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현 전 <민족21> 대표 /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통일뉴스는 창간 25주년을 기념해 『통일뉴스 백서(2000-2025) - 민족통일 정론의 한길 25년』을 발간했다. 백서 내용 중에서 주요사안을 집중 조명한 [돋보기(1~7)]를 순서대로 싣는다. /편집자 주
[돋보기①] 통일운동의 역사를 찾아_이계환
[돋보기②] 통일뉴스 25년의 정신적 지주 김남식과 정수일_이계환
[돋보기③] 역사적 미스테리, KAL858과 천안함 사건_김치관
[돋보기④] 통일뉴스와 함께 설정한 의제들_이시우
[돋보기⑤] 국가보안법을 이겨낸 시간_이정희
[돋보기⑥] 남북 기사교류와 방북취재의 언론사적 의미_정창현
[돋보기⑦] 남북 언론교류사 다시 쓴 <오익제 인터뷰>_김치관
2007년 7월 4일 <통일뉴스>는 북측 인터넷신문 <우리 민족끼리>가 제공한 ‘평양의 봄’을 주제로 한 12장의 사진을 게재했다. 분단이후 최초로 남북 인터넷언론 사이의 정기적 기사교류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5개월 뒤인 12월 5일 <통일뉴스>는 조선륙일오편사의 초청으로 단독 방북 취재길에 올랐다. 다음 날 평양시 서성구역 연못동에 위치한 3대혁명전시관을 취재한 내용이 “<최초공개> 3대혁명전시관 인공지구위성관”이란 제목으로, “평양=김치관/김주영 기자” 이름으로 보도됐다. 2000년 창간 이후 <통일뉴스>는 수많은 남북회담이나 민간교류행사 취재를 위해 평양, 개성, 금강산 등 북측지역을 방문 취재했지만 ‘단독 방북취재’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통일뉴스>는 이후 2008년 7월과 12월 두 차례 더 방북취재를 다녀왔다.
남북 언론매체 간 정기적인 기사교류와 단독 방북취재는 분단 상황 속에서 남측 언론 모두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다. <통일뉴스>도 창간 초기부터 단독 방북취재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그래도 낙담하지 않고 꾸준히 분단의 문을 두드렸고 마침내 결실의 순간이 왔다.
창간 6년만인 2006년 11월 16~17일 통일뉴스 이계환 대표와 김치관 편집국장은 조선륙일오편집사 박정훈 사장, 한철운 국장과 금강산에서 만나 실무협의를 가졌고, 다음 해 2월 14일 조선륙일오편집사와 기사·사진·동영상 등 인터넷 콘텐츠 교류 등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할 수 있었다.
합의서에는 통일뉴스와 조선륙일오편집사 간에 △기사·사진·동영상 교류 △상호지역 초청 취재 및 공동사업 △6·15남측위 언론본부와 6·15북측위 언론분과위 교류·협력을 지지 △전자우편을 통한 실무추진 등의 합의사항이 담겼다. 이 합의에 따라 북측에서 기사와 사진을 보내오고, 통일뉴스의 단독 취재에 대한 북측의 초청이 이뤄진 것이다.
북측은 합의 이후 2010년 말까지 3년 넘게 입학식 등 각종행사, 인민생활, 명절 풍경 등 다양한 주제의 기사와 사진, 영상을 <통일뉴스>측에 보내왔다.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정기적으로 기사교류가 이뤄진 사례는 처음일 것이다.
<통일뉴스>가 튼 물꼬는 2008년 6월 정부 수립 이후 60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언론단체 간 기사교류로 이어졌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언론본부가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언론분과위원회로부터 논평 형식의 기사 2건을 전자우편을 통해서 전달받은 것이다. 이 무렵 <한겨레신문>과 북측 <통일신보> 역시 2008년 북경올림픽에 관한 기사 등 기사교류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 분단 언론의 금기 깨기
언론사 측면에서 보면 <통일뉴스>가 정기적인 기사교류와 단독 방북취재를 성사시키기까지 많은 선배 언론인과 언론사들의 노력과 경험이 쌓여 있었다. 38선과 휴전선을 넘어 취재하려는 시도는 분단 직후부터 있었다.
