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신인영, 우용각, 최하종 (비전향 장기수)
사회 : 이계환 (통일뉴스 편집국장)
정리 : 김치관 (통일뉴스 기획부장)
사진 : 조성현 (통일뉴스 사진부 기자)
일시 : 2000. 8. 24. 11∼14시


8월 24일 서대문 적십자병원에는 북으로의 송환을 앞두고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비전향 장기수 분들이 아침부터 모여 계셨다. 서로 반갑게 악수하며 안부를 묻기도 하고, 검진 절차에 따라 비좁은 병원을 분주히 오가기도 했다. 비전향 장기수 분들의 송환이 임박함에 따라 언론의 관심도 높아져 언론사의 기자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미리 약속한 대로 검진을 마친 우용각, 신인영, 최하종 선생님을 모시고 기자들의 관심을 뒤로하고 근처의 조용한 한식집을 찾았다.
인터넷과 가까이 접할 기회가 없으셨던 분들이기에 노트북을 통해 통일뉴스와 조선중앙통신 사이트를 보여드리며, 간단한 설명도 드렸다.
송환 이후에는 사실상 만나 뵙고 싶어도 만나기 어려운 분들을 함께 모시고 대담을 나누는 아쉽지만 소중한 자리였다.

 

 

 
8월 24일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마친 우용각, 신인영, 최하종 선생님을 모시고 근처의 조용한 한식집에서 대담을 진행했다.

 

 


비전향 장기수 실태는 법무부가 공개해야 할 사안

■이 : 선생님들을 이렇게 뵙게 되어 기쁩니다. 더구나 송환을 앞두고 모두 바쁘신데 이렇게 모시게 되어 감사합니다. 북으로의 송환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어서 더욱 그 의미가 깊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 함께 가지 못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신 : 명백히 우리와 같이 생활한 사람 외에는 좀 막연한 경우가 있어요. 자기는 비전향으로 나왔다고 하는데 사회안전법으로 청주감호소에 넣었는데 어떻게 해서 빠졌겠느냐. 그런 것은 잘 모릅니다. 사회안전법에 의해 청주감호소에 있다가 같이 나온 분들의 경우는 확실한 사람입니다.
이번에 비전향 장기수 중 자격은 되는데 올라가지 않으신 분들도 계신데 임방규, 권낙기, 양희철, 안학섭, 안희숙, 김영승, 박봉현, 허영철 선생은 우리가 분명히 아는 사람들입니다.

■최 : 60년대에 전향 안하고 나간 사람들도 있는데 그 숫자가 많습니다. 이후 사회안전법이 생겨서 보다 위험한 사람들을 위주로 잡아넣고 걸릴 뻔하다가 빠진 사람들도 있고 검사가 아예 잡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신 : 검사에게 전향서 쓰고 나온 사람도 있고, 그냥 나온 사람도 있고 하니 이것은 결국 법무부가 공개해야 할 사안입니다. 전향한 사람도 스스로 한 경우는 거의 없고, 스스로 전향한 경우도 가정, 건강상의 이유이고, 저쪽에 협력해 우리에게 해로움을 준 사람은 거의 없어요. 나약성이나 가족, 건강상 이유로 전향해 가책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지요. 그분들이 일부는 결혼도 안하고, 일부는 결혼하고 일부는 북으로 가야겠다는 사람도 많고...

■우 : 전담반이 생겨서 56년경부터 전향문제가 나왔죠. 처음으로 대구교도소에서 시작했고 전주교도소에서도 이어졌죠. 일제시대 간수부장하던 자들이 교도소장들이죠. 그전에도 사상동향서를 2달에 한번씩 써야했는데, 교도소에 따라 달랐지만 시끄러우니까 유야무야 되기도했죠. 시기별로 내가 교도소 처음 들어왔을 때는 산에서 온 사람들 거의 무기형이라. 이 사람들이 4·19 나니까 무기가 20년으로, 유기수는 전향하면 모두 나간다 그래서 많이 나갔죠. 무기수에서 20년으로 감형돼 70년대 초에 나갔죠. 박정희 정권때 점점 탄압이 심해져, 7·4남북공동성명 이후부터 전향공작반이 생겨서 강제적으로 물리적 강압으로 벼라별 수단을 다 동원했죠.

