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남북연석회의는 우리 민족은 분단을 원치 않으며, 통일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연석회의가 분단을 현실적으로 저지할 힘이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점이 남북연석회의의 한계였지만,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난한 발전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본다면 섣불리 실패 운운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남북연석회의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5.10 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짐으로써 정세는 새롭게 변화합니다. 남한에서는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과 법률 제정 작업을 거쳐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수립되었습니다. 남한이 단독 정부 수립을 공식화하자 북한도 또 다른 분단 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대응하였습니다. 북한의 이런 대응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북한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처럼 공식화하지 않았을 뿐이지 내용적으로는 이미 정부 구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분만 서면 언제라도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남북연석회의 당시 남북 지도자협의회와 4김 회담에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기로 한 북한으로서는 남한과는 다른 어떤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면 북한은 그것을 어떤 과정을 통해 거쳐 채우려고 했을까요? 남한에서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과 정부조직법 제정 작업에 들어갈 즈음인 6월 2일, 북로당 정치위원회 확대회의가 개최됩니다. 이날 회의에서는 "4월 28∼29일 북조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헌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통일적인 최고 입법기구를 세우기 위한 총선을 치른다"는 방침을 결정합니다.

6월 3일 북조선 민전 확대중앙위원회는 북로당의 방침을 확인하는 한편, 그것을 위한 첫 사업으로 제2차 남북지도자협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은 북한이 통일정부에 대한 명분을 축적하는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의 수순을 공식적으로 밟아가기로 결정했음을 의미합니다.

6월 5일 북조선 민전은 김구와 김규식에게 제2차 남북지도자협의회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발송하고, 회의 장소는 김구와 김규식이 북행하기 쉬운 해주로 하자고 제의합니다. 통일정부라는 명분을 세우는 데서 김구·김규식의 남한 민족주의 세력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4월의 제1차 남북연석회의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은 현실적으로 북행 자체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설령 북행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북한에 눌러앉지 않고 남한에 돌아올 경우 테러의 위험성이 매우 높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김구와 김규식은 "지금은 상황이 변해 해주로 가는 것은 어렵다. 그러니 남북회의의 장소, 시일, 및 토의 내용 등 구체적인 방법을 협의하기 위해 평양에 체류중인 홍명희를 서울에 보내주면 좋겠다"는 요지의 회답을 보냅니다.

두 사람의 편지 내용을 들은 홍명희는 서울로 오겠다는 입장을 피력했으나, 북한 지도부는 만류했습니다. 홍명희가 서울에 갈 경우 미군정이나 이승만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북한 지도부로서는 홍명희가 남한의 어떤 지도자보다 중요했던 것입니다. 북한 지도부는 김구와 김규식의 북행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자칫 홍명희 마저 잃게 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지요.

북한은 6월 20일경 다시 김구·김규식에게 "통일 입법기구 구성을 위한 선거 문제를 토의하고자 하니 두 분 선생님도 여기에 적극 호응해 주시기를 요망한다"는 내용의 2차 서한을 띄웁니다. 그러나 김구·김규식으로서는 무조건 호응할 수는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국토 양단과 민족 분열을 막자고 4월에 평양회담을 가졌고, 앞으로도 계속 통일을 모색하자고 약속해놓고, 이제 와서 남한에서 단정이 수립되니 북한에서도 단정을 수립하겠다는 것은 민족 분열행위가 아닌가"라는 항의조의 서신을 보냅니다.

이렇게 해서 제2차 남북 지도자협의회는 김구·김규식이 불참한 가운데, 북쪽에서 북로당 등 15개 정당·사회단체 대표와 남쪽에서 연석회의 때 잔류하거나 비밀리에 38선을 넘은 17개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참석해 6월 29일∼7월 5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됩니다. 원래 계획은 해주였으나 참가 인원이 적어 평양으로 변경되었던 것입니다.

남측에서는 남로당 등 좌익과 근로인민당 등 5개 중도 좌파가 다수를 차지했고, 중도 우익은 민주독립당(홍명희), 근로대중당(강순), 건민회(이극로)밖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만큼 4월의 남북연석회의와는 참가 단체 수와 규모가 줄었을 뿐 아니라 그 의미도 미약했던 것입니다.

제2차 남북 지도자협의회는 북로당이 짜놓은 수순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의제였던 [남조선 단독선거 실시와 관련한 정세와 조국통일을 위한 장래 투쟁 계획]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헌법과 입법기관 선거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었습니다. 7월 5일 회의는 토론을 마무리하면서 [남북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결정서]와 [최고인민회의 선거 절차에 관한 합의서] 등을 채택하게 되는데, 이는 결국 제2차 남북 지도자협의회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명분 쌓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결정에 대해 김구와 김규식은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북한의 움직임을 비판합니다. 그 성명의 요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제2차 회의는 일방의 독단일 뿐 아니라 그 참가단체로 보더라도 제1차 협상에 남한을 대표해 참가한 정당·사회단체 31개에 비하여 미미하다. 또한 북한은 민의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서 인민회의를 통해 일방적으로 결정한 헌법에 따라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국기까지 바꿨다. 물론 시기와 지역과 수단·방법에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반조각 국토 위에 국가를 세우려는 의도는 마찬가지이다. 이로부터 남북은 상호 경쟁적으로 국토를 분열해 동족상잔의 길로 나갈 것이다. 이에 우리는 진정한 애국동포와 더불어 민주적 자주통일의 국가를 건립하려는 그 노선을 더욱 굳게 지켜 최후까지 노력할 것이다."({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373쪽)

이 성명이 발표되기 전인 7월 4일 김일성·김두봉은 김구와 김규식에게 서신을 보내 북한의 입장을 밝힌 바 있었는데, 그 요지는 "4월 30일의 공동성명은 정당한 것이었으나 현시점에서는 맞지 않으며, 따라서 이제 북한에서도 즉시 중앙정부를 수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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