1945년 12월 29일 <서울신문>의 서병곤 기자 등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당시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만나 인터뷰를 했다(1946년 1월 10일자 게재). 분단 후 첫 단독 방북취재였다. 2년 4개월이 지난 1948년 4월에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를 취재하기 위해 여러 언론사들의 기자들이 김구, 김규식 등의 정계요인과 동행하거나 개별적으로 38선을 넘었다.
그러나 3년간의 전쟁을 거친 뒤 고착된 정전체제는 좀처럼 휴전선 너머의 취재를 허락하지 않았다. 무려 20년이 지난 뒤인 1973년 3월 14일 평양에서 남북조절위원회 제2차 회의가 열렸고, 남쪽 언론사들의 공동취재단이 동행했다. 한 해 전 발표된 7.4남북공동성명의 결실이었다. 그 뒤로 1985년 ‘남북한 고향 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때 남측 공동취재단이 다시 평양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남북 간 대화나 일회성 행사에 동행한 공동취재진의 취재영역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1994년 9월 6일 <한겨레신문>은 또 하나의 금기를 넘었다. 정연주 워싱턴 특파원이 단독 취재를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관광 목적이 아니라 평양에서 열리는 북미 전문가 회의와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현지 실상을 취재하기 위한 합법적인 방북이었다. 그러나 남측 일부 언론이 “북한이 언론인의 선별 입국을 통해 대남 선전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고 보도하자 북측은 정연주 기자의 취재활동을 중단시켰고, 결국 방북 나흘 만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전쟁 이후 첫 단독 방북취재는 이렇게 무산됐지만 다른 남측 언론사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다.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든 것은 <중앙일보>였다.
<중앙일보>는 북측과 2년여 간의 끈질긴 협상 끝에 1997년 9월부터 1998년 7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북한문화유산조사단’이라는 형식으로 분단 후 처음으로 북한 전역을 답사(취재)할 수 있었다. 이것은 1998년 8월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의 방북으로 이어졌다. 분단 후 첫 언론사 대표의 단독 방북이었다. <중앙일보>에 이어 <동아일보>도 방북취재와 김병관 회장의 방북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2년 뒤인 2000년 8월, 남한 언론사 사장 46명이 북측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당시 남측 언론사 사장단은 북한과 △통일과 민족단합에 도움이 되는 언론활동 전개 △비방 중상 중지 △언론분야 교류협력 추진 △남북 언론접촉 창구마련 △북한 언론기관 대표의 서울방문 등을 합의했다. 2000년 6월 첫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2000년 6.15합의 이후 남북 언론과 언론인 교류는 봇물이 터졌다. 제3국을 끼고 간접적인 남북교류를 모색했던 남측의 방송사들은 ‘보도분야’와 ‘특집 프로그램’에서 방북취재를 토대로 다양한 ‘평양 발’ 취재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남북 공동제작 드라마와 영상물, 광고도 나왔다. 방송위원회(방송통신위원회의 전신) 산하 남북방송교류추진위원회도 2003년과 2005년 남북 방송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누는 행사를 개최했다.
남북 언론인들의 만남도 잦아졌다. 6·15남측위원회 언론본부 주최로 2006년 11월 29일 금강산에서 첫 남북 언론인 통일토론회가 열렸고, 남북 언론인 대표자 회의도 2007년 11월에 평양에서 열렸다.