■신 : 전향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래 안할래, 그래서 생각해 본다면 전향자로 분류해서 성과를 부풀려 보고하고, 예전에는 심사위원들에게 입장을 밝히고 일반 재소자 앞에서 전향선언을 했어야 하나 73년 이후는 그런 것 없이 격리시켜서 전향했다고 발표해버리는 그런 것들이 많아요.

■우 : 일단 체포 경위부터 시작해서 검찰 취조과정까지 약점을 다 조사해서 전향을 강요하는데 써먹어요. 검찰이 조사과정에서 15년 정도로 감형해 주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한 것을 약점으로 이미 전향했다고 하면서 고문을 가하고.... 고문으로 전향을 강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비인간적인 일이지요.

■신 : 그렇게 강제로 전향한 분들이 강제적으로 전향 처리된 것을 항의하고 싸우지 못한 것은 사실이어서 양심의 가책을 갖고 살아온 것도 사실이죠.

■이 : 심지어 무기징역형을 다시 받은 분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우 : 전향 경력 취소를 위해 싸우다가 다시 추가형 받은 사람도 있지.

■신 : 예전에는 `김일성 장군 만세` 해서 가형 받아 전향이 취소된 사람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런 것도 없어졌어.

■신 : 다 강제에 의해 전향한 것이지. 추가 받아 안나오고 같이 있다 나온 사람들도 있고. 하지만 그 엄혹한 시절에 한 사람이라도 나가는 것은 참말로 가슴아파, 그런 점에서는 본인도 반성해야지.

■ 이 : 최선생님은 비전향 장기수 분들의 발자취를 기록하는 일을 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진행되었고 이후에는 어떻게 진행할 계획이신지요?

■최 : 계획대로 못하고 40명 가까이 취재를 했어요. 북에 올라가서는 당역사연구소에서 다 할 것이니 다른 계획은 없어요. 그동안 취재해 놓은 것은 녹음 풀고 하면 2년이 더 걸린대, 정리되면 사료집으로 출간 예정인데 돈이 많이 들어 돈을 마련하는게 병행되어야 해요.
전향 안한 사람을 기본으로 하고 지난 기간 산에서의 싸움, 감옥 안에서의 싸움으로 줄거리를 잡는데 산에서의 기록이 많이 나와있는데 고위 간부들이 있어야 전략 이런 것이 잡힐 수 있는데 부족하고, 전쟁 이전 감옥에 대한 기록은 없고, 51년 이후 역사자료로서 줄거리가 설 것 같아요.

■이 : 최근에 나온 비전향 장기수 일곱 분의 삶을 엮은 <0.75 평 지상에서 가장 작은 내 방 하나>를 보면 신선생님은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기신 것으로 아는데요.

■신 : 본거지인 지리산이나 태백산이 아니라 말단에서 싸워서 큰 줄기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전쟁시기 분계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고 한치라도 얻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했죠. 그런 와중에서 미국의 공습이 특히 심해서 정말 죽을 고비도 많았죠.

비전향 장기수 감옥생활 총 2884년, 평균 31년

■이 : 이번에 송환되시는 63분이 복역한 총기간이 2045년, 평균 32년 6개월이나 됩니다. 특히 우용각 선생님은 최장기수로 많이 보도되시지 않았습니까?

■최 : 이번에 송환되는 63명이 그렇다는 것이고, 감호소 출신 52명을 포함해 형집행정지 102명 중 그중에서 어딜 갔는지 모른 7∼8명을 빼고 92명 총 합계로 보니까 2884년, 평균 31년이 넘습니다.
27년을 감옥생활한 남아공의 만델라 보다 오래 산 사람만 해도 부지기수입니다.

