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서도 감귤이 있을까? 생육환경에 대한 제약으로 남녘에서도 제주도에서나 나는 감귤이 북녘에서도 재배가 된다고는 합니다.

연합뉴스 2002년 5월 16일자는 새터민들의 인터뷰를 인용해 북녘에서도 1990년대 초부터 감귤재배연구가 시작됐다고 전합니다.

보도에 따르면 황해남도 농업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품종을 개량해 기온이 비교적 따뜻한 황해남도 옹진군을 비롯 연안, 배천, 은률군 지역에 재배를 시작했습니다.

감귤재배 연구에 앞장서고 있는 옹진식물원은 1990년대 중반까지 10만여 그루의 묘목을 길러 개성시를 비롯한 여러 곳에 보급한 결과 1990년대 말에는 평안남도는 물론 북부 고산지대인 자강도에서까지 감귤재배에 성공했습니다.

또 북녘의 언론을 인용 평안남도 숙천군의 한 농장에서는 ‘전호식(戰壕式) 재배방법’(구덩이를 길게 파고 그 안에 나무를 심어 키우는 방법)을 통해 감귤나무 재배에 성공했다고 전합니다.

압록강 인접지역인 자강도 초산군의 한 농장에서도 1990년대 초 시험재배에 들어가 1997년에 첫 수확을 한 데 이어 1990년대 말에는 150여 그루로 번식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녘에서는 기온이 낮아 재배가 어렵고 수입에 한계가 있어 감귤이 무척이나 귀한 과일입니다. 보도는 1990년대 이후 북녘에서 감귤이 어느 정도 생산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전합니다.

감귤이 귀하다보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설날이나 자신의 생일 등에 모범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선물을 하기도 한답니다.

평양사범대 교수 출신으로 서울로 탈북했고 이제는 미국의 대학들에서 북한학을 강의하고 있는 김현식 교수는 ‘예일대학에서 보내온 평양 교수의 편지-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이라는 책에서 ‘수령에게 선물 받은 사랑의 귤’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김일성 주석이 해마다 과학자, 문화 예술인들 중에서 공로가 큰 사람들을 뽑아 환갑이나 진갑을 맞으면 환갑상과 진갑상을 주며 공로자들에게 뽑힌 사람들에게 설날에 귤 한 상자씩을 선물로 주는데 그 귀한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설을 이틀 앞둔 날, 대학 비서실에서 ‘사랑의 귤 선물’을 받게 되며 다음날 평양시당 회의실에서 선물전달 모임이 있다고 연락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이발도 하고 손톱도 깎고 물 묻혀 다린 양복에 아끼던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니 학장이 학교에 한 대밖에 없는 승용차를 특별히 내줬고, 저자는 학장의 승용차를 타고 평양시당으로 갔습니다.

시당에 모인 선물을 받는 사람들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렀고 각자 앞으로도 수령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내용의 결의토론을 벌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당시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수 십 년이 지나도록 그날의 가슴떨림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라고 합니다.

선물전달식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귤 선물은 자동차에 실려 있었고 대학으로 돌아와 대학의 당비서와 부비서들, 당위원들, 학부장, 강좌장들과 함께 모여 하나씩 까먹으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대학 내 모임이 끝난 후에는 연구소사람들이 모여 귤을 반쪽씩 먹으며 감격을 했고 집으로 돌아가니 시집간 딸과 사위까지 모여 어른은 반쪽씩, 아이들은 한 개씩을 맛봤고 그리고도 6개가 남아 지방에 사는 맏아들네 집에 네 개를 보내고 인민반장에게 한 개, 옆집에 한 개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북녘에서 감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이며 또 그를 통해 얼마나 수령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자료를 찾던 중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발행하는 월간잡지 <조국> 1984년 3월호에는 ‘100알의 귤’이라는 제목으로 감귤과 관련한 재미있는 기사가 실려 소개해 봅니다.

리비아의 한 귤농장주인은 오래전부터 좌골신경통에 걸려 신고하고 있었다.

그는 국내에 이름있다는 의사들도 다 찾아보고 지어 외국인 의료일군들한테까지 병을 보이였지만 병은 그 식이 장식이였다.

종교적신념이 확고하였던 그는 하느님에게 지극한 정성을 바치면 자기 병을 몰라주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기도드리는것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허지만 이것도 저것도 다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병고에 시달리다가 저세상으로 실려가야 하는가, 내가 벌써 가면 이 큰 귤농장을 저 어린 자식들이 제대로 운영해내겠는가.)

바로 이런 때였다. 리비아엔 위대한 수령 김일성원수님의 사랑의 해빛을 안은 주체조선의 의료일군들이 숱한 사람들을 병마에서 건져준다는 기쁜 소식이 퍼졌다.

귤농장주인은 백사를 불구하고 조선의 의사들을 찾아갔다.

의사들은 그의 병을 진찰하고나서 인차 치료에 달라붙었다. 환자에 대한 정성도 지극하였다. 꼭 제 혈육을 대해주는것만 같았다.

치료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장기간 병어 시달리고 치료신념을 잃었던 그는 자기 병이 완치된 것이 막 신기하고 놀라왔다.(리비아의 의사들도, 외국의 의료일군들도, 지어는 전지전능하다는 하느님도 고치지 못했던 병을 건뜩 날아나게 고쳐준 조선의 의사들, 아니 그보다 이들을 보내주신 경애하는 수령님의 하늘같은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오리까.)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의논에 의논을 거듭하던 귤농장주인은 자기가 경영하는 귤밭에서 딴 제일 잘 익고 티 한점 없는 일매지게 꼭같은 귤 100알을 골라 정히 포장해가지고 우리 의료 일군들을 찾아왔다.

우리 의료일군들의 손을 잡은 그는 병이 완치되여 병원문을 나서던 때처럼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고쳐주지 못했던 제 병을 경애하는 김일성주석깨세 고쳐주셨습니다. 김일성주석 같으신분은 세계 만백성을 위해 100만년을 만수무강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제 변변치 못합니다만 100알의 귤을 그분께 올라자고 합니다.》

그리고는 손수 선물함을 우리 일군들에게 전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그들의 손을 굳게잡고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은 저의 병을 고쳐주지 못했지만 경애하는 주석께서는 저의 병을 고쳐주시였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하느님보다 주석님을 더 믿습니다. 저뿐아니라 아들, 손자들도 하느님이 아니라 위대한 김일성주석을 믿고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이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잡지에 글이 실리던 시기가 북녘과 리비아가 수교를 맺은 후 좋은 관계를 갖고 있을 때라는 것에 미루어 볼 때 그리 허황된 글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북녘은 1973년 발발한 4차 중동전쟁을 전후해 리비아와 급속히 가까워져 1974년 리비아와 국교를 수립했습니다.

특히 북녘은 1980년대와 1990년대까지 만해도 리비아에 수많은 건설 노동자들과 의료 인력을 파견해 수백 명의 북의 노동자들이 리비아 곳곳에서 집단생활을 하고 있었고, 수도 트리폴리 시내에 위치한 병원에 가면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진 가운데 북녘의 말을 쓰는 사람을 흔히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난 2003년 리비아가 핵 포기를 선언하고 서방과 외교를 강화하자 북은 리비아의 행동은 비겁한 것이라고 비난하며 바로 다음해인 2004년부터 리비아 내 인력을 대부분 철수시켰다고 외교 소식통은 전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북이 리비아에 근로자를 파견했을 때 리비아의 감귤이 북녘으로 들어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어쨌건, 우리에게 흔한 감귤이 북녘에서는 이렇게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감귤을 먹으면서도 통일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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