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활웅(자유기고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작년의 남북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으로 큰 성공을 거두는 듯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햇볕정책`은 고장나서 발동이 안 걸리는 차량처럼 기능이 마비되어 버렸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답방이나 당국간 대화재개를 바라는 남측의 거듭된 재촉에도 불구하고 북측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그래도 별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 남측의 답답한 처지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햇볕정책`이 당초부터 그릇된 기본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햇볕정책`은 반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한반도의 군사대치상태를 그대로 둔 채 남북간의 화해, 협력과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김 대통령은 당초에 `햇볕정책`을 천명하면서도 미국과의 군사동맹관계는 그대로 유지한다고 못박았다. 또 평양에서 돌아 온 후에는 수차에 걸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주한미군의 필요성에 대해서 동의하였다고 언명하였다. 그리고 최신무기도입과 군비확충 및 미군과의 합동 군사훈련을 계속하여 왔다.

이런 상태에서 추진하는 `햇볕정책`은 6.25 전쟁이란 우리민족에게 엄청난 피해와 비극을 안긴 군사적 사건이 아직 공식적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엄연한 사실을 전혀 외면한 채, 화해와 협력과 평화를 위한 정치적 해결을 도모해 보고자 하는 것으로서, 처음부터 본말을 전도한 무리한 시도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햇볕정책`은 또한 이러한 군사교착상태와 표리상응관계에 있는 한국의 정치, 외교 및 군사적 대미종속관계를 그대로 둔 채, 북한과의 정치, 군사적 관계를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하겠다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김 대통령은 평양 정상회담 때 한.미.일 3국공조체제와 자주적 자세의 양립가능성을 주장하면서, 3국 공조체제를 통하여 미국과 일본의 힘을 우리 민족에게 유리하게 자주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런 알쏭달쏭한 설명에 대해 김 위원장이 과연 어느 정도 수긍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자주문제에 관한 김 대통령의 설명이 한낱 궤변에 불과했다는 것은 지난 3월초에 있었던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날 백악관을 찾아간 김 대통령은 몇 십년 동안 남북문제를 연구하여 온 노련한 정치가이며 그의 `햇볕정책`은 전세계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또 그는 세계의 여러 정치지도자 중 어느 누구보다도 북의 김 위원장을 직접 만나서 가장 오랜 시간 대담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김 위원장과 회담해 보니 그는 합리적 사고를 하는 인물이었다고 평하였다.

그런데 새까만 후배 격인 부시 대통령은 김 대통령의 구상과 설명을 경청하기는커녕 오히려 김정일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며 미국은 북한과 대화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국제문제에 무식하며 또 취임한지도 얼마 안 되는 미국 대통령의 이 한마디로, 그 이후의 북미관계는 물론 남북관계마저도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밝힌 6.15 선언의 제1항은 여지없이 박살나고 만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햇볕정책`이 참으로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려면 남북문제의 기본성격부터 제대로 파악하고 그 토대 위에서 그 내용을 근본부터 뜯어 고쳐야 할 것이다.

첫째, 남북문제는 남은 선이요 북은 악이라는 개념이나 남은 우월하고 북은 열등하다는 전제에서 접근해서는 풀리지 않는다. 지난 반세기동안의 수치스러운 분단과 대결의 역사는 50여년전 2차대전 종전 후 세계질서가 재편될 때, 강대국들 사이의 갈등구조 속에서 우리 민족의 남과 북이 모두 슬기로운 선택을 하지 못한 탓으로 생긴 결과이다. 따라서 남과 북은 모두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외세의 굴레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숙연한 자세에서 협상에 임해야 한다. 어려운 처지를 동정해서 좀 도와 줄 터이니 그만 굽히고 들어오라는 식의 자세로는 성공을 기할 수 없다.

둘째, 한반도의 현 상황은 "군사적 정체상태"이며, 이 상태를 해체하는 것이 곧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고 나가서는 통일을 이루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한반도의 군사적 정체상태를 해체하는 제 1보는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일이며 나아가서는 불가침과 군축의 다짐을 서로 주고받는 일이다. 이 일은 남, 북, 미 3자간의 대등한 정치협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다.

셋째, 그러한 정치협상의 당사자는 자주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이 대등한 협상상대로 대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한의 대미종속관계의 청산 없이는 남북문제의 해결은 기할 수 없다. 최근 서울정부에서는 북한의 재래식무기 감축문제의 교섭을 한국이 맡아 하겠다고 나섰다 한다. 그런데 북한이 막강한 재래식 병력을 휴전선 가까이 집중적으로 배치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한미군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즉 주한미군을 그대로 둔 채, 그리고 주한미군에게 국군의 통수권을 맡겨둔 채, 북의 재래식 무력의 감축을 실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의 당국자들은 이 문제를 북미간에 다루면 주한미군문제와 연계될 우려가 있으니 이를 피하기 위해서 한국 측이 교섭을 맡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북쪽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문제를 주한미군의 상전인 미국정부가 아니라 그 상전의 들러리 격인 서울정부를 상대로 협상할 까닭이 있겠는가? 참으로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는 비현실적 착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언제 어떤 계기에 어떤 목적으로 우리 땅에 들어 왔든, 미국은 우리가 화해하고 통일하고자 하는 상대인 북한의 `원쑤`이다. 그리고 현재의 미국은 아시아에서의 패권의 확립과 유지를 위해서 한반도 분단의 영구화를 바라고 또 꾀하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관리들이 희망하고 또 지지한다는 `한반도의 평화` 혹은 `남북대화`란 현 분단상태를 정상적인 상태로 수용하고 인정하기를 바란다는 뜻이지 분단상태의 종결과 통일을 바라고 지지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런 나라의 군대를 무기한으로 붙들어 두고 그 지휘를 받으며 그 힘에 매달리면서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통일을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햇볕정책`의 논리가 무엇인가? 바람을 멈추고 햇볕을 쪼이면 외투 입었든 사람이 외투를 벗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북한이 입고 있는 외투는 무엇인가? 대미, 대남 적대정책과 군사제일주의정책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 표현인 대량살상무기 개발계획과 재래식 무기의 전진배치이다. 북한은 왜 이런 외투를 입고 있는가?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그 바람의 실체는 무엇인가? 남한의 반공정책과 60만 대군의 존재 및 수구세력들에 의한 북한 흡수통일의 욕망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이 참으로 두려워하는 세찬 바람은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며 미국이 견지하고 있는 정치, 경제, 군사, 외교의 전반에 걸친 대북 압박정책이다. 그러니 워싱턴에서 불어오는 광풍은 멈추지 않은 채 서울에서 약간의 햇볕을 쪼여준다 해서 북한이 외투를 벗어 던질 까닭이 있겠는가?

김 대통령의 임기는 이제 1년 반밖에 남지 않았다. 서울의 현 정세로 보아 현 집권당의 정권재창출 가능성은 매우 불투명하다. 또 설사 재집권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현 집권세력 내에 남북문제 해결의 중임을 이어받을 만한 인물이 있는 지도 의문이다. 만약 지금의 야당이 다음 정권을 잡으면 대미종속관계는 더욱 굳어지고 남북문제는 다시 극한대결의 원점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즉 `햇볕정책`의 운명은 결국 김대중 대통령이 과연 앞으로 남은 임기동안에 대북정책의 기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서 대미 종속관계의 고리를 끊고, 자주적인 입장에 서서 북한의 지도자와 만나 한반도의 군사정체상황을 타파하고 평화와 안전 및 통일로 가는 길을 여는 정치적 타결을 지을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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