■우 : 김선명 선생이 45년간 감옥살이를 해서 최장기수시죠. 그래서 인권단체들에서 김선생님 석방운동을 해서 나오시게 되었고, 그리고 나선 감옥에 남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41년을 살아 최장기수라고 해서 석방하라고 그랬죠.

■최 : 김선명 선생과 함께 안학섭, 한장호 선생은 44년에 법적 근거도 없는 국방경비법에 따라 판결 받았고, 김선생이 석방될 그 때 45, 43년 짜리가 함께 나와 금메달, 은메달 다 나왔어요.

■우 : 그래서 기자들 회견하면 거꾸로 내가 그 사실을 먼저 밝히곤 하죠.

송환이 아니라 소환

■이 : 이번에 북송되시는데, 사실 6·15남북공동선언의 직접적 결과이지 않습니까? 감회가 모두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최 : 대통령 취임 2주년에 이번에 나온 사람들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한 것을 그렇게 해석하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고위급 회담이 합의되고, 솔직히 이번에 우리가 가는 것이 어떻게든 해결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했으나 남북 최고위급 회담에서 직접 거론될 줄은 몰랐습니다. 위에서 우리 문제에 대해 극진한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가려는 지극한 마음이 감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은인입니다.

■우 : 송환이 아니라 `소환`이다 이렇게 봅니다. 만약에 우리가 주석님 생전 이야긴데 7·4성명이 되고 주석님이 한 말씀해야 우리가 간다 이런 마음이 있었고, 주석님 돌아가신 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전에 여러 번 통일 물꼬를 트기 위해 장기수를 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해와 명문화 될 줄 알았습니다. 전술적 문제도 있겠지만 통일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밖에서 일한 사람보다도 감옥에서 고생하고 70넘은 사람들을 부르니 이 문제에 이유가 없어요. 6·15선언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 안고 실현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신 : 국제법상으로도 당연한 것이지만 늦게나마 이렇게 한 것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의리 때문이죠. 조짐은 민주당 전 정책위원장 이재정씨의 발언이었고, 이는 물밑에서 상당히 진전된 것으로 알았으나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는 몰랐어요. 실무급 차원에서 논의될 줄 알았지 정상회담 의제로서 될 줄은 몰랐던 거죠.

죽을 각오, 어려울 각오를 단단히 하면 극복 돼

■이 : 선생님들을 떠올리면 그 혹독한 감옥에서 3,40년을 어떻게 버텨왔는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떠나시는 마당에 심중에 있는 말씀들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우용각(72세) 선생님
"통일판에 나갑니다. 나라의 자주성을 지켜야 하고, 젊을 때 해야지 누가 하겠소"

 


■우 : 대개 비슷할 텐데 내 경우 2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정치적 측면에서 말하면, 통일운동이 사회변혁운동과 맞물려 있고, 하다보면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는데 통일운동 연장선상에서 감옥생활은 정치사상적인 자기 단련이라고 할 수 있어요. 통일하겠다는 사람이 전향한다면 통일을 포기하는 것인데 이거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음은 도덕적 문제인데, 사람이 자기 세계관을 관철하느냐 못하느냐는 도덕성 문제입니다. 통일운동에 나설 때 처에게 말할 때 "통일판에 나갑니다. 나라의 자주성을 지켜야 하고, 젊을 때 해야지 누가 하겠소"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가정적으로 보게 되면 도의를 명백히 한 것이지요. 그리고 "통일전선 사업에 끝까지 헌신하겠습니다"라고 조직 앞에 맹세했어요. 그래서 내 운명을 걸고 어떤 탄압을 받아도 내 길을 잘못 걸었다는 것은 없었습니다. 곧바로 붙잡힌 것이 분할 뿐입니다.