<중앙일보>와 <한겨레신문>은 평양에서 열리는 ‘평양국제상품전람회’에 남측참관단을 파견하는 방식으로 방북취재를 이어갔다. 특히 <중앙일보>는 2007년 5월 남측 언론에 금기영역이었던 금수산기념궁전을 남북 당국의 공식허가를 받아 취재, 보도함으로써 취재영역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다. 다만 남북관계의 부침에 따라 지속성과 정기성을 확보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남북 언론교류의 숙제로 등장한 지속성과 정기성 확보에 하나의 가능성을 연 것이 2001년 4월에 창간한 월간지 <민족21>이었다. <민족21>은 창간 이전에 이미 북측과 협의를 거쳐 북측 잡지 <민족대단결>과 기사교류에 합의해 창간호에 북측에서 보내온 기사를 게재했고, 이후 여러 차례 단독 방북취재를 성사시켰다. <민족21>은 안정적인 기사교류와 정기적인 방북취재를 위해 2006년 4월 북측의 주간신문 <통일신보사>와 기사교류 합의서를 체결하고 매년 1-2차례 방북취재를 진행했다. 이를 기반으로 북측 언론을 관장하는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의 남북언론교류 승인까지 확보하는 단계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6.15합의 이후 10년간 활발하게, 한 단계 도약을 모색하던 남북 언론교류는 2010년 이명박 정부의 5·24 대북 제재조치(남북 교역 중단·방북 불허·대북 신규 투자 금지·대북 지원 보류 등)로 사실상 중단됐고, 2018년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으로 반짝 활기를 되찾았다가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코로나사태로 인한 북측의 국경봉쇄, 2023년 말 북측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완전히 끊어졌다.
◎ 더 높은 장벽 ‘평양지국’을 꿈꾸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과 2000년 남북 첫 정상회담이후 남측 언론사들은 ‘평양지국’이라는 부푼 꿈을 꾸기 시작했다. 독일의 사례처럼 분단국가 언론 사명 중 하나가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고 그럴려면 지사나 지국 설치를 시도하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남측 언론의 평양지국 개설은 존재 자체로 상호 이해와 평화 체제에 기여할 수 있다. 빈번한 북한에 대한 오보나 추측성 기사를 줄일 수 있고, 상시적 교류 거점으로 한반도 전쟁 위험에서 비롯한 공포와 위협을 축소시킬 수도 있다.
현재 평양지국을 운용하고 있는 언론사는 일본의 <조선신보>, 중국의 <신화통신>과 <인민일보>, 러시아의 <이타르타스통신>, 일본의 <교도통신> 미국의 <AP통신>과 프랑스의 <AFP통신> 등이다. 그중 <조선신보>와 중국과 러시아 언론사가 상주 특파원을 두고 있다.
그동안 남측 언론사에서는 KBS와 <연합뉴스>가 평양지국 설치에 가장 적극적인 의사를 표시해왔다. <연합뉴스>는 평양지국 개설을 위해 2007년 공식제안서를 북측 조선중앙통신사와 통일전선부에 보내기도 했다. 2018년에는 JTBC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해 남북언론교류와 평양지국 개설문제를 논의해 다른 언론사를 긴장시키기도 했으나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남측 언론의 평양지국 개설을 위해서는 장기간의 상호 신뢰 확보와 북측 교섭창구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 지금까지의 교류경험을 성찰해 보면 언론인 교류→방북취재→기사교류→북측 교섭기관 변경(통일전선부→선전선동부)→지국 설치로 이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이미 정기적 기사교류를 성사시킨 경험이 있는 <통일뉴스>의 미래 목표는 평양지국 개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통일뉴스>는 창간 후 25년 간 남북대화와 교류 보도에서 ‘정론’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통일뉴스>가 2007년 2월 북측과 기사·사진·동영상 등 인터넷 컨텐츠 교류 등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할 수 있었던 것은 상호 신뢰가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통일뉴스>가 이러한 신뢰와 경험을 기반으로 다시 원점에서 제3국을 통한 간접 방식의 기사, 사진 컨텐츠 교류통로를 복원한 후 이를 바탕으로 정기적 기사교류와 방북취재를 복원하고, 장기적으로 평양지국 개설을 모색하는 단계로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