전 가능성을 내포한 시기가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아시아 회귀는 균형외교의 시험대

오바마의 재선은 다른 한편 한국으로 하여금 한미관계와 한중관계에서 균형외교를 펼치는 시험대를 제공할 것이다.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정책이 대중국 봉쇄로 현실화된다면 한미동맹과 한중경제협력이 파열음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오바마 재선으로 대북정책에서 한미협력 뿐만 아니라 대중국 정책에서 균형외교를 펼치는 것에 대한 한미협력이 절실해지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즉 한국의 대북정책, 대중국정책 뿐만 아니라 대미 정책에서도 변화하는 환경에 맞는 창의적인 새로운 수단이 필요한 시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미국의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간의 분열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양세력의 분열을 극복하면서 2년차 임기에 성과를 만들어내야한다. 미국의 갈등과 분열은 그 근원이 형식논리적으로 볼 때 한국의 분단과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분열 극복필요성에 입각해서 미국내부에서 한국의 분단극복에 대한 이해도를 넓히는 대미외교전략이 가능하다.

미국 남부와 북부에 정착한 사람들의 뿌리가 달라서 미국은 출발부터 분열을 안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치 해방후 북한에 소련군이 남한이 미군이 진주해서 오늘날까지 남북분단으로 이어고 있는 것과 형식논리에서 유사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미국의 분열과 남북분단의 형식적 유사성에 착안하여 남북분단의 필요성에 대한 대미 여론형성을 위한 외교가 가능할 수 있다.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의 대립도 결국 남부와 북부에 각기 다른 사람들이 정착한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도 근원은 여기서 시작한다. 6.25전쟁의 기원과도 흡사하다.

미국 남부와 북부의 갈등 그리고 한반도

1606년 식민지 개척을 목적으로 한 스미스 일행이 버지니아에 상륙하여 만든 첫 정착지가 제임스 타운이다. 엘리자베스1세의 아들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담배농사를 시작했고, 날씨 좋고 땅 풍성한 버지니아에서 플랜테이션으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노동력이 필요해서 1619년에 처음으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채용했고, 1634년에는 마침내 노예선을 아프리카에 보내기에 이른다.

북부는 이와 다르다. 영국 헨리8세의 종교탄압을 피해 네델란드로 도망온 일종의 반체제개신교들은 종교자유와 자식교육을 위한 그들만의 신천지를 필요로했다. 그들은 식민지무역회상의 중개로 버지니아로 이주할 것을 결심하고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탔으나 풍랑으로 보스톤 근처로 도착했다. 거기는 날씨도 추웠고 버지니아처럼 플랜테이션을 할 수도 없는지라 어업, 제조업 등에 종사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상륙한 남부와 북부의 초기 세력들은 이질적이었고, 경제제도로 상이하게 발전했다.

남부와 북부는 서로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영국귀족보다 더한 생활을 하는 남부 귀족들의 눈에는 북부는 야만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북부는 양키가 되었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 이민 온 북부 정착민들의 눈에 보이는 남부는 노예를 착취하는 야만이이었다. 메이플라워호가 미국땅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남부에서는 흑인노동력이 제공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남부번영의 원동력이 되었다. 북부 사람들의 눈에 남부가 곱게 보일리 없다.

이와 같은 남북부의 차이는 굴절되어오면서 남북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까지 미국의 정치문화적 극단적 양극화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 독립전쟁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온 사람들이 정착한 북부 보스톤에서 촉발된 것은 이런 배경에서 본다면 당연한 일이다.

대미 여론 외교의 수단을 개발해야

남부와 북부의 연합에 의해 독립달성은 이뤄졌으나 독립 후에도 처음 출발때부터 문제가 된 남부과 북부의 상이한 경제환경에서 비롯되는 노예제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합중국(USA)과 남부동맹(CSA)라는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두 정부는 결국 남북전쟁으로 USA로 통일되었지만 오늘날까지 공화당과 민주당의 뿌리 깊은 양극화의 배경이 되고 있다.

해방 후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의 남부와 북부에 상륙하고, 1948년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한 것과 비교되는 미국의 역사이다. 미국의 분열과 남북분단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교연구가 필요하다.

이런 비교연구를 바탕으로 미국의 분열극복을 외치는 미국여론, 그리고 미국의 보수진보 갈등을 극복해야하는 오바마 정부와 한반도 남북분단의 극복과 화해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오바마 2기에 악마의 방해를 극복하고 남북대화, 한미관계, 북미관계를 3원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대미외교전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1988 평화연구소 연구원
1995 민족회의 정책실장, 통일맞이 정책실장
1998 민화협 정책실장
2003 청와대 NSC 정책조정실 국장
2006 민주평통 전문위원
2009 존스합킨스대학 국제관계대학원 방문연구원
2012 통일맞이 정책실장, 한반도 평화포럼 정책연구팀장


(수정, 17: 53)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