그리고 감옥생활 하면서 보면 우리들은 폭력성이 없습니다. 모두가 부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들입니다. 전향공작으로 테러 받은 것 같은 것은 비중을 크게 두지 않았어요. 깡패들도 치고받고 하다 다치고 하는데... 좀 맞고 들어와 이가 많이 부러지고 그러면 그거 정치적 대적관계에서 외세에 의해 분단된 조건에서 그놈들이 무식해서 그런거지 별거냐 하고 말았어요. 일반사회인들이 그런 생각이 좀 없지만 준법서약서 그것도 그게 그거야. 주위에서 한사람 떨어져 가면 압력이 더 세져가니까 물리적으로 어렵고, 동지가 떨어져 가니까 그것이 어렵고, 운동은 동지를 얻는 것인데. 맞고 들어와서 아 이번 싸움 이겼군 하면 쉽지. 어려울 땐 선배 어른들이 투철하게 싸웠던 모습을 생각하곤 했어요.

■신 : 나는 개인적으로 가정교육이 중요한 것 아닌가 생각해요.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독립투사이셨고, 외할아버지는 사회주의자이셨지. 늘 타의에 의한 굴복 같은 것은 생각도 못했어요. 단순하게 그냥 내가 걸었던 길이 통일이고 외할아버지의 평등사회 그건데 하고 생각했죠.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는 인류가 피를 흘려 얻은 천부의 권리이고 인간에 대한 존엄성 아닙니까. 자신이 옳다고 하는 것을 타의에 의해 꺾일 수는 없지요.
많은 사람들이 50년 전후해 산으로 들어가 골짜기 골짜기마다 피를 흘렸고, 일부는 북으로 갔고 남쪽에서는 역사를 날조하는 상황에서 우리라도 살아서 등대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이런 심정으로 살았어요.

마지막으로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자손들이 변절자의 아들, 후손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확고했어요. 이런 복합적인 것이 작용했죠. 여기서도 확고하게 학생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하면서 실천하는데 북에서 이론적으로 공부도 하고 여기서도 살아본 내가 어찌 물러설 수 있겠습니까. 역사는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흘러왔다는 확고한 믿음이 옳은데 내가 오명을 써가며 변절하겠나요.

■최 :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지만 간략하게 이야기 해보면 첫째가 내가 신봉하는 철학적 정치적 이론이 사회발전의 법칙을 반영한 정당한 것이라는 확신, 그래서 적어도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반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상 어디까지나 옳다 이런 생각이에요. 희다고 생각한 것을 검다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론만이 아니라 내가 살았던 공화국 북반부의 현실은 사회진보의 방향에 알맞는 매우 적절한 현실이었어요. 배운 것과 눈으로 보고 겪은 것이 같으니 추호의 동요도 없었지요.

둘째는 최고지도자 수령님과 당이 저한테 주신 신임, 그런 신임과 오랫동안 고생한 많은 동지들에 대한 생각 때문이죠. 많은 사람이 교수대에서 최후를 마쳤습니다. 의리상, 양심상 등을 돌릴 수 없어요. 이런 두 가지가 주요한 생각의 기초지요.

