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안개. 보일 듯 말듯. 알듯 모를 듯… 차라리 전혀 모른다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더 나을지 모른다. 경계를 흐리는 회색빛 공포. 멀리서 들려오는 조용한 굉음. 그들은 아무런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는다. 이슬이 맺히며 떨리는 눈동자와 중력에 저항하지 않고 끄덕이는 고개. 결국 그들에게 남은 최선의 선택은 단 한 가지임을 말해준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소리. 그 소리가 그들을 덮치기 전, 그들은 스스로 결단을 내린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가. 안개를 지나 모습을 드러낸 그 소리의 정체는,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었다. 그러나 늦었다. 안개를 통해 학습해온 두려움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 뒤였다. 영화 <미스트>의 마지막 장면이다.

어쩌면 안개가 주는 두려움은 그 안개 자체에 있다기보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추구하는 과정과 그러면서 견뎌내야 하는 긴장일지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최선의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 아닐까.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누구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그 경계는 언제나 회색빛이다.

안개 속 KAL858기 사건

1987년 김현희-KAL858기 사건.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이 사건이 지금도 안개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국정원발전위원회가 재조사를 했고, 진실화해위원회가 재조사를 ‘시도’했었지만, 사건은 여전히 안개에 쌓여있다. 특히 두 국가기관의 조사과정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그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천안함 사건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국정원 재조사(에 참여했던 이)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이 “말끔히 해소되었다”고 하기도 한다(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그의 말이 틀렸다기보다는,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인지,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다만, 그처럼 딱부러지게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다.

영국 외무성에 정보공개 청구를 했던 것도 이런 마음에서였다. 그렇다고 별다른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미국 정부와는 달리,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을 것 같았기에, 영국의 문서는 중요한 내용이 없을 것이라 짐작했다. 아울러,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보공개에 쉽게 응할 줄 알았다(최소한 부분공개 결정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영국 외무성은 KAL기 사건 관련 문서가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었지만, 그 공개는 모두 거부했다. 근거는 무엇일까. 바로 정보가 그만큼 민감하기 때문이다(due to sensitivity of the information held). 구체적으로, 영국 정보자유법 제27조 국제관계와 관련된 조항 때문이다. 관련 조항은 특정 문서의 공개가 영국과 다른 국가의 관계를 해칠 우려가 있을 경우 문서공개를 거부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영국 관계를 해칠 수 있는 사건?

이러한 공개거부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국/미국도 비슷한 논리를 적용하고 있다. 다만, 이번 영국 정부의 거부는 두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영국 외무성은 안보문제 관련 남과 북, ‘모두’와의 관계가 훼손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the release of information relating to security matters could harm our relations with South and North Korea). 처음 이 문구를 보았을 때 그러려니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닌 듯했다. 너무 과장된 해석을 하고 싶진 않지만, 한국 정부의 발표에 문제가 없다면, 왜 영국은 정보공개가 한국과의 관계를 어렵게 할 것이라고 했을까.

영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과의 관계부분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곧, 두 정부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문서의 공개는 영국과 한국의 관계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The disclosure of information detailing our relationship with the South Korean government could potentially damage the bilateral relationship between the UK and South Korea). 당시 한국-영국 정부가 서로 어떤 정보/의견을 주고 받았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둘째, 영국 외무성은 문서의 공개가 현재의 ‘민감한’ 시기를 고려했을 때 지역의 긴장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을 거부의 근거로 들고 있다(the release of this information could increase tensions in the region at a sensitive time). 민감한 시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추측하건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남북-북남관계, 구체적으로는 지난 3월 천안함 사건 이후의 긴장을 가리키는 듯하다. 앞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 논리는 그동안 한국/미국 정부에 정보공개 청구를 하며 받아온 답변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내용이다. 다시 말해, KAL기 사건은 현재의 한반도 상황을 충분히 악화시킬 수 있을 만큼 민감하고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지난 7월 김현희의 일본 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KAL858기는 지금도 비행을 계속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영국 외무성의 답변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기 때문에 그다지 무게를 두고 싶지는 않다. 무엇보다 영국이 실제로 어떤 문서를 보유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여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그다지 중요한 문서가 아니지만 단지 공개하기가 번거롭기 때문에 형식적인 이유를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또는 외교적 관례상 다른 국가와 관련된 비밀문서를 공개하는 것은 실례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정보기관을 포함, 상대방 국가의 첩보활동 내용이 포함되므로). 그럼에도 북쪽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굳이 남쪽과의 관계도 어려워질 것이라고 답변한 대목은, 여러 가지로 관심을 끈다.

다가오는 23주기 추모제

2010년, 어김없이 11월 29일이 다가온다. 어느 덧 23년이다. 11월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가끔씩 생각한다. 그냥 길을 걸어도 쌀쌀한데, 비행기에 타고 있었던 115분은 얼마나 쌀쌀했을까. 안기부 수사결과대로 바다에 떨어졌다면, 그 바다에서 얼마나 추웠을까. 수사결과와 다른 상황이었을 경우, 또 얼마나 두렵게 떨고 있었을까. 그리고 가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23년… 누군가에는 1년 365일이 매일 11월 29일이었을 것이다. 충격과 체념, 땀과 희망, 여기에 무력감이 뒤섞인 안개가 자욱하다. 이번 영국 정부의 결정이 이 안개를 더욱 짙게 만든 것 같아 안타깝다. 스멀거리는 안개 사이로 비행기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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