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부터 5박6일간 한국을 방문하는 재일 조선인총연합회(총련) 동포들 가운데는 거의 70년만에 고국땅을 밟는 사람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이는 지난 30년대 집중됐던 일제의 강제연행으로 시작된 조선적(朝鮮籍) 동포 1세대의 이산의 고통은 60여년 세월을 훌쩍 넘어섰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최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번 `1차 총련 동포 고향방문단`에 포함된 정임진(88) 총련 홋카이도(北海道) 소라치 분회 고문은 30년대초 19살때 일제에 의해 홋카이도로 강제 연행됐다. 정화흠(77) 문예중앙회 고문(시인)도 지난 63년 동안 고향 소식을 듣지 못했고 최창우 (84) 효고(兵庫)현 교육회 전 고문 역시 이번 방문이 62년만의 귀향이라고 조선신보는 전했다.
남호황(75) 지바(千葉)현 전 상공회회장은 일본에 공부하려 왔다 58년간 고향에 가지 못했다.
강제연행이었건 자의에 의한 도일(渡日)이었건 이들은 조국의 해방과 분단으로 `조선`이 없어진 뒤에도 `조선`국적을 고집하며 분단 조국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날을 고대하며 살아왔다.
생애의 거의 절반을 타향에서 고통스럽게 살았고 가족들이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불이익을 받을 것이 두려워 일절 연락을 끊어야 했지만 이들의 마음 한 가운데는 분단을 극복하기위해 노력한 자긍심이 있다.
이번 1차 방문단에 포함된 사람들 모두 방문 기간에 부모님 묘소를 찾아 불효를 고백하려하면서도 `부모님들도 이해하실 것`이라며 자위하는 것도 나름의 자부심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고향을 떠난후 처음 방문길에 오르는 남호황씨는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다리다 96살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할 아들로서 불효됨을 아뢸 길이 없지만 어머니는 왜 아들이 그동안 오지 못했는지를 짐작하실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 씨는 그동안 한국 민단측의 고향방문단 사업을 통해 고향방문을 하지 않은데 대해 ``모국방문단`으로 간다는 것은 미제 강점하에 있는 당시 남조선 정권을 응원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고향에는 `형님` `형님`하며 따르던 어린 동생들이 있으나 63년동안 전화는 물론 편지도 보내지 못했다`며 `그것은 동생들이 `빨갱이가족`이라고 고생할까봐서였다`고 말한 것으로 조선신보는 전했다.
방문단원인 최창우씨도 `62년 동안이나 헤어져 지냈기 때문에 고향에 있는 혈육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영 알 수가 없다`며 `그러나 부모님의 산소만큼은 꼭 찾아서 불효자식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노은(72) 가와사키(川崎) 고려장수회 회장도 ``남측 고향땅`에 당당하게 가겠다고 오늘까지 참아 온 보람이 있다`며 `41년전에 세상 떠난 할아버지가 흩어진가족이 하나로 될 때까지 묘를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셨는데 그것을 이번 고향방문에서 해결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한결같이 이번 방문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간의 역사적인 6.15공동선언 덕택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앞으로 지속적으로 고향방문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총련동포 고향방문 > 4. 총련과 민단
지난 75년 민단이 `조총련계 모국방문` 사업을 통해 총련계 인사들의 한국 국적 전환을 추진하면서 총련과 민단은 경쟁관계를 넘어 사실상 적대관계를 유지해왔다.
특히 지난 95년부터 `조선적`(朝鮮籍)을 버리고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이 매년 5천명에 달하면서 일본내 교포사회에서는 총련 붕괴설까지 나돌았다.
이는 남한 내에서 북한붕괴론 또는 북한 흡수통일론이 공공연히 회자되던 당시 남북관계의 축소판이었다.
두 단체의 적대 관계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6.15공동선언이 발표되고서야 서서히 풀어졌다.
공동선언이 발표되던날 김재숙(金宰淑) 민단 단장은 한덕수 조총련 의장 앞으로 `제의서`를 보내 `남북공동선언에 입각, 조국의 평화통일과 동포사회의 통일을 위해 조건없는 대화와 교류를 해 나갈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총련이 민단의 제의에 적극 화답하기 시작한 것은 7월말 서울에서 열린 1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총련동포 고향방문`이 공식 합의되면서 부터이다.
서만술(徐萬述) 총련 부의장은 장관급회담 합의문 발표 다음날인 8월1일 환영의 뜻과 함께 `해방 55주년인 8.15에 고향방문단 1진을 보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총련은 이어 역사적인 8.15 남북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의 충격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한 지난달 24일 남승우(南昇祐) 부의장, 량수정 국제통일국장, 류상식 국제통일국 부국장 등 3명을 민단 본부에 보내 남북 공동선언 실행을 위한 공동모임 조직 등을 제안했다.
총련측 제의는 △남북공동선언 실행을 위한 문화촵체육행사 등 공동 사업 조직 △재일동포들의 생활안정과 민족적 권리 옹호를 위한 상부상조사업 추진 △민족성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사업 논의 △양단체의 화합과 교류를 위해 총련의 부의장과 민단 부단장을 책임자로 하는 협의기관 설치 등 4개였다.
총련 간부들의 민단 본부 방문은 NHK방송이 이를 보도할 만큼 일본내에서도 뉴스거리였으며 이 방송은 `총련과 민단은 격렬한 남북대립으로 인해 오랫동안 서로 대립해 왔으나 지난 6월 열린 남북정상회담 직후 민단은 총련에 대해 대화를 촉구해 왔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민단의 구문호(具文浩)부단장 등 간부 4명은 지난 11일 도쿄도(東京都) 내 총련 본부를 방문, 조총련측이 제의한 `중앙본부간 협의기구 설치`에 대해 찬성 의사를 문서로서 전달하고 향후 양단체의 교류와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민단측은 또 ▲동포의 단결을 위한 교류와 화합 관련사업 ▲남북의 평화정착과 교류, 통일에 보탬이 되는 사업 ▲재일동포 공통의 권익에 관한 사업 ▲동포간의 경제, 사회, 교육, 문화사업 등을 제의했고 총련의 이에 대해 `전향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단 간부들의 총련 본부 방문은 91년 지바(千葉) 세계탁구선수권대회때 공동응원을 협의하기 위해 방문한 이후 9년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두 단체간 대화는 중앙본부 외에 지역 본부 차원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두 조직의 이바라기(茨城)현 수뇌부가 8월말 회동, 협의를 가진데 이어 9월 10일에는 시가(滋賀)현 본부의 양측 간부들이 청년조직의 문화사업에 동석하는 등 교류가 활발하다.
양측은 `총련 동포 고향 방문` 주도권을 놓고 일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고 63명의 고향방문이 이뤄지는 시점에도 이렇다할 합의는 도출하지 못하고 있지만 두 단체 모두 화해와 단합을 촉구하는 본국 정부의 `압력`을 계속 뿌리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연합2000/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