그리고 지키는 방법이요. 초기에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반공법도 형법총론도 읽어봤는데 사형을 피할 길이 없어요. 그럴 방법이 없어. 어떻게 살아볼까 하면 무한히 약해지는 것을 체험했죠. 그래서 죽을 것을 각오를 했어. 죽을 각오를 하고 한발 두발 나가니까 오히려 죽지 않았어요. 죽을 각오, 어려울 각오를 단단히 하면 극복된다라는 거죠.
전향한 사람들이 힘들었다는 것도 죽을 각오만 하면 됐을 거라고 봅니다. 춥고 배고프고 죽음에 직면해서 약해진 것은 동정합니다. 절대로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을 각오를 하지 못한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이 : 선생님들의 송환을 앞두고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특히 신선생님의 북송은 노모와의 이별이라는 또다른 아픔을 동반하고 있어서 모두들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신 : 나는 국제법상 인권상 인도주의상 당연히 북으로 가야하고, 북에 있는 가족이 그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통일임무를 받고 왔는데 임무도 다 못하고 올라가는 것은 정치도덕적으로 안되는 것 아니냐 하는 마음도 있었죠. 그런데 그쪽에서도 올라오라고 했고, 우리가 올라가는 길이 통일의 물꼬를 트는 일이 되니 우리는 당연히 가야합니다.
내 원래 고향은 전북 부안이고, 북에서는 순안공항이 있는 순안에서 살았죠. 이쪽에도 연고, 저쪽에도 연고가 있고 나는 특히 남쪽에 노모를 모시고 있단 말이죠. 또 남쪽에 수많은 사람들과 혈육의 정 이상으로 연계되어 있어 놔두고 간다는 게 가슴아파요. 이산가족이라는 게 전쟁이라는 부득이한 상황에서나 생기는 것인데, 통일을 지향하는 정부가 왜 새로운 이산가족을 만드냐 말이죠. 세계 양심들의 지원에 의해 감옥을 나왔지만 국제 언론 인터뷰 때마다 지적했죠. 새로운 이산가족이 있어서는 안돼요. 8·15 이산가족의 눈물바다 이런 한의 역사, 이건 종결지어야 해요.

지금 남북이 추진하는 면회소 설치, 편지왕래, 궁극적 재결합 문제를 우리 경우는 그 단계를 뛰어넘어 바로 재결합하는 획기적인 문을 여는 그런 의미에서 꼭 어머님을 모시고 가고 싶습니다. 어머니 마지막 소원이 감옥에 있는 아들 밥 한끼라도 해주고 싶어 이제껏 생존해 오셨습니다. 모시고 가서 가족들과 손자들 모두 만나고 다시 오고 하는 것이 통일의 물꼬를 트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통일의 문을 활짝 여는 기회이기에 그런 바램을 갖고 있습니다.

통일 위한 일에 여생 바치고 싶어

■이 : 선생님들은 대부분 북에서 내려오시기 전에 경제쪽 일들을 많이 하신 걸로 아는데요. 또 통일임무를 받고 이쪽에 내려와 쭉 감옥에서 지내오셨는데요. 올라가시면 어떤 일들을 하실 계획이신지요?

■신 : 여기서 태어나고 저기서 인생관을 배웠고, 여기서 감옥생활하고 다시 이쪽 사회생활하고.... 남조선 실정은 피부로 느끼고 잘 알아요. 남은 여생에 내가 일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아주 좋겠어. 기꺼이. 여기 있는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도 알고, 이런 것들을 이야기한다면 통일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겠나 싶죠. 그런 부분에서 일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또 나는 골수암이니까 북에 가면 고려의학 암치료를 하면서 금강산 요양소 같은데서 안내원을 하면서 생활하고 싶어요. 남에서 오는 사람도 만날 수 있을 테고. 남쪽과 관련된 사업, 통일운동에 관련된 사업에 여생을 마치고 싶어요. 당에서는 편히 살라고 하겠지만 힘닿는 데까지 하고 싶어요.

■최 : 우리 법에서는 60세면 은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70넘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무슨 일을 시켜달랄 입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 건강하고 하니 적합한 일을 줄겁니다. 거기에 정성을 바치는 것, 그것이 통일을 위한 일이 될 것입니다.
돌아가면 우선 그동안 살아온 복명서를 쓰는 과정이 있을 거고, 대외적으로 발표되지 않을 부분을 제외하면 36년이니까 일대기가 될 거죠. 그래서 자녀와 손주들에게 아비는 할아버지는 이렇게 살았다고 이야기해주고 싶고, 너희도 그렇게 살자고 쓰고 싶고 그렇죠.

■우 : 적당한 일을 주면 